며칠 전 한 시사 프로그램의 보조 작가 한 명이 방송국 건물 옥상에서 투신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이 밝힌 자살 동기는 과중한 업무 부담에서 오는 스트레스였다. 그런데 이 사건을 계기로 방송가에서 보조 작가의 실상에 대해 이런저런 말들이 쏟아지는 걸 보면 평소 그들의 처우에 대한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던 것 같다.
방송 작가라고 하면 으레 김수현이나 문영남, 최완규 같은 회당 2천만 원 이상의 고료를 받는 몇몇을 떠올리지만 그런 특고 작가는 수천 명 중 10~20명에 불과하다. 대다수의 작가들은 보조 작가라고 불리며 먹이사슬의 맨 하단의 열악한 환경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노동력을 착취당한다. 그들에게는 정시 출퇴근도, 주말 휴무도, 최저임금도, 4대 보험과 상여금, 퇴직금도 없다. 언젠가 메인 작가가 될 거라는 희망만이 그들을 버티게 하는 힘이다.
방송 작가의 실상은 대학에서 소모품 취급을 받으며 고통에 시달리는 시간 강사를 떠올리게 한다. 시간 강사의 부당한 처우가 사회 문제로 대두된 건 2003년 서울대 백모 강사의 자살 사건이 발생하면서다. 당시 백모 강사의 자살은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가장 최근 미국 텍사스에서 자살한 한모 강사까지 포함해 2000년대 들어서만 6명의 시간 강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시간 강사의 실상은 세상에 알려졌다.
박정희 정권의 지식인 탄압으로 탄생한 시간강사
무엇이 이들을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으로 내몰았을까. 그것은 바로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열악한 보수다. 2006년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사립대 시간 강사의 월 평균 임금은 75만원으로 335만원을 받는 전임 교수의 1/4 수준이다. 수업이 없는 방학 때는 이마저도 못 받는다.
전체 시간 강사 수는 약 7만여 명, 전체 대학 강의 중 시간 강사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40%가 넘지만 이들의 인건비는 교직원 전체 인건비의 3~10%에 불과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시간 강사들은 여러 대학을 돌아다니며 강의를 해야 하고 그렇게 하더라도 생계를 유지하기 빠듯한 형편이다.
시간 강사의 신분이 교원이 아니라는 점도 큰 문제다. 1977년 유신정권 시절, 지식인 탄압을 목적으로 교육법이 개정되면서 전임 교수가 아닌 강사는 교원의 자격을 잃었다. 1997년 제정된 고등교육법은 여전히 교원의 자격을 전임 교수로 제한하며 시간 강사의 임용은 대학에 맡긴다.
이후 대학의 교원 임용률은 늘지 않았고 시간 강사의 강의 비중은 점차 늘어만 갔다. 대학은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전임 교수 신규 채용 대신 시간 강사로 그 자리를 채웠다. 특수한 교과목을 운영하거나 담당 교수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만들어진, 과거 교수 임용 과정의 한 부분으로 여겨지던 시간 강사 제도는 이제 본래의 취지를 잃고 하나의 직업으로 고착화되었다.
"젊은 학자들에겐 연구할 시간이 없다"
거짓말은 거짓말을 낳고 해결되지 않은 문제는 또 다른 문제를 양산하는 법이다. 이 같은 시간 강사의 문제로 이제 우리는 새로운 문제에 직면해 있다.
21세기는 지식 정보화의 시대, 이제 우리는 산업화를 거쳐 지식 정보화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 산업화 시대에 생산력이 가장 중요했다면 지식 정보화 시대에 가장 중요한 건 창의력과 상상력이다. 그리고 그러한 힘은 제대로 된 교육에서 나타난다. 시간 강사로 대변되는 젊은 학자들은 바로 그러한 교육을 담당하는 한 축이지만, 작금의 상황은 이들에게 제대로 공부할 여건이나 연구할 환경, 가르칠 장을 마련해 경쟁력 있는 인재로 키우려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이들을 막다른 길로 몰고 있다.
적은 임금을 받기 때문에 여러 대학에서 많은 시간의 강의를 해야 하고, 수업 준비 이외의 잡무에 시달리는 그들에게 연구하고 논문을 쓸 시간은 충분하지 않다. 또한 제대로 된 연구실 하나 없어 방학이 되면 공부할 장소조차 마땅치 않은 그들에게 집중하여 연구할 독립적인 공간은 없는 것과 다름없다. 이런 풍토는 결국 학자들의 질적 저하를 유발하고, 학문적 토양을 붕괴하며, 소위 말하는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일이 된다.
교수 심기 건드릴까 조심하는 강사…폐쇄적 순혈주의의 폐단
또 시간 강사의 질적 저하는 곧 강의력의 저하로 나타난다. 이는 결국 수업을 듣는 대학생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시간 강사들이 차지하는 강의 비중이 전체의 40%가 넘는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렇지 않아도 높지 않은 대학 교육 수준을 더 떨어트리는 것으로, 시간 강사의 문제는 결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닌 게 된다. 지식 정보화 시대를 이끌어 갈 학자들이 역설적으로 그들이 마음껏 능력을 펼칠 대학 안에서 사장되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현실, 그리고 그 영향이 미래 사회의 동량인 대학생에게까지 미치는 현실, 그게 지금의 우리 사회의 단면이다.
시간 강사의 불안한 지위는 그들의 전임 임용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보직 교수와의 관계를 일종의 주종관계로 만들어버렸다. 이는 '군사부일체'라는 유교적 관점에서 스승에 대한 존경이라기보다는, 학계 및 학교에서의 입지 때문에 권위자인 교수의 심기와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일종의 복종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교수의 논문을 대필하거나 뒤치다꺼리를 하는 등 몸종 노릇을 하면서 시간을 허비하느라 연구하지 못하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교수의 학문적 업적에 쉽게 반대하지 못하고 그것이 절대 진리인 양 복종해야 하는 학계의 풍토는 학문의 다양성을 해치고 폐쇄적 순혈주의로 흐르게 되어 적지 않은 문제를 낳는다.
시간강사 처우 개선 없이 '대학의 발전'이 가능할까?
결국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해결책은 시간 강사에게 교원 자격을 주어 임금을 현실화시키고 지위를 안정화시켜 연구 여건을 조성해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2004년 국가인권위에서는 시간 강사의 처우를 전임 교수에 비례하게 하여 차별을 없애라고 교육부에 권고했으나 교육부는 재정적 어려움을 이유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지난 17대 국회에서는 시간 강사의 교원화를 골자로 하는 고등교육법 개정안이 발의되었으나 1년 넘게 국회 상임위에서 계류되다 임기 만료로 폐지됐다. 최근 18대 국회에서 다시 법안이 국회에 제출된 만큼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시간 강사의 교원화가 이뤄져야 할 것이다.
세계화를 외치며 외형적인 몸집 불리기에 경쟁적으로 열을 올리는 대학. 물가 상승률을 가볍게 웃도는 등록금 인상률, 재단 전입금과 각종 기부금 등 국공립 대학을 제외한 상위권 사립대학의 자금수입은 수천억 원대에 이르고 있다. 저명한 해외 교수들을 초빙하고, 이익이 되는 사업에 투자하면서, 건물을 새로 올리고 시설 교체에 나서는 등 소위 경쟁력 있는 대학 만들기에 열을 올리고 있는 와중에, 한 번쯤 대학 내 사각 지대에 놓여 있는 시간 강사에게 시선을 줄 법 하건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앞서 말했듯이 경쟁력이란 결국 교육에서 나온다. 좋은 환경에서 열심히 연구하고 공부한 학자들이 양질의 교육을 가르칠 때, 그 때 비로소 경쟁력이 생기는 것이다. 교육부가 3000억 원이라는 막대한 예산으로 기숙형 공립고를 지으면서 시간 강사의 제도적 지원은 등한시하고, 대학이 다음 세대의 교육을 책임질 시간 강사들이 받는 부당한 처우와 열악한 현실을 외면하고 방치하면서, 학문의 발전, 대학의 발전, 국제 경쟁력을 논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넌센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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