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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한국의 보루'였던 KIST가 이 모양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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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과학한국의 보루'였던 KIST가 이 모양이라니...

[기고] 문화재로 '전락'한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지난 주말 서울 홍릉에 있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엘 갔다. 한 과학기술계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도심 한 복판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신록이 싱그런 KIST경내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테르펜 등이 실린 피톤치드 향과 함께 흡입하며 경내를 들어가는 동안, 너무 행복했다.
  
  추억의 과학기술 산실 KIST KIST- '과학입국의 산실'이자 '한국과학기술의 메카'였던 그곳은 나에게 각별한 공간이었다. 나 자신 이공계 학도로 저널리스트의 길을 가고 있지만, 과학기술의 번성이 곧 대한민국의 번성임을 굳게 믿는 자로, 1980년대 초중반 과학기술담당기자 시절, 그리고 1990년대 중반 과학기술담당기자 재수 시절 자주 들렀던 곳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곳을 사랑하는 이유는 앞서 체험한 바로 도심 속의 숲이라는 특별한 이미지가 주는 푸근함도 푸근함이지만, KIST가 주는 정중동(靜中動)의 역동성 때문이었다. 출입기자 시절, 그곳을 자주 찾았다. 특히 기사거리가 고갈됐을 땐 KIST를 찾았다.
  
  당시 홍보과장이었던 장재중 형에게 쳐들어가 불문곡직 "기사 내놓으슈" 때를 쓰기도 했고, 권태완 박사다 이춘식 박사다, 민석기 박사다 신응배 박사다 이곳 저곳 연구실로 불쑥불쑥 다니면서 알지도 못하는 첨단분야 연구를 취재하면서 (성과에 대해) 함께 기뻐하기도 하고, (모자라는 예산 때문에) 함께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과학기술성장동력 KIST 다른 출입처 기자들이 더러 대낮부터 호화판 술자리를 벌일 때, 비록 KIST 구내식당에서 '짭밥'을 나눠먹으면서도 우리는 행복했다. 한국의 성장동력 창출에 매진하는 일꾼들, '10배의 급여+미국 시민권'까지 팽개치고 "조국을 위해 일해달라!"는 지도자의 간청 한마디에 귀국 보따리를 싼 애국자들과 함께 하는 식사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KIST연구진의 성과들을 기를 쓰고 1면 톱으로 사회면 톱으로 밀어 올리느라 고달팠다. 듀폰 케블라 섬유의 수십배 강도를 지닌 아라미드 섬유를 개발한 윤한식 박사의 쾌거를 비롯한 수다한 KIST의 연구 성과는 그렇게 신문과 방송의 주요 뉴스로 세인들에게 전달됐다. 그런 성과를 전달하는 메신저 역할만으로도 뿌듯했다. 그 시절 우리는 친구였고, 동지였다. 그리고 의기투합했고, 자부심도 있었다.
  
  '가'급 보안시설 훔쳐보는 고층아파트
  
  그런데 지난 주말, 검문소 두 곳을 지나 KIST경내로 들어서자마자 아연했다. 본관 서쪽에 괴물처럼 우뚝 선 10여 채의 고층아파트를 목도한 것이었다. 이게 웬일인가? 적어도 내가 알기로 KIST는 옆에 붙어 있는 옛 국방과학연구소(ADD) 자리의 한국국방연구원(KIDA)과 함께 '가'급 국가보안시설이다. 그 시설을 창문만 열면 내려다 볼 수 있는 무려 23층 짜리 아파트가 줄줄이 서 있는 것이었다.
  
  KIST 관계자에게 물었더니, "민선 지방자치제가 시행되고 부터 보안이고 뭐고 KIST가 보호받을 안전장치가 하나 둘 박탈되더니 드디어 이 모양이 됐다"고 넋두리하는 것이었다. 성북구청이 막무가내로 수천 세대의 대단위 아파트 공사 허가를 내줘 이제 준공 단계에 와 있다는 거였다.
  
  정작 KIST는 플랜트도 못지어
  
  더 한심한 것은 정작 KIST 경내는 풍치지구로 묶여 4층 이상의 건물을 지을 수 없고 신축허가도 잘 내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본관을 비롯한 몇 개 동의 연구동 이외에 최근에 신축된 건물이라곤 아파트 쪽으로 지어진 건물 한 채가 고작이었다. 그것도 성북구청이 아파트 허가 내줄 때 미안한지 끼워 팔기 식으로 내준 거라고 했다.
  
  실제로 1960년대 중반 건축 당시 최신식 초호화건축물로 관심을 끌었던 KIST 연구동은 이제 담쟁이 덩굴로 왜소함을 위장해야 할 정도로 초라했다. 시멘트로 곳곳을 덧씌운 본관건물은 더 흉물스러웠다. "증축이나 개축이 안된다면 손질이라도 하지 그러냐"고 했더니, KIST 본관은 서울시 문화재로 지정됐다나 뭐라나. 그래서 그 험한 몰골 그대로 둬야 한단다.
  
  가장 심각한 것은 이 같은 건축 규제가 연구에 막대한 지장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화학이나 환경분야 등의 연구에 있어 파일럿 플랜트를 만들어 가동해 볼 필요가 있을 경우에도 그 자체가 불가능하니 연구 대상 선정에서부터 제약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장자(長子) 연구소의 그늘 KIST가 어떤 곳인가! 1965년 5월 한ㆍ미정상회담에서 당시 양국의 대통령이었던 박정희와 린든 존슨이 공동성명에 설립에 합의, 이듬해 2월 한국과학기술연구소라는 이름으로 출범한 대한민국 최초의 종합과학기술연구기관 아닌가.
  
  통폐합 좋아하는 전두환 정권에 의해 1981년 한국과학원(KAIS)과 함께 한국과학기술원(KAIST)으로 통합되는 우여곡절 끝에 1989년 6월 12일 기초 및 원천 기술 개발을 위한 대형 국책연구과제를 수행하는 종합연구기관으로서 한국과학기술원 연구부를 독립시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개발연대엔 한국 과학기술의 산실로 국가 산업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해온 장자연구기관이었다. 주위의 시샘을 받을 정도로 과분한(?) 대우와 대접을 받았던 것도 사실이다. 박정희 정권 시절, 박정희는 KIST로부터 월례보고를 받으면서 과학자를 격려할 정도로 애착을 보였단다. 월례보고를 받기 위해 KIST 경내를 드나들면서 "왜 저 나무가 힘이 없느냐, 저기는 나무가 없다"는 등의 지적을 하면서 정원 가꾸기에도 늘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건 연구인력을 삼고초려(三顧草廬)하여 유치한 정부로서 응당 해야 할 도리였고, 당시의 연구 성과가 대한민국 발전에 끼친 공로를 보더라도 당연한 것이었다고 하겠다. 물론 세월에 흐름과 국력 신장에 따라 세계 초일류기업들의 연구개발 능력이 엄청나게 높아졌고, 대학과 다른 국책 연구소에서도 연구 개발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KIST의 위상이나 역할 축소는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해도 해도 너무한 것 아닌가. KIST가 아직도 장자 연구기관임에 틀림없는데 말이다. 지난 주말 오랜만에 만난 KIST인(人)들에게서 예전의 패기와 열정을 찾기가 어려웠던 것은 제어 불가능하게 솟아오른 서편의 오만한 고층아파트가 드리운 그림자 때문이었는가, 아니면 풍치지구와 문화재라는 멍에로 신증축마저 못하는 좌절의 아픔 때문이었는가?
  
  KIST人들도 심기일전을!
  
  KIST人들에게도 묻고 싶다. 작고한 원로 개그맨 이주일의 말 마따나 "배울 만큼 배웠고 가방 끈도 길 만큼 긴 분들이 왜 그리 풀 죽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가?"고 말이다. "그냥 이렇게 주저앉는다면 당신들은 선배 KIST人들에게 무어라 해명하겠는가?"고 말이다. KIST본관에 걸린 박정희의 휘호 '과학입국(科學立國)'이 그 어느 때보다 우울해 보인 것은 나만의 감정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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