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이 고개를 빼꼼 내밀기 시작한 것은, 각 산업 분야별로 차이야 다소간 있었겠지만, 대략적으로 2000년대 초반의 월드컵을 전후해서였다. 대공황, 이른바 IMF 체제라 불리던 극한의 경제적 허무주의를 통과해서였을까. 의지할 것은 과거의 영광뿐, 그렇기에 노스탤지어란 헤픈 수식이 될 수밖에. 레트로 붐에 힘입어 등장했던 상품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추억이란 돈을 주고서라도 살만한 물건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것뿐이었다면 레트로란 한때의 웰빙 붐처럼 금세 사그라졌겠지. 하지만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2008년 현재, 지금-여기의 한국을 강타하고 있는 것은 아직도 여전한 레트로 붐이다. 진부해졌냐고? 아니다, 도리어 더욱 강력해졌다는 것이 중평. 수많은 뉴 트렌드가 헤게모니를 잡음과 동시에 진부한 올드패션으로 퇴락해가던 와중, 레트로 만큼은 뛰어난 자기-갱신 능력을 바탕으로 흔들리지 않고 곧게 지금까지 버텨온 것이다.
특히 한국 대중음악 씬에서의 레트로는 눈여겨볼 만한데, 노스탤지어라는 키워드 하나만으로도 간단하게 설명될 수 있던 레트로는 이미 구식이 된지 오래. 2007년과 2008년 전반기를 통틀어 제2의 아이돌 전성시대를 활짝 열어젖힌 빅뱅과 원더걸스, 또한 그와 별도로 훌륭한 작품을 들고 찾아온 대규모의 신진 밴드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진화하는 레트로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혹자는 딴죽을 걸 수도 있으리라. 원더걸스 같은 아이돌 그룹과 '브로콜리 너마저', '갤럭시 익스프레스' 등의 인디밴드들이 보여주는 성과물들이 같은 경향 아래에 있다고? 물론, 그렇다. 경향으로서의 레트로는 포괄적인 큰 줄기이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과거의 유물을 활용하는 것이라면 모두 경향으로서의 레트로라는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겠다. 하지만 그 세부적인 전략에 있어서의 차이는 분명 존재하고 있으며, 이는 '무엇을' '어떠한 방식'으로 활용할 것인지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한 차이는 사실 '본질적인 차이'로서 이를 고려하지 않고서 2008년 현재진행형의 레트로를 읽는 것은 수박겉핥기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개개의 차이도 있을 것이나, 그럼에도 눈에 띌 정도로 군(群)이 형성되고 있다 판단되는 개별들의 활동을 묶어 크게 세 가지의 양상으로 분류해보았다.
■ 패셔너블한 레트로
가장 대중적이며, 가장 최신의 유행을 주도하고 있는 레트로의 양상이다. 다들 체감하고 있듯이 2007년부터 현재까지 (케이블을 포함한) 매스미디어 음악 씬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이들은 레트로를 적극적으로 표방하는 2세대 아이돌 그룹들, '거짓말'의 빅뱅, 'L.O.V.E'의 브라운 아이드 걸스, '소녀시대'의 소녀시대, 'Tell me'의 원더걸스이다(이외에도 적지 않음. 최근 엄정화의 'D.I.S.C.O' 역시 대표적이겠다). 이들은 주로 80-90년대 댄스 팝의 공식을 현재적인 세련된 사운드로 재전유하는 전략으로 승부수를 걸고 있는데, 현재까지의 스코어만 따지자면 대성공. 지지부진했던 한국의 메이저 씬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그들의 포지셔닝은 2000년대 초반의 '후줄근한' 복고와는 사뭇 다른 모습인데, 80-90년대의 장르적 공식을 적극 이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가장 패셔너블하다. 심지어 엄정화는 스타일로만 따지자면 가장 미래지향적이기까지 하다. 그들이 인용하는 공식들 역시 한국 대중가요의 것들이 아닌데, 영·미·유럽권의 레트로한 팝 사운드가 그들의 주재료이다. 그렇기에 70-80년대의 '후줄근했던' 시대상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던 바로 앞 세대의 레트로 전략과 (당시에도 동경의 대상이었던) 팝 사운드를 활용하는 이들의 전략은 꽤나 다른 감성적 기반을 토대로 하여 세워졌다 볼 수 있다.
샘플링/표절에 관련된 의혹이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상황임에도 불구, 원래적인 그들의 지향 자체는 '동어반복'이나 '답습'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80-90년대 댄스팝의 장르적 공식들이 일렉트로니카의 세례를 받은 디지털 팝 사운드, 그리고 최신의 아이돌 시스템을 만났을 때 어떠한 방향으로 진화하게 되는가를 우리는 몸소 체험하고 있는 중이다.
■ 노스탤지어/로파이로서의 레트로
메이저 씬에서 가장 메이저다운 방식으로 80-90년대의 영·미·유럽권 팝 사운드를 현재화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면, 2000년대 초반 바람을 일으켰던 '아날로그적 향수'의 바통을 이어받은 이들은 바로 인디씬의 모던록/모던포크 주자들이다. (지면관계상 모던록에만 초점을 맞춘다.) 9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삼아 속속들이 등장한 델리스파이스, 언니네 이발관을 필두로 한 1세대 모던록 밴드들의 주관심사는 당대 영미권을 강타하던 각종 록/팝 사운드를 자양분삼아 기존 가요계의 흐름과는 불연속적인 선분을 창조해내는 것이었는데, 여기서 '한국적인 것'은 종종 배제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스웨터의 첫 정규음반 [Staccato Green]이 발매된 2002년을 전후해 한국의 모던록 씬에는 앞서의 기조와 분명한 입장의 차이를 지니는 2세대라 불릴만한 밴드들이 속출했으며, 이들은 1세대들이 수용했던 영미권의 록 사운드에 라디오친화적인 한국의 80/90년대 대중가요적 감성을 적극적으로 결합시킨 음반을 등장시킨다. 이들은 유연한 공동체쉽을 바탕으로 이후로도 죽 평균 이상의 퀄리티를 지닌 바이오그래피를 차곡차곡 쌓아 가는데, 슬로우 쥰의 [Reverse](2007)와 스웨터의 [Highlights](2008)가 이들 집단의 최신작들이다.
한편, 인디록 씬에서 유난히 훌륭한 작품이 쏟아졌던 2007년의 후반기가 시작될 무렵 발매된 브로콜리 너마저의 데뷔 EP [앵콜요청 금지]는 시간이 지나면서 초기의 생동감이 다소간 가라앉고 있던 2세대 이후의 한국 모던록 씬에 모처럼 풋풋한 신예들이 등장할 것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2008년에 데뷔 EP [Appetizer]를 발매한 달콤한 비누를 포함하여, 이들은 비록 양적으로는 아직 적은 수에 불과하지만 그 영향력 면에서라면 가벼이 볼 수 없을 것. 실제로 한국 인디록 씬에 꾸준한 관심을 가지는 리스너들 중 다수가 브로콜리 너마저를 2007년 최고의 루키이자 기대주로 뽑고 있는 것은 고무적이다.
이들의 기반이 기존의 2세대 모던록 밴드들의 그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음에도 불구, 이들은 레트로한 취향을 조금 더 급진적으로 몰고 나가는 경향에서 차이를 보인다. (기존의 2세대들이 단정한 웰-메이드를 추구했음을 기억하라.) 거친 질감을 세련되게 만드는 프로세스를 건너 뛰어버리고, 날것의 청춘 그 자체를 노래하는 이들의 모던록이 2세대의 반반한 웰-메이드 기타팝보다 더욱 끌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로파이하며 촌스러운, 심지어 퉁명스럽기까지 한 기타톤이 가난한 청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어떠한 이끌림이 될는지, 우리는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 콜라주로서의 레트로
앞서의 두 양상이 기본적으로 원재료들에 기입되어 있는 현실과의 시차를 비교적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면, 이번에 소개할 마지막 양상, 즉 콜라주(collage)를 주요한 작법으로 활용하는 축은 큰 범주에서의 레트로에는 속해있되 그 기초적인 전략부터 앞서의 것들과의 차이를 부각시킨다. 여기서의 콜라주는 미술에서의 콜라주 기법을 빗댄 것으로서 이러한 작법을 본령으로 삼는 그룹은 과거의 유산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해체/재조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법 자체가 '낯설게 하기'를 주요한 과업 중 하나로 삼고 있는 바, 한국의 메이저 가요 씬에서 전례를 찾아보기는 힘들며 인디록 씬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특정한 양상이라 할 수 있겠다.
익숙지 않은 만큼 창작자가 이러한 기법을 소화하는 데에는 일정 정도의 음악적 숙련도가 요구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2000년대 초반의 몇몇 밴드들에 의하여 행해진 시도들, 예를 들어 국악과 메틀의 크로스-오버 등은 대부분 사실상 불발이었다. 조금 더 발효가 필요했던 것일까. 그런 의미에서 실질적으로 온전한 작품으로서의 선구적인 작업이라면 3호선 버터플라이의 [Time Table](2004)이 거론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본격적인 발동은 역시 2007년. 웹진 <보다>의 첫 번째 공동작업물이기도 했던 '2007년 올해의 앨범' 차트에 몽구스, 그림자 궁전, 굴소년단, 갤럭시 익스프레스,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 등 이러한 기법에 적극적인 밴드들이 다수 이름을 올린 것을 우리는 눈여겨보아야 한다.
이들이 참조하는 올드한 레파토리들은 개별 밴드마다 큰 차이를 보이는 연유로 짧은 지면에서 다루기는 부적절하지만, 그럼에도 교집합을 일부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한국적인 것'의 변용. 갤럭시 익스프레스와 그림자 궁전은 과도하게 노이지하다는 점만을 제외하면 전혀 다른 록을 선보이고 있지만 딱 한 곳, 산울림에서 접점을 찾게 된다. 몽구스의 음악은 매우 유쾌하면서도 한국적 한의 정서를 은연중에 표출하며,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는 '도시생활'에서 쫀득쫀득한 와우 이펙터를 필두로 훌륭하게 80년대 초반의 후줄근함을 패러디해낸다.
그러나 단순히 '한국적인 것'을 활용함으로서 이들이 특별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들은 한국적인 것을 굳이 강조하지는 '않는' 지점에서 영민해진다. 2000년대 초반의 미숙아적 시도들 대부분이 한국적인 것의 무게감에 짓눌려 훌륭한 배합에 실패했음을 상기한다면, 한결 가벼운 방식으로 한국적 로컬리즘(localism)을 제시하는 이들의 발걸음은 가볍다. 익숙했던(familiar) '한국적인 것'은 그들의 콜라주 안에서 '색다른(exotic) 것'으로 다시 태어나며, 이는 미술에서의 콜라주가 그렇듯 무엇보다 흥미로우며, 재미있기도 한 경험이다.
지금까지 한국의 대중음악 씬 전반에 걸쳐 진행되고 있는 레트로 붐의 양상을 세 가지로 분류하여 살펴보았다. 이 세 가지 양상은 언뜻 전혀 상관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상호적인 측면이 분명히 존재한다. 예를 들어 '패셔너블한 레트로'는 '콜라주로서의 레트로'와 음악적으로 가장 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트렌드의 전위를 마크하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노스탤지어/로파이로서의 레트로'는 '콜라주로서의 레트로'와 지역적인 활동 반경이 겹치며(이는 생각보다 중요한 지적일 수 있다), 노스탤지어를 적극 가용하는 점에서 '패셔너블한 레트로'의 전략과 또한 겹친다. 이는 이러한 양상들이 서로 배제하기 보다는 오히려 상호 참조·보완하며 진화해나갔음을 비춘다.
노스탤지어라는 키워드 하나만으로 설명될 수 있던 레트로의 시대는 이미 지나간 지 오래, 최소한 한국의 대중음악씬에서 레트로는 '생존을 위하여' 다양한 가지로 뻗어나갔으며, 앞서 분류한 세 가지 양상은 그 중 몇몇 특징적인 흐름에 대한 기록이다. 당연하게도 이에 포함되지 않을 개별들이 충분히 존재하고 있기도 하다. ('키치로서의 레트로'는 큰 덩어리지만 역시 지면관계상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한 개별들까지 고려했을 때의 레트로는 하나의 거대한 흐름으로서 현재의 대중음악 씬을 논하는 데 있어 제외되어서는 안 될 굉장히 비중 잇는 요소일 것이다.
역설적으로 지금-여기에서 답습이 아닌 '한 걸음 더'로서의 레트로만큼 흥미진진한 아이템도 없지 않은가? 그렇기에 레트로 트렌드에 대한 현재적인 평가는 일단 'Thumb-Up(엄지손가락 들어올림)'에 가까워 보인다. 하지만 섣부르게 미래를 예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 내다보기에 앞서 우리는 먼저 역동적인 현재진행형의 흐름에 충분한 관심을 쏟아야 할 것. 창조적인 아티스트들에게 합당한 관심이라면, 그들은 지금까지 진화해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진취적이며 훌륭한 음악을 들려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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