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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은 그렇게 쉽게 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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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은 그렇게 쉽게 꺼지지 않는다"

[김상수 칼럼] 국가폭력과 민주주의

이명박 정부가 검찰, 경찰을 동원하는 행태가 거의 자기 파멸적인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정상적인 정치권력을 행사하는 '정권'이라고 도저히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이런 식이면 머지않아 권력 자체가 스스로 무기력에 빠지고 만다. 이는 물리 법칙과도 같은 아주 자명한 원리다.
  
  지난 시대 쿠데타로 정권을 잡아 나라를 지옥으로 끌고 간 전두환이 가장 많이 입 밖으로 낸 단어가 다름 아닌 '법'과 '원칙'이었다. 심지어 그는 자기 출신, 자기 행세, 자기 주제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순된 표어를 내걸기까지 했으니, 그게 바로 '정의사회 구현'이었다. '정의'와 '원칙'을 깡그리 파탄시킨 전두환의 이 구호가 얼마나 국민에게 모멸을 주었던가.
  
  정당하지 못한 권력의 사법 집행은 폭력에 다름 아니며 반드시 권력을 오작동 시킨다. 권력 스스로 자기 명(命)을 재촉할 뿐임을 박정희 피살과 전두환 몰락에서 우리 모두 목격하지 않았던가. 폭력은 반드시 폭력으로 망한다. 이 사실 또한 폭력적 권력의 관성이고 정확한 말로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이런 자명한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
  
  폭력으로 군사정권을 호위하던 '백골단'이 다시 부활했고, 방송을 정권 선전용으로 되돌리려는 끈질긴 시도도 집요하다. 여기에 더해 '빨갱이 표' 금서(禁書) 목록이 새로 등장했다. 방송통신심의위원장 박명진은 "표현의 자유는 '용인'하지만 타인 명예를 훼손하는 경우에 제재를 한 것"이라고 말했단다.
  
  도대체 무슨 얘긴가?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명시한 헌법을 무너뜨리면서 지켜야할 명예란 누구의, 무엇을 위한 명예인가. 어떻게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표현의 자유를 '용인'한다는 말을 입에 담을 수 있단 말인가. 언제부터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초헌법적 국가 권력 기구가 됐는가.
  
  지난 20년, 수많은 사람이 피와 눈물로 일으켜 세운 연약하기 그지없는 이 땅의 민주주의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고통을 거의 경험한 적이 없는 사람들이 갑자기 나타나 불과 6개월 만에 민주주의를 파괴하려고 일제히 책동하고 있다.
  
  '촛불'에 '사과'와 '송구'를 두 번에 걸쳐 말하던 이는 언제 그런 말을 하고, 고개를 숙였나 싶을 정도로 태도를 표변하고 있다. 잦은 말 바꾸기와 계속되는 실정(失政)으로 국가 자존까지 위협당하는 현실을 자초하면서, 그는 '촛불' 민심을 수용한다던 말과는 달리, 검찰을 동원해 '촛불' 집회 참여 시민 약 1000명을 기소하고 수백만 원의 벌금을 물릴 예정이다.
  
  자, 그럼, 과연 이명박의 뜻대로 '촛불'은 꺼져줄까? 시민을 연행하고 수색하고 체포하고 징역살이를 시키면 '촛불'이 꺼질까? '촛불' 시민을 폭력 시민으로 매도하면, 우리 사회 제반 문제를 오직 경제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성장 개발 지상주의가 득세할 수 있을까? 사람의 어려운 현실을 역이용해 금력, 권력을 탐하는 무리의, 그들만의 '테마파크'를 만들 수 있을까?
  
  경제 성장만이 풍요를 약속할 것이라는 미신(迷信)에 깜빡 속고 있는, 우리 사회 전반의 차고 넘치는 왜곡된 욕망을 부추겨, 우리들 본래의 인본적인 가치를 무참하게 만들고, 기본적인 도덕성과 윤리의식, 생명과 자연에 대한 공경과 배려, 더불어 같이 사는 사람들에 대한 존중 같은 것들은 찾아보기 어려운 경쟁 사회를 통해 도대체 이들은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빼앗긴 10년을 되찾자'는 거대 여당 한나라당과 이명박 집단은 그들의 제일의 공약인 한반도 대운하 건설을 여러 '꼼수'로 끝내는 실행시켜 식수인 자연 하천을 콘크리트 덩어리로 절단 내고 전면적인 국토 유린으로 어떤 이익을 보겠다는 것인가?
  
  민주주의를 조롱하면서 지난 수십 년간 이 나라를 끊임없는 미친 개발 바람으로 몰고 간 연장에서 이제 나라를 완파(完破)시키겠다는 파괴적인 토건주의와 개발 이데올로기의 신봉자가 앞장서서 얻고자 하는 이득은 정작 무엇인가?
  
  힘없고 가난한 자와 소수자를 바라보는 이명박 집단의 시선과 언변이란 무차별 경쟁을 앞세워 노골적인 경멸의 대상이거나 거추장스러움으로 말하면서 자연과 생명에 대한 외경(畏敬)을 저버린 혹독한 결과에 따르는 그 비참을 이네들은 과연 감당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지금 이 땅과 이 땅에 사는 눈 밝은 사람들은 크게 신음(呻吟)하고 있다. 경제 위기의 문제만큼이나 삶의 위기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권력이란 아무리 튼튼한 제국의 권력이라고 해도 법의 강제만으로 총과 칼만으로는 지켜지지 않는다. 모욕당하고 있는 시민들의 절망과 분노를 헤아리지 못하는 권력이란 아주 편협한 권력이다. 이런 권력은 그 내부에서 끊임없이 분열이 나타나고 권력모반이 자라날 수밖엔 없다. 재차 말하지만 자정(自淨) 능력이 없는 권력이란, 권력 속에 이미 파멸의 근거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이런 식의 권력이란 그 자체가 자기모순이며 일방의 힘만 믿는 지배자가 선두에 설 때는 곧 자기파멸을 가속시킬 뿐이다.
  
  다시 묻는다. 벌거벗은 권력만으로 '촛불'을 끌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불가능하고 어리석다.
  
  '촛불'은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뽑은 국민들의 자책과 반성이며 이명박에 기댄 경제적 희망이 얼마나 신기루에 가득 찬 것이었는가를 서서히 자각하기 시작했다. 잠시 접었던 도덕적 분별력을 빠르게 회복하기 시작했다. 자유롭고 존엄하게 인간으로 삶을 산다는 게 무엇인가를 차제에 확실하게 확인하자는 국민 운동으로 '촛불'은 점점 넓이와 깊이를 더할 것이다.
  
  이 비폭력 저항의 '촛불'은 인간의 근거에 반하는 모든 잘못된 억압으로부터 불복종 정신으로 이어져 퍼져나갈 것이다. 여기서 '촛불' 정신의 내용은 시민인 우리가 일방의 힘으로 통제당하거나 이용만 당하는 잡민(雜民)이 절대 아니며, 함부로 취급당할 수 없는 '생명'이고 '인간'이란 사실을 스스로 환기하면서, 각기 자기의 입장만을 내세우는 게 아니고, 자신과 관계하는 사회, 자신과 관계하는 국가, 자신과 관계하는 세계, 자신의 다음 세대까지 관계하는 미래를 스스로 질문하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촛불'은 역사적인 한국인은 이제 단순히 살아남는 것으로만, 생을 유지하는 것으로만, 떼 지어 삶을 억지로 끌고 가는 것으로만 삶을 방치할 수는 없다는 자각이다. 더 나은 이상의 삶으로, 더 나은 인간의 사회로, 생명 가치가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숙제를 다짐하는, 진정한 인간의 발전을 위한 사회적 계획을 세우기 위한 단서로 '촛불'이다.
  
  그래서 '촛불'의 전략은 직접적인 폭력에 격렬하게 반응하거나 맞대응 하는 것에 있지 않다. 이 '촛불'은 삶의 지혜로 전략적이고 '살림의 전략'이기 때문에 때때로는 느리고 굼뜨며 반응이 즉각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전략은 인간과 민주주의 그리고 한국인의 역사에 반하는 권력집단에 대해서는 그 작동 장치들을 부분으로 나누어 잘게 하나하나씩 무력화시켜 고립시키며 패퇴시키고 말 것이라는 데 그 동력과 동인이 있다.
  
  그래서 '촛불'의 본질은 국가의 폭력에 반대하는 민주주의 현실체의 근거다.
  
  (☞바로 가기 : 필자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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