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같은 날 국무회의는 가입자대표들의 국민연금 기금운용 의사결정권을 박탈하는 국민연금법 개정안을 의결했다. 이명박 정부가, 쇠고기에서 그랬듯이, 국민연금기금을 가지고 위험한 게임을 시작했다. 과연 1800만 국민연금 주인들은 이 게임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이사장의 월권… 아직도 민간금융회사 CEO인가?
우선 박 이사장의 선언이 국민연금기금 의사결정구조를 뛰어넘는 월권적 행위라는 점을 지적해야겠다. 민간투자회사라면 CEO가 투자전략을 결정할 때 일정한 역할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공적 연기금은 다르다.
현행 법체계에서 국민연금 기금운용의 자산배분 권한은 가입자대표, 정부, 전문가가 참여하는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에서 이루어진다. 전체 20명 위원 중 12명이 가입자위원으로 민주적 대표성이 존중되고 있다. 외국에서도 공적 연기금 지배구조는 가입자, 정부, 공익대표가 참여하는 삼자모형이 일반적이다. 여기서 목표수익률, 이를 달성하기 위한 전략적 자산배분 등이 결정된다. 국민연금관리공단은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가 정한 자산배분안 틀에 따라 기금 운용을 집행하는 기구일 뿐이다.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는 한해 기금운용계획뿐만 아니라 5년 주기의 중기 자산배분안도 내부적으로 논의한다. 다만 시장에 주는 영향을 감안하여 외부적으로 특정 수치를 제시하지는 않는다. 지금까지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의 공식 입장은 2013년 말에 주식 비중이 30% 이상은 돼야 한다는 지난 6월 발표이다. 그런데 어떻게 집행기구 책임자가 2012년에 주식 비중을 40%로 확대하겠다며 목표수치를 선언할 수 있는가?
지금까지 경제부처 관료들이 국민연금기금을 주식부양에 사용하고 싶은 속내를 언론에 밝힌 적이 종종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비판을 받으면 일반적인 필요성을 언급하는 수준이라며 해명하고, 자산배분 결정권은 오직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에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발을 뺐다. 관료다운 수순이다.
그런데 경제부처 관료도 아닌 복지공단의 수장이, 법률상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가 결정한 기금운용계획안을 실무적으로 수행하는 집행기구의 대표가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의 권한을 헌신짝처럼 취급하는 하극상을 범했다. 아직도 자신이 민간금융회사의 CEO라고 생각하는가?
목표수익률까지 맘대로 정하겠다고?
그는 의기양양하게 한 발 더 나갔다. 현재 6%대인 기금수익률을 2%포인트 상향시켜 8%대로 올리겠다고. 그런데 수익률이 높으면 좋을 것 같지만 그만큼 위험률이 동반 상승한다. 그래서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는 중기 자산배분안을 논의할 때 목표수익률이 너무 높으면 공적 연기금이 감내할 수 있는 위험한도를 넘는다고 판단하여 그 수위를 7%대로 정해왔다. 그런데 그가 위원회의 결정 내용과 다르게 8%대 수익률을 선언했다.
목표수익률이 중요한 이유는 국민연금기금의 자산배분 포트폴리오가 목표수익률 크기에 따라 거의 정해지기 때문이다. 자산군(국내주식, 국내채권, 해외주식, 해외채권, 대체투자 등)별 시장 기대수익률이 상정되므로, 목표수익률을 설정하면 그것을 이루기 위한 자산군별 투자비중이 도출된다. 그래서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 의사결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목표수익률과 그에 따른 전략적 자산배분이다. 그런데 이사장은 이제 목표수익률까지 자신이 설정하였다. 월권 주행에 브레이크가 없다.
입맛에 맞는 해외사례만 고르고
그의 위험한 주행은 국민연금기금에 대한 편향적 가치판단에 따른 것이다. 그는 지난 3년간(2005∼2007년) 국민연금기금의 연평균 수익률이 6.1%로 해외 공적 연기금보다 부진하다고 비판하며, 미국 캘리포니아주 공무원연금(캘퍼스)의 최근 3년간 연평균 수익률이 12.3%, 네덜란드 공무원 직역연금(APG)이 8.6%라고 강조한다. 캘퍼스는 주식에 56%, APG는 38%를 투자하기 때문이란다(국민연금기금의 주식 비중은 올해 24%로 전체 250조 원 중 60조 원이다).
하지만 그는 국민연금기금과 캘퍼스, APG의 차이를 간과한다. 국민연금기금은 공적연기금에서 1층을 차지하는 보편적 국민연금이고, 캘퍼스와 APG는 소득비례방식의 직업별연금이다. 이 연금들은 상대적으로 기금운용에서 국민연금기금에 비해 유연성을 가질 수 있다. (보통 연금체계에서 국민연금 1층, 직업연금 2층, 개인연금 3층이라고 칭함).
더 중요한 문제는 이사장이 자신의 입맛에 맞는 해외 사례만 고른다는 점이다. 우리나라 국민연금기금과 더 유사한 연기금은 미국의 국민연금(OASDI)와 일본의 공적연금(GPIF)이다. 이들은 연기금 규모로 세계 1, 2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미국 2300조 원, 일본 1100조 원), 미국 OASDI는 모두 국채에, 일본 GPIF는 채권에 70% 이상 투자한다. 안정적 자산운용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각국의 공적연기금은 연기금의 성격, 자사운용시장의 특성을 등을 감안하여 기금운용전략을 수립한다. 그래서 보편적 1층 연금 성격을 지니는 미국와 일본의 연기금은 안정적 자산에 집중하고, 직업연금이면서 자산운용시장에 익숙한 미국 캘퍼스와 네덜란드 연기금은 주식에 주목한다. 반면에 국민연금기금은 보편적 1층 연금이다. 연금제도에 대한 가입자 불신도 크다. 국내 자산시장과 자산운영능력도 취약하다. 그렇다면 결론은? 당연히 안정성이어야 한다.
주식투자로 상반기 4조 원 이상 까먹을 예정이면서…
수익률 비교도 정직하지 못하다. 연기금 수익률은 비교기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기 마련이다. 기간마다 전체 수익률에 영향을 미치는 고위험 고수익 자산(주식, 대체투자)과 적정위험 적정수익 자산(채권)의 비중이 연기금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앞에서 이사장이 말했듯이, 최근 3년만 비교하면 국민연금기금의 수익률이 캘퍼스와 APG에 비해 낮다. 하지만 최근 8년(2000-2007)으로 기간을 늘리면 국민연금기금의 수익률은 6.83%, 캘퍼스 6.52%, APG 5.25%이다. 주식거품이 꺼지던 2000년대 초반 주식투자 비중이 컸던 캘퍼스와 APG가 마이너스 수익률을 기록한 반면 채권 중심으로 운용되었던 국민연금기금은 10%가까운 안정적 수익률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수익률 비교는 비교기간을 어떻게 통제하느냐에 따라 조작이 가능하다. 올해만 보면, 국민연금기금은 주식부문에서 상반기에 마이너스 10% 이상 수익률을 기록하며 4조 원 이상을 까먹을 예정이다. 다행히 채권에서 5조 원 가까이 수익을 올려 전체 수익률이 2~3%대로 플러스를 유지하게 되었다.
국민연금기금 운용에서 목표수익률 설정보다 더 중요한 것이 전략적 원칙이다. 어차피 고수익을 목표로 하면 크게 손실을 입을 각오를 해야 하고, 적정수익을 목표로 삼으면 위험도는 그만큼 줄어든다. 이는 선택의 문제다. 개인이 여유자금을 가지고 투자를 한다면 고위험고수익 종목을 택할 수 있다. 하지만 1800만 가입자의 노후예탁금인 국민연금기금은 자산시장에서 위험한 게임을 벌일 돈이 아니다.
공적 연기금 비교 기준은 '위험대비 성과지수'여야
그래도 연기금 운용 성과를 객관적으로 비교하고자 한다면 활용할 수 있는 것이 수익률과 위험률을 조합해서 평가하는 '위험대비 성과지수'(수익률/표준편차)이다. 이 지수는 수익률이 좋더라도 수익률 변동 폭인 표준편차가 크면 손실 위험성이 커지므로 양자를 함께 평가하기 위한 기준이다.
수익률이 엇비슷하였던 지난 8년간 위험대비 성과지수를 비교해 보자. 국민연금기금은 4.78로 매우 양호하다(수익률 6.83% / 표준편차 1.43% = 4.78). 반면에 캘퍼스는 0.57 (6.52%/11.5%), APG는 0.76 (5.25%/6.88%)로 모두 1 이하이다. 그리 높지 않은 수익률을 거두면서도 수익률이 변동성이 매우 커 불안정한 연기금이 바로 캘퍼스, APG다. 반면에 국민연금기금은 수익률에서도 뒤지지 않지만, 표준편차를 고려한 위험대비 성과지수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우수하다. 도대체 언제까지 캘퍼스, APG 노래만 부를 것인가?
가입자를 영원히 내쫓는 정부 국민연금법 개정안
이사장이 월권을 행사하던 날, 국무회의는 국민연금법 개정안을 의결했다. 핵심내용은 현재 가입자위원들이 과반수를 점하고 있는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 구성을 10년 이상 금융투자부문에 종사한 전문가 7인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주식투자 확대에 자꾸만 브레이크를 거는 가입자대표들을 기금운용 지배구조에 몰아내고 민간투자 전문가로 그 자리를 채우겠다는 것이다.
어찌 이명박 정부의 국정이 이렇게 한결 같은가? 국무회의는 앞으로 가입자를 의사결정구조에서 내쫓는 국민연금법 개정안을 의결했고, 대통령의 특명을 받아 연금공단에 착륙한 이사장은 현행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를 공공연히 무시하는 월권적 선언을 했다. 아, 가엾은 국민연금기금이여, 갈 곳 없는 연금주권이여, 벙어리 냉가슴 가입자들이여!
가입자들이 연금주권운동 벌여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연금의 주인인 국민들이 국민연금기금 운용에 관심을 가지야 한다. 가입자를 대표하는 국민연금기금위원회는 이사장의 월권을 용납하지 말아야 한다. 국민의 대의기구라면 국회는 정부 기금운용체계 개정을 담은 국민연금법 개정안을 거부해야 한다.
이제 시민들도 전국 곳곳 촛불광장에서 연금주권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국민연금기금의 진짜 주인이 되겠다고. 현행처럼 기금운용 의사결정구조에서 가입자 과반수 원칙을 유지해야 하고, 보다 안정적이고 공공적인 방향으로 국민연금기금 운용전략을 마련하겠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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