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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을 메쳤다'는 이제 그만

[베이징 2008] 스카이 김, 하야카와 나미, 그리고 당예서

'국제화'가 이미 지나가버린 말이 된 지금, 스포츠 선수의 국적변경은 논란거리도 아니다. 시장 전체가 단일 기구로 묶인 축구의 경우 선수들은 외국무대에서 편한 선수생활을 하기 위해 종종 이중국적을 취득한다. 브라질의 히바우도와 호나우도는 스페인 국적을 취득한 바 있다. 경우가 다르지만 이싸빅(전남)이나 이성남 등도 한국에서 축구 생활을 이어가던 중 국적을 바꿨다.

이는 국가 간 경쟁의 장인 월드컵에서도 일반화된 현상이다. 일본은 이미 오래 전부터 축구 국가대표팀의 경기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브라질 귀화선수를 적극 받아들였다. 순혈주의를 고집하던 독일 축구팀도 가나 출신의 게랄트 아사모아와 폴란드 출신인 미로슬라브 클로제, 루카스 포돌스키에게 자국 대표팀 유니폼을 입혔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성남의 간판 스트라이커 모따(브라질)의 귀화 추진 여부가 큰 주목을 받기도 했다.

베이징 올림픽에 '타국'의 기를 가슴에 달고 나선 그들
▲지난해 WNBA 올스타전에 출전한 베키 해먼. ⓒ로이터=뉴시스

베이징 올림픽에 참여하는 선수 중에도 귀화 선수가 많다. 베키 해먼(31)은 미국 사우스 다코타주에서 태어나 미국 여자프로농구(WNBA) 샌안토니오 실버스타스에서 뛴 미국인이다.

하지만 그는 이번 올림픽 미국 여자대표팀의 부름을 받지 못했다. 168cm 밖에 되지 않은 작은 키가 발목을 잡았다. '올림픽 무대에 서고 싶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그는 러시아로 국적을 바꿔 이번 올림픽에 참가했다.

다른 나라 대표로 출전하는 한국인도 많다. 특히 우리나라가 절대 강세를 보이는 양궁 부문에서는 낯익은 이름의 외국 선수를 볼 수 있다.

호주 대표로 남자 양궁 개인전에 출전한 김하늘(26)이 대표적이다. 지난 2005년 호주로 귀화한 김하늘은 이번 올림픽에 'Sky Kim'이란 이름을 달고 한국 선수들과 맞상대한다. 남자 양궁의 기대주 임동현(22)은 4강까지 오를 경우 김하늘과 대적할 가능성이 높다. 김하늘은 임동현과 세 번 싸워 두 번을 이긴 적 있다.

지난 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남자 양궁 단체전에서 세계신기록(2031점)을 기록하고도 은메달에 그친 김보람(35)도 호주 대표로 다시 올림픽 무대를 찾는다. 호주 대표팀은 감독마저 2000년 시드니올림픽 남자 단체전 금메달리스트인 오교문이다.

여자 양궁의 하야카와 나미(23)란 일본 대표 선수를 주목할 필요도 있다. 그는 지난 2006년 초까지만 해도 엄혜랑이란 한국 이름을 갖고 있었다. 하야카와 나미가 좋은 성적을 거두며 개인전 상위 라운드로 진출한다면 8강에서 한국의 간판스타 박성현과 맞붙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엄혜랑은 올림픽 출전을 위해서라기보단 개인적 사정 때문에 귀화한 경우다. 일본인과 재혼한 어머니의 권유에 한국에서의 힘든 삶을 버리고 일본으로 갔기 때문이다. 그는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활을 다시 잡은 이유에 대해서도 "할 줄 아는 게 활 쏘는 것 밖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유달리 양궁에서 해외 귀화 선수들이 많은 까닭은 한국 대표 선발전에서 올림픽 진출권을 따기가 워낙 어렵기 때문이다. '올림픽보다 더 어렵다'는 국내 양궁대표 선발전에서 아쉽게 쓴잔을 마시는 선수들 가운데에서 이런 일이 보다 많이 일어나는 것이다. 전국체전에서 10대 선수가 비공인 세계신기록을 세우고, 무명 선수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를 꺾는 일이 일어나는 곳이 한국의 양궁 무대다.

국제대회 성적 여부에 따라 삶의 질이 완전히 달라지는 현실을 감안하면 양궁 선수들이 "외국으로 귀화해 올림픽에 진출한다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가지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들과 반대로 외국에서 태어나 한국 국기를 가슴에 단 이도 있다. 중국 지린(吉林)성 창춘(長春) 출신 탕나(唐娜, 27)는 이번 올림픽에 '당예서'란 이름으로 태극기를 달고 여자 탁구 메달 획득에 도전한다. 당예서 역시 중국 국가대표팀에 소속되었음에도 두꺼운 중국의 선수층을 뚫지 못했으나 지난해 한국으로 귀화한 후 곧바로 올림픽 무대를 밟게 됐다.
▲신화통신은 지난해 8월 넷째 주 '이주의 스포츠 사진' 대상 선수로 김하늘을 꼽았다. ⓒ뉴시스

관심 가는 그들에 우리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하야카와 나미의 이력은 이미 우리 언론에도 여러 번 보도된 바 있다. 그가 뛰어난 기량을 가진 선수라서가 아니라 그가 선택한 국적이 '하필이면' 일본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 언론이 딴 제목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한 언론은 그를 소개하는 기사 제목으로 '조국을 겨눈 日궁수, 엄혜랑'을 선택했다.

일본으로 귀화한 한국인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기사에 실은 것으로 가장 유명한 사례는 물론 추성훈이다. 지난 2002 부산아시안게임 당시 추성훈을 소개하는 기사였다. 재일동포 4세 추성훈이 일본 국가대표로 나서 한국의 안동진을 꺾고 금메달을 따자 한 언론사가 '조국을 메쳤다'라고 제목을 뽑은 것.

지금은 각종 상품광고에 얼굴을 비치고 <MBC> 올림픽 유도 해설가로 합류할 정도로 한국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지만, 올해 초 <MBC> 오락 프로에 나와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을 때까지 추성훈은 한국인들에게 그리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부산 아시안게임만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조국을 메친' 선수로 기억됐다. 4대에 걸쳐 지켜 온 조국 한국의 대표선수로 뛰고 싶었던 그가 파벌주의라는 '조국의 차별'을 못견디고 귀화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도 꽤 됐지만.
▲지난 9일 올림픽 탁구 경기 참가를 위해 베이징 서우두(首都)공항에 입국한 당예서. 그가 금메달을 따내기 위해서는 중국 인민들의 비난을 이겨내야 한다. ⓒ뉴시스

한국을 선택한 당예서 역시 모국 국민들의 이같은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탁구가 곧 국기(國技)인 중국에서 열리는 올림픽에 '하필이면' 국민감정이 그리 좋지 않은 한국의 대표선수로 그가 참가한다는 소식에 중국 국민들은 불편한 감정을 여과 없이 쏟아내고 있다. 현정화 여자대표팀 코치가 걱정할 정도로 당예서 또한 그런 여론에 편치 않은 마음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한국 팬들이 그를 호의적으로 대하는 것도 아니다. "중국에서 뛸 실력이 없으니 한국으로 온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대표팀 승선 초기 심심치 않게 들렸었다.

스포츠에서의 순혈주의와 민족주의 정서가 매우 강한 한·중·일 삼국에 연관된 선수들이 '선수 이전에 국가대표'여야 한다는 내·외적 압박에 시달리고 있는 셈이다.

이는 "국가 연주가 나올 때 조금 불편할 뿐 생활에 아무 지장이 없다"고 말하는 농구선수 베키 해먼의 태도와 비교되는 부분이다.

미우라와 나카타

이들의 이야기를 더듬다 보면 떠오르는 인물이 하나 있다. 일본이 낳은 세계적인 축구 스타 나카타 히데토시. 1977년생으로 일본 신세대의 개인주의적 성향과 '쿨함'을 지닌 나카타는 격정적인 축구 경기장에서도 좀처럼 흥분하는 법이 없었다.

그런 나카타의 '쿨한' 이미지를 강화한 것은 그가 국가 이데올로기에 과거 선수들에 비해 자유로웠다는데 있었다.

나카타와 비교되는 일본의 축구 선수는 미우라 가즈요시다. 90년대 일본 축구를 대표하는 공격수인 미우라는 경기 전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가 연주될 때 때론 눈을 감고 근엄하게 따라 부르는 장면을 연출했다. 그런 미우라를 보고 누군가는 "2차대전 말 일본의 카미가제 특공대를 보는 듯 했다"라고 촌평했었다.

그런 미우라에게 국가가 연주될 때도 껌을 씹거나 몸을 풀거나 산만한 행동을 하는 나카타는 당황스런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일본 최고의 축구 선수라면 무릇 미우라같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수많은 일본인들도 나카타의 그런 자유분방한 모습을 보고 불편한 마음을 가졌었다.

그러나 미우라는 결국 "나카타가 일본 대표를 맡을 자격이 있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실력 면에서야 국가대표로 나설 정도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국가대표는 말 그대로 같은 국적을 가진 운동선수들 중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진 선수에게 부여되는 자리다. 특정 선수가 국가 이데올로기에 충실한지, 그의 애국심이 어느 정도인지, 혹은 그가 왜 국적을 옮겼는지 같은 질문들은 '국대'를 뽑는데 고려사항이 되어선 안 된다.

만약 당예서가 중국 선수를 누르고 금메달을 딴다면, 혹은 김하늘이 한국 선수를 꺾고 남자 양궁 세계재패에 성공한다면 우리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네덜란드 출신 러시아 국가대표팀 감독 거스 히딩크가 2008년 유럽축구선수권대회(유로 2008) 8강전 대(對)네덜란드전에 앞서 "조국의 역적이 되고 싶다"고 말했을 때 웃어 넘겼던 네덜란드 국민들의 여유를 우리도 이제 가질 때가 되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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