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개막식을 연출했던 장이머우 감독은 폐막식에서 영국의 아이콘 데이비드 베컴(LA 갤럭시) 등 세계적 스타들과 함께 다시 한 번 '블록버스터' 폐막식을 마련했다.
하지만 블록버스터급 행사만이 감동을 주지 않듯 화려한 메달리스트의 성공신화만이 스포츠팬들을 감격시킨 건 아니다.
언론에서 주목하지 않는 종목에 출전했지만 세계적인 선수들과 당당히 기량을 겨루며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갔던 선수들은 많았다. 그들의 도전은 앞으로 한국 스포츠의 저변을 넓힐 기름진 밑거름이 될 것이다.
비록 메달권에 들지는 못했지만 용기 있는 도전으로 올림픽을 빛냈던 숨은 영웅들을 조명해 보는 것은 이번 올림픽에 대한 그 어떤 '결산' 보다 의미 있을 것이다.
■ 이정준이 있다
수영에서 금메달을 딴 박태환과 함께 한국이 이번 올림픽에서 거둔 가장 값진 성과 중 하나는 육상 남자 110m 허들에 출전한 이정준(24·안양시청)의 '발견'이다. 이정준은 불모지나 다름없던 한국 육상 트랙 선수 중에서 처음으로 올림픽 예선 1회전을 통과하는 기염을 토했다. 내친김에 그는 2회전에서 13초55로 한국신기록을 갈아치우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한국은 오랜 동안 올림픽이 열릴 때마다 종합순위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며 스포츠 강국의 반열에 올랐지만 '올림픽의 꽃' 육상에서는 철저히 소외됐다. 기초종목에 대한 무관심과 부실한 인프라, 얇은 선수층은 한국 스포츠의 최대 콤플렉스 중 하나였다. 2011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열리는 나라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다.
육상 최약체국의 이정준은 이번 올림픽에서 육상도 투자만 하면 얼마든지 세계와 겨룰 수 있음을 보여줬다. 올림픽을 앞두고 그는 중국, 일본으로 전지훈련을 다녀왔다. 이 과정에서 그는 아시아 육상의 영웅 류샹(중국)과 같이 훈련하는 등 소중한 경험을 하기도 했다. 길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이정준은 스피드 보완의 필요성에 눈을 떴다.
0.1초 싸움을 이어가는 이정준은 내년 베를린에서 열릴 세계선수권대회, 내후년 아시안게임에서 다시 한 번 '한국 최초'의 수식어를 붙이기 위해 외롭게 달릴 것이다. 한국 최초의 올림픽 준결승 진출, 한국 최초의 13초2대 기록, 한국 최초의 올림픽 메달 획득. 이 꿈이 실현될 가능성을 이정준은 보여줬다. 물론, 이정준을 향한 찬사는 그와 함께 이번 올림픽에 참석한 육상선수 16명 모두에게 동등하게 쏟아주어야 한다.
■ 물살을 가른 그들의 탄탄한 근육
사실 노젓기는 한국의 남성들이 즐기는(?) 스포츠다. 웨이트 트레이닝 바람이 불면서 많은 남성들이 퇴근길, 점심시간에 헬스클럽에 들러 땀을 뻘뻘 흘리며 노젓기를 한다.
불행한 일이지만 올림픽에서는 얘기가 다르다. 아무도 물 위에서 팔 힘만으로 펼쳐지는 속도 경쟁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카약과 카누 경기가 주는 시원스런 속도전은 한국인에게 익숙지 않은 풍경이다. 이 무대는 예전부터 유럽 선수들이 독차지했다.
하지만 여자 카누카약 1인승(K1)에 출전한 이순자(30·전북체육회)는 의미 있는 도전을 했다. 한국 카누 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쿼터를 따내며 올림픽 무대에 나갔다. 배를 가지고 가기 어려워 빌린 배로 경기를 치러야 했다. 올 초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을 줬던 '한국판 쿨러닝' 봅슬레이 대표팀을 연상케 했다.
이순자의 도전은 아쉽게도 예선 1회전에서 끝났지만, 올림픽 무대에 배를 띄운 것 자체로 한국 수상스포츠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이순자 외에도 세계와 당당히 맞선 한국의 젊은 선장들은 많았다. 남자 요트 레이저급에 출전한 하지민(19·한국해양대)은 전체 출전선수 43명 중 15명을 제쳤다. 같은 종목 RS:X급에 출전한 이태훈(22·경원대)은 35명 중 18위로 항해를 마쳤다.
조정대표 김홍균·장강은(남자 경량더블), 신영은(여자 싱글스컬), 고영은·지유진(여자 경량더블)은 가느다란 배에 몸을 맡기고 덩치 큰 외국 선수들과 외로운 사투를 벌였다.
■ 전쟁사 재현 무대에 선 근대5종 선수들
근대5종에 출전했던 한국 선수에 관심을 갖는 이는 거의 없었다. 근대5종이 무슨 종목들로 구성됐는지를 맞추기도 쉽지 않다.
근대5종은 옛 전쟁의 무대를 경기장으로 옮겨다놓은 스포츠다. 사격·펜싱으로 상대방을 쓰러뜨리고, 수영·크로스컨트리로 어려움을 헤치고 이동하며, 말을 타고 기동전을 재현한다. 근대 올림픽을 제창한 삐에르 쿠베르탱 남작은 "근대5종 경기를 하는 사람은 승리하지 못하더라도 우수한 만능 스포츠맨이다"라고 말했다.
이 전장에 남동훈(25·상무)과 이춘헌(28·대한주택공사) 두 선수가 섰다. 윤초롱(19·한국체대)은 한국 근대5종 사상 처음으로 올림픽에 참가한 여자선수가 됐다.
하지만 이들이 받아든 성적표는 그리 좋지 않았다. 남동훈은 크로스컨트리에서 전체 1위를 하는 투혼을 보였지만 최종합계 4968점으로 28위에 그쳤다. 이춘헌은 4316점을 따내며 33위에 머물렀다. 윤초롱은 36명 중 33위를 기록했다.
이들은 비록 눈에 띄는 성적을 올리는데는 실패했지만 그 옛날 세계를 피로 물들였던 나라의 후예들과의 전투에서 의미 있는 기록을 남겼다.
■ 한국 생활 스포츠의 현주소
사이클에 걸린 금메달 수는 무려 18개다. 한국의 '메달밭' 태권도보다 10개가 많다. 차기 올림픽 개최국 영국은 이 종목에서만 금메달 8개를 쓸어갔다.
비결은 집중적인 투자였다. 영국은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높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 사이클을 전략 종목으로 선택, '10년지계'를 세우고 집중 지원했다. 고든 브라운 총리마저 이 종목 육성에 목소리를 높일 정도였다.
이번 올림픽에서 영국의 급부상은 차기 개최국으로서의 자존심을 세워야 한다는 사명감과 과감한 투자가 밑바탕이 돼 이뤄낸 성과다. 그 중심에 사이클이 있었다.
한국에서도 사이클은 인기가 많다. 많은 직장인들이 출퇴근길에 자전거를 애용한다. 경륜장은 환상을 좇는 이들로 북적댄다. 하지만 메달 경쟁 스포츠로서는 큰 관심을 받지 못한다. 랜스 암스트롱이 가져다주는 감동 드라마를 써낼 이를 발굴하기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이런 척박한 토양 위를 이민혜(23·서울시청)는 달렸다. 힘껏 페달을 밟았지만 실격자를 제외하면 꼴찌였다. 마치 카레이스처럼 선수 하나에만 수많은 스태프가 달라붙는 유럽 선수와는 지원 수준을 비교하기가 민망한 환경이었지만, 그는 하얀 피부의 선수들을 열심히 좇아갔다.
박성백(23·서울시청)은 개최국으로 자동 출전했던 서울 올림픽 이후 처음으로 도로 사이클에 출전했다. 달에서도 보인다는 만리장성 산악지대를 7번 왕복하는 죽음의 레이스였다. 참가선수 143명 가운데 완주한 선수가 90명에 불과할 정도였다. 박성백은 88위로 골인했다. 7시간이 넘게 외로움과 싸웠고, 빛나는 승리였다.
■ 이형택의 아쉬운 올림픽 은퇴 무대
한 때 그는 한국을 뒤흔들어 놓았다. 아니,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한국 최초로 세계 4대 메이저대회인 US오픈 16강에 오르고 세계랭킹 100위권 내에 이름을 올렸다. 한국 테니스의 간판 이형택(32·삼성증권)은 이렇게 한국 테니스, 아니 스포츠 역사에 길이 남을 선수다.
하지만 테니스의 영웅이 마지막으로 찾은 올림픽 무대에 관심을 가지는 방송사는 없었다. 은퇴 무대도 쓸쓸했다. 한국 테니스 선수 중 유일하게 올림픽 무대를 밟은 이형택은 지난 11일 열린 남자단식 1회전에서 손쉬운 상대로 여겼던 엘살바도르의 라파엘 아레발로(세계랭킹 447위)에게 1-2(6-4, 3-6, 4-6)로 역전패했다. 서브 게임이 생각만큼 풀리지 않았다.
한국 스포츠 스타들의 뒷모습은 언제나 쓸쓸하다. 인기종목, 비인기종목을 가리지 않는다. 프로 무대를 빛낸 선수들은 나이가 차면 등 떠밀리듯 팀에서 은퇴를 강요당했다. 베테랑을 예우하며 화려한 은퇴식을 만들어주는 외국의 그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시청률에 목을 매는 방송사의 냉정함은 한국 테니스를 세계에 알렸던 선수라고 피해가지 않았다. 떠나는 이, 약해진 이에게는 더이상 관심을 주지 않는 한국 특유의 비정함은 이형택에게서 생생히 드러났다.
우리는 또 이렇게 한 명의 영웅을 역사의 저편으로 떠나보냈다. 이형택의 퇴장은 '영웅은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평범한 스포츠계의 진리를 우리에게 일깨워줬다.
■ 쓸쓸히 탈락한 한국의 '온고지신'
이형택이 선수 개인의 퇴장으로 아쉬움을 남겼다면 유승민(26·삼성생명)은 한국 탁구의 현주소를 보여주며 올림픽 무대를 내려왔다.
유승민은 현 세계 탁구 무대에서 드물게 '고전탁구'를 구사하는 선수다. 라켓 한 면만 쓰며 과감한 드라이브로 승부를 거는 팬홀더 전형의 힘싸움형 선수는 현재 세계 톱랭커 중에서 유승민 정도를 제외하곤 찾기 어렵다. 이미 세계 탁구 무대에서는 라켓 양면을 자유롭게 쓰는 쉐이크핸드 전형이나 중국 특유의 이면(裏面)타법이 대세를 장악하고 있다.
유승민은 유남규-김택수로 이어지는 팬홀더 전형을 계보를 잇는 선수다. 상대방의 빈틈으로, 때로는 정면으로 과감하게 공을 밀어붙이는 드라이브 싸움이 장기다. 시원시원한 공격을 보여주지만 이번 올림픽에서 드러났듯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하기 무척 어렵다는 게 이 전형의 치명적 약점이다.
남자 단식에서 유승민의 이른 탈락으로 탁구는 일찌감치 새로운 스타일의 선수들이 무대를 차지했다. 유승민의 조기 탈락이 아쉬운 이유다. 하지만 그의 의미 있는 도전이 이어질 무대는 아직도 많다. 그의 나이 이제 스물여섯이다. 물론 전제가 있다. 한국 탁구계가 이번 올림픽에서 드러난 계파갈등 등 선수의 앞길을 막는 일을 다시 보여줘선 곤란하다.
■ 아시아 대표 요정의 황홀 연기
종합점수 66.150점으로 전체 12위. 상위 10명만 출전할 수 있는 결선에는 오르지도 못했다. 하지만 개최국 중국을 제외하고 리듬체조 선수 명단에 이름을 올린 아시아 선수는 신수지(17·세종고) 밖에 없었다.
신수지의 성적은 나이를 감안하면 매우 뛰어났다. 이번 올림픽에서 그보다 어린 선수는 상위 랭커에 없었다. 그는 주종목인 리본 연기에서 왼발을 축으로 하며 오른발을 머리 쪽에 바짝 붙이고 원을 그리는 '백 일루전(back illusion)을 연속해서 아홉 차례나 성공시키며 기립 박수를 받기도 했다. 왼발이 조금만 떠도 감점인 고난도 연기였다. 신수지는 이번 대회에서 백 일루전을 가장 많이 하는 선수였다.
리듬체조의 불모지 한국에서 그는 홀로 찬란하게 꽃피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수지가 다른 비인기종목 선수들에 비해 엄청난 관심을 받았던 대목은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피겨의 김연아와 함께 일찌감치 '국민 여동생'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은 그인지라 방송사 중계망도 그를 놓치지 않았다. 방송사의 경기 생중계 기준은 메달 획득 가능성 여부가 아니라 시청률이었음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 인민에게 16년 만의 최고 성적 전한 북한 선수단
금메달 2개, 은메달 1개, 동메달 3개. 북한은 '혈맹국'에서 열린 올림픽에 출전해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이후 가장 좋은 성적을 거뒀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이후 8년 만에 금메달을 따기도 했다. 그것도 2개 씩이나.
기대했던 '인민체육인' 계순희(여자 유도)와 '아시아 최강' 여자 축구에서는 고배를 마셨다. 대신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여자 역사(力士) 박현숙이 63kg급에서 세계를 번쩍 들어올렸다. 1kg차의 긴박한 승부였다.
두 번째 금메달도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여자 기계체조에서 나왔다. 홍은정은 도마 결승에서 세계선수권 3연패에 빛나는 중국의 청페이를 따돌리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아쉬움도 남았다. 남자 사격에 출전한 김정수는 은메달과 동메달을 목에 걸었으나 도핑테스트에서 양성반응이 나와 메달을 박탈당했다. 새로운 인민 영웅을 배출한 북한 선수단의 옥의 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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