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oment of Truth", 말 그대로 "진실의 순간"이다. 스페인어로 "Moment De La Verdad". 성난 황소와 유희를 즐기던 투우사가 긴 칼을 들어 황소의 정수리를 찌르는 마지막의 순간에 외치는 소리이다. 이를 어떤 스페인 학자는 특정 사건의 진행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적인 순간'으로 의미를 부여하였다. 황소가 쓰러지든 투우사가 짓밟히든 이 진실의 순간을 양자는 피해갈 수가 없다. 그렇다면, 2008년 대한민국의 여름. 우리가 탈출할 수 없는 '진실의 순간'은 무엇일까?
며칠 전 경찰 특수기동대의 소름끼치는 시위진압 훈련과 국군의 가공할만한 독도방어훈련이 언론을 통해 보여졌다. 국가의 억압적 기재들의 때 아닌 언론전시는 우리에게 탱크와 장갑차의 굉음이 만들어낸 1961년 5월과 1979년 12월의 전율과 공포를 떠오르게 했다. 이를 시작으로 계엄 이상의 공포정치를 펼치고 있는 2008년 이명박 정부는 투우사가 달려드는 황소를 향해 칼을 휘두르듯, 여기저기서 난도질을 하고 있다.
체포수당으로 혈안이 된 경찰 특수기동대들이 촛불거리를 질주하기 시작했고, 최근 국무총리는 헌법에 명시된 국회의 출석요구를 관례를 이유로 무시해버렸다. YTN 사장 선임이 깡패를 동원하여 진행되는 동안 감사원은 KBS 특별감사 결과보고에서 KBS이사장에게 정연주 사장에 대한 해임을 요구했고, 이사회는 재청해버렸다. 이명박-부시 간의 한미정상회담은 한편으로는 미국산 스테이크를 한우갈비와 동격으로 만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보수우익세력들에게 서울 시청 광장을 내어주는 소기의 성과를 내며 짧게 끝났다. 그러는 동안 정부는 해방보다 분단을 더 강조하는 '건국절' 제정을 추진하면서 과거사 청산의 기회를 '청산'하려 하고 있으며, 한국은행은 물가안정을 이유로 기준금리를 0.25%p 인상하여 서민들의 대출이자에 대한 부담을 더욱 크게 하였다. 찌는 무더위만큼 일사불란하고 빠르게 진행되는 이명박 정부의 사회장악 프로그램은 우리의 호흡을 점점 더 힘들게 만들었다.
그러나, 촛불의 거리에도, 국회 국정조사장에도, KBS와 청와대에도 진실의 순간은 없었다.거리의 촛불이 꺼진다해서 민주주의가 말살되는 것도 아니고, 총리의 국회폄하가 야당을 더 급진적으로 만들 것 같지도 않다. YTN과 KBS 사장이 누가 된다하더라도 기자들이 자신의 양심을 배반하지 않는 한 새로운 출발이 가능하다.
"기륭"의 호흡
대한민국 진실의 순간은 기륭전자 해고 여성노동자들의 농성장에서 소리없이, 그러나 아주 잔인하고 고통스럽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들이 왜 1000일 넘는 농성투쟁을 이어가고 있고, 촛불의 그림자 속에서 결국 30kg의 몸무게로 폭염 속에서 관까지 짜가며 두 달 가까이 단식투쟁을 해야 하는지 새삼 설명할 필요는 없다. 아주 오래 전부터 그들은 싸워왔고, 그 때부터 '우리'는 그들의 투쟁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짧아져가는 그들의 호흡이 우리의 동맥과 연결되어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지난 3개월 간 '우리'는 촛불의 거리에서 '민주공화국'을 외쳤고, 그 속사정이야 어떻든 간에 급기야 미국 대통령의 마음을 움직여 독도 사태를 진정시키기까지 했다. 그러나 위생과 검역주권, 국민주권, 영토주권을 위해 거리로 나가 폭염과 폭정에 맞서 싸운 '우리'는 '비정규직'문제를 '운동권' 중심의 의제이고 따라서 촛불집회에서 크게 다뤄지면 집회가 변질되고 대중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는 출처없는 우려 때문에 외면해버리고 말았다. 그러는 동안, 기륭전자와 함께 KTX, 뉴코아-이랜드, 코스콤, 재능교육 등 800만 비정규직들은 관중 없는 경기장에서 국가의 칼을 피해가며 지쳐가고 있었다.
이들의 정수리에 언제 국가의 칼이 꽂혀 쓰러질지 많은 이들이 두려워하고 있다. 그러나 더 두려운 것은 그 쓰러짐이 그저 신문의 한 단면을 장식하는 일상의 일로 여기는 우리의 "익숙함"이다. 그리고 하나 더, 그러다 소리없이 우리의 숨도 끊기고 그래서 그저 순응하는 비정규직 주체로 하루하루를 사측과 정부에 감사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부끄러운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다.
실패한 파시스트의 소망
통치자가 가장 바라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국가폭력의 미학이다. 법질서의 원활한 유지를 위해서는 처벌의 엄격함이 필요하고, 그 처벌의 엄격함은 경찰, 감옥과 같은 폭력적 기재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물론 육해공군의 위용이 그 배후를 장식한다. 통치자는 그 국가폭력이 사회적 거부감을 만드는 것을 원치않는다. 경찰은 민중의 지팡이어야하고, 특수기동대의 로보캅 복장과 공군 F-15K의 세련미는 정의를 지키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상징이어야 한다. 법질서가 폭력적 기재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통령의 철학과 국민들의 순종으로 유지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통치자의 또 하나의 소망은 국민을 하나로 묶는 것이다. 그래서 가장 쉬운 방법이 '민족주의'이고, '통일'이고, '잘살아보세'이다. 대한민국의 좌우가 독도문제처럼 하나가 된 적이 드물고, '반통일' 세력만큼 배신자가 없고, 잘 살자는데 재뿌리는 듯하면 그 결과는 뻔하다. 과거 유신과 5공의 독재자들은 그래서 교복을 입혔고, 반공글짓기와 포스터 그리기를 번갈아 시켰고, 국기에 대한 경례와 국민교육헌장을 외우게 했고, 농촌에 시멘트 푸대를 배급하였고, 식모와 버스안내양을 도시의 '공순이'로 불러들였다. 질서유지에서 벗어나는 자들을 처벌하기 쉬웠던 만큼 질서유지가 쉽고 편했다.
현직 대통령은 폭력과 전체주의를 아름답게 조화시킨 과거의 파시스트 통치자들을 부러워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국가의 폭력적 기재들을 재정비하면서 그 위용으로 슬그머니 대중들을 위협하고 있다. 그렇게 촛불을 끄려하고 있고, 그렇게 제도정치를 변질시키고 있고, 그러면서 우익보수세력들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국민통합을 꿈꾸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직 대통령은 가난과 실업을 외부의 적에게 돌려버린 영악한 파시스트가 절대로 될 수 없다. 그저 반민주적 독재자라는 3류 정치인에 머무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그는 권력재창출에 끊임없이 불안해 해야만 한다(파시스트가 차라리 낫다는 것이 절대 아니다). 그 이유는 바로 비정규직 문제에서 비롯된다.
20-30여 년 전 노동현장에서의 차별과 폭력의 수준이야 야만에 가까웠지만, 높은 경제성장률은 높은 고용률과 함께 했고, 상대적으로 낮은 실업률의 유지는 적어도 국민들이 자신의 일터에서 열심히 일하면 '나도 함께' 잘 살 수 있다는 꿈을 꿀 수 있도록 했다. 그래서 일할 수 있었고, 그래서 싸울 수 있었다. 그런 만큼 국가는 이를 미끼로 국가폭력을 사회적으로 미화시킬 수 있었고, 국민들은 어찌되었든 '조국 근대화'와 '선진조국 창조'에 하나되어 매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재의 비정규직 문제는 현직 대통령이 폭력을 미화하고 국민을 하나로 묶어 강력한 파시스트 국가로 나아갈 수 없도록 하는 최대 장애물이다. 신자유주의적 노동유연화 정책이 유지되는 한 비정규직 문제는 악화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비정규직 문제로 인한 고용불안과 사회양극화의 심화는 과거와 같은 양적지표에 따른 경제발전 환상을 유지시킬 수 없도록 한다. 이들의 존재가 드러날수록 환상은 여지없이 깨져 버리고, 따라서 노동자들의 저항에 대한 국가의 폭력은 더 이상 아름다울 수 없다. 현직 대통령과 조중동이 방치와 침묵으로 기륭을, 이랜드를, KTX를 고사시키려하는 이유가 바로 파시스트가 되지 못하는 자신들의 3류 정치 한계에 있는 것이다.
"기륭"의 방치와 사회적 죽음
현직 대통령과 조중동이 방치와 침묵을 비정규직에 대한 전술로 취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이 비정규직과 정규직 사이의 갈등과 균열을 부채질 할 수 있는, 즉 "손 안 대고 코 푸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문제가 내 가족과 이웃이 함께 신자유주의 국가와 자본의 반민주적 차별에 맞설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의제임에도 불구하고, 대기업 정규직 중심의 거대 노총과 비정규직 노동자들 사이를 흐르고 있는 거대한 철학과 인식의 강물은 오히려 노동운동의 후퇴와 신자유주의의 반동적 강화를 가져왔다.
결국 기륭전자 여성노동자들의 정수리에 해고의 칼날이 소리 없이, 그리고 잔인하게 꽂히는 동안, 그리고 KTX, 코스콤, 이랜드의 투쟁이 고사되는 동안, 그래서, 그 투쟁의 끝과 함께 우리의 호흡도 멈추게되는 동안 정부는 가장 강력한 저항에 부딪힐 줄 알았던 신자유주의 정책을 손쉽게 진행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게다가 올림픽이 시작되었고, 잊을만하면 독도문제, 파병문제 등이 터져주면서 기륭전자 여성노동자들과 우리의 정수리에 칼날이 꽂히는 소리는 더욱 더 들리지 않고 있다.
현직 대통령 이명박의 파시스트 소망은 실패할지 모른다. 그러나, 기륭이 모두에게서 방치되는 한, 그리고 800만 비정규직들의 호흡이 우리의 동맥과 이어져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한, 광우병 보다 훨씬 더 무서운 사회적 죽음이 우리의 정수리로부터 더 빠르게 진행될 것이다. 만일 이 사실이 두렵다면 '우리'는 반성과 함께 보다 새로운 투쟁, 보다 강력한 연대를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 이 칼럼은 대안지식연구회가 내는 정치사회비평입니다. 지난 정치사회비평 글들은 지행네트워크(http://jihaeng.net)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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