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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호르몬보다 더 해로운 지식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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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호르몬보다 더 해로운 지식사회"

[김상수 칼럼] '플라스틱 지식사회'에 보내는 경고장

지금 한국 사회는 한 치 앞을 가늠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이명박 집단'은 총체적으로 난맥상이다. 이명박 '정권'이 아니고 이명박 '집단'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들한테서는 정치 권력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규범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미 '많이 가진' 이들은 그저 금권(金權)의 이해관계로 이렇게 저렇게 얽힌 잡종(雜種)들의 '굶주린 집단'일 뿐이다. 이들의 정체성은 자유주의도 아니고 신자유주의도 아니다. 이들은 탐욕적인 금권추구에서 그들 이해가 일정 부분 맞아떨어져 얽히고설키어 임시로 붙은 집단일 뿐이다.

그럼 이 집단은 과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이것을 알려면 이 집단을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 중에서 나름의 이데올로기를 제공하고 있는 '지식계'에 주목해야 한다. 이명박 집단의 지식계는 '지성(知性)'과 아예 담 쌓았다. 지성이 없는 지식사회를 나는 '플라스틱 지식사회'라고 부른다.

'플라스틱 지식사회'의 가장 큰 특징은 새로운 사회에 대한 비전도, 설계도 제시하지 못하고 지식에 빌붙어 자기가 터하고 있는 사회와 공동체를 자꾸 파먹는다. 이는 우리 사회에 참지식인이 거의 없다는 불행을 의미하는데, 이명박 집단의 등장에서 절정을 이뤘다.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 캠프에만 약 1000명의 교수가 자발적으로 모여들었다는 사실이 그렇다.

좀 더 시야를 넓혀보자면, 현재 한국 사회를 이끄는 지식 사회 전반이 병들고 썩었다. 지식 사회가 일으키는 '공해'는 이제 위험 수위를 넘었다. 이들은 흔히 환경 호르몬이라 불리는 '내분비 교란 물질'과 비교할 수 있다. 지식 사회는 내분비 장애와 교란으로 비틀거리고 쪼그라들어 지리멸렬 무너졌다. 지식의 정의(定義)는 없고, 지식의 오염만 있다.

이 오염은 공동체의 삶에 도움이 안 되는 '플라스틱 지식'이다. 이것에 근거한 '플라스틱 지식사회'는 우리 사회를 근간(根幹)부터 멍들게 한다. 플라스틱은 잘 썩지도 않을뿐더러 녹아 서 각종 유해물질을 배출하고, 태울 때 인류가 만든 최악의 독극물로 알려진 다이옥신 등을 내뿜는다.

청산가리보다 1000배나 강한 독성을 지녔다는 다이옥신의 폐해만큼 '플라스틱 지식'과 '플라스틱 지식인'이 끼치는 우리 사회 작금의 폐해는 너무 치명적이다. 지식인 관료, 지식인 정치꾼, 지식인 판·검사, 지식인 교수 등 지식인을 자처하는 이 땅의 수많은 '배운 사람'이 자기의 지식과 직무와 직위를 권력화·사유화하는 경향에는 별반 차이가 없다.

이런 저런 학벌과 인맥을 먼저 따지는 것도 '플라스틱 지식사회'의 특징이다. 이런 실상은 아직 우리 사회가 근대화도 안 된 사회임을 드러내는 것으로, 어쭙잖게 모더니즘이니 포스트모더니즘이니 자유주의니 하면서 비현실적 담론을 한때 유행시켰던 것은 참으로 우스꽝스럽다.
농촌진흥청은 지난 4월 27일 직원 136명이 참석한 가운데 윤창현 서울시립대 교수를 불러 이명박 정부의 국정 철학을 듣는 특강을 열었다. ⓒ농촌진흥청

1990년대까지는 관변학자라는 말이 유행했는데, 요즘에는 기업이나 재벌의 논리만 강변하는 재변학자(財邊學者)들도 기승이다. 이런 플라스틱 지식인은 곡학아세(曲學阿世),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행태를 보이며, 권력에 기생해 자신만의 얕은 이익을 꾀한다. 올바른 신념과 행동은 기대할 수 없다. 오직 이 정보 저 정보를 섞어서 어떻게 권력에 결탁할지 궁리할 뿐이다.

지식을 통한 권력 집단에서의 근친성 문제는 아주 심각하다. 이에 반해 비판적 지식은 아주 가냘프고 가난하다. 가치나 이념보다 개인적 연(緣)을 더 중하게 여기는 한국 사회에서 지배집단의 이런 근친 문제는 우리가 지키고 가꾸어야 할 민주주의까지 근본으로부터 훼손하고 있다.

대학도 기업처럼 완전 경쟁 체제가 돼야만 한다는 돈벌이 제일주의의 악담은 이제 버젓한 현실이 됐다. 지식은 가치 이해를 떠나 철저하게 욕망의 도구로 전락했다. 대학 교수들이 지식으로 정치권을 기웃거리는 것이 한국에서는 당연한 현실임을 지난 대선 때 봤고, 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온갖 권모술수는 정치권에서 벌어지는 권모술수와는 게임도 안 된단다. 대학은 더 이상 지성의 전당이라는 낭만적 표제가 유치하게 들릴 정도로, 그저 사회악을 확대 재생산하는 특정 그룹의 비싼 도구에 불과하다.

교수의 정치 참여는 아예 선거운동 단계부터 시작돼 한 자리 차지하는 것으로 이어지는데, 이제 이런 현상은 거의 관행처럼 굳어졌다. 많은 지식인이 자발적으로 지배집단의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데 앞장서고 약자 편에 서는 지식인은 현실에서는 아주 소수에 불과하다. 차라리 불학무식(不學無識)한 사람들보다 '플라스틱 지식인'이 우리 사회 공동체에 더 해악적이다. 많은 지식인이 권력과 금력을 추종하면서 일부 소수 지배 집단에 확고하게 편입되기를 안달한다.

오직 지식으로만 판·검·변호사가 된 플라스틱 법조인들의 노골적 부패는 공공연한 사실이다. 금력에 오금을 못 펴는 일부 판·검사들의 도덕적 타락은 사회의 기본 존립을 어둡게 한다. 전관예우,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말이다. 판사로 근무하던 법원 코앞에 변호사 사무실을 낸다, 사건 수임으로 한철 대목을 보겠다는 질긴 관습이다.

민주사회를 유지할 수 있는 존립의 토대가 법이고, 법은 한 사회 구성의 최소한의 조건인데 아직도 많은 사람은 법은 시민을 탄압하는 도구라는 생각을 하는 현실이다. 사법제도를 운용하고 관계하는 판·검사들의 플라스틱 법의식을 걷어내고 어떻게 정의감을 확고하게 제도화할 수 있을 것인가? 참으로 요원한 문제다. 고시촌 등에서 비정상적인 일상으로 암기식의 법전 외우기에 전력해 사법시험에 합격하면 충원되는 현재의 판·검사 임용 방식은 철저하게 파기해야 옳다.

우리 삶의 일상이 겪는 고통이나 삶의 실상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법을 운용하고 집행하는 현실은 다이옥신을 배출하는 플라스틱만큼이나 위험한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사법의 민주적 정당성은 깨지기 쉽고 불에 잘 쪼그라드는 플라스틱만큼 취약한 현실 아닌가.

그럼 '플라스틱 지식 언론'은? 이 또한 장사나 이데올로기적 허세에 치중하면서 오직 돈 벌 궁리와 이편저편 편 가르기에만 골몰하는 '플라스틱 언론'일 뿐이다. 우리 사회의 시시비비를 입체적으로 가리고 따져, 논의해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을 구분하는 안목은 너무나 부족하다. 심지어 언론이 정치 권력에 야합해 정권 창출을 획책하는 데 앞장서기까지 하는 무차별적 탐욕의 기회주의적이며 공작적인 행태는 우리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안기고 있다. 언론이 결코 약자 편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언론이 권력이고 강자이기 때문인가?

결국 지식만으로는 우리가 우리 삶을 어떤 식으로 어떻게 사는 것이 과연 참다운 삶인가를 대답할 수 없다. 지식을 빌려 생명을 교란하고, 지식에 기대어 사회적 공동체 삶에 장애를 일삼는다면 그것은 참다운 지식이라고 할 수 없다. 오랫동안 우리 사회 지식은 지식의 위치를 바르게 설정하지 못했고, 지식의 역할을 바르게 위치시키지도 못했다.

문제는 한국 사회의 지식과 지식인이 지금처럼 지식을 빌려 자기가 살고 있는 공동체를 계속 약탈만 할 것인가, 아니면 지식을 통해 자기가 사는 사회를 건강하게 살리는 입장에 서 있을 것인가를 뼈아프게 자문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지식은 무엇이며, 그 쓰임새는 과연 어떠해야 하는가를 화급하게 질문해야만 할 시점이다.

지금 이런 혹세무민의 시대일수록 우리 사회 지식에 대한 물음을 새롭게 제대로 일으켜야 할 때다. 플라스틱 지식은 해롭다. 권력과 금력을 향한 지식과 지식인의 일방적 기울기는 사회를 너무 위태롭게 해왔다. 지식이 제대로 살아야 우리 사회가 비로소 산다. 지식은 이 땅의 절박한 문제에 대해 해답을 구할 수 있는 단서가 될 수 있을 때 비로소 산지식이다. 더욱이 우리 사회에서 지식은 더없는 창조성을 요구한다. 우리 사회 지식의 바른 가치에 대한 질문을 진지하게 물어야 할 때다.

무엇보다 진실을 밝히고 세상과 생명의 모습을 파악해 내는 힘의 도구가 바로 지식의 요건임을 알아야 한다. 생명이란 무엇이고, 인간은 무엇인가, 그리고 인간의 지식은 인간의 공동체에 무엇일 수 있는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이 배제된 플라스틱 지식은 바로 내분비를 교란하는 화학 물질과 다를 것이 없다. 종국에는 지식인 자신도 해(害)하고 말 것이며 터하고 있는 한국 사회의 밑둥까지 썩게 만들 것이다.

'플라스틱 지식사회'에 엄중한 경고를 보내야 한다.

(이 글은 <월간중앙> 2005년 10월호에 기고한 글의 내용과 일부 겹친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국의 지식사회는 달라진 게 없다. 필자 홈페이지 바로가기 ☞ www.kimsangsoo.com )
김상수 작가가 새로운 <프레시안>의 기명 칼럼니스트로 합류한다. 김 작가는 그간 연극, 영화, 사진, 다큐멘터리 등 다양한 예술 활동을 전방위적으로 펼쳐왔다. 그는 연극 <환>, <포로 교환> 등으로 활동을 시작해, 영화 <안개기둥>, <학생부군신위>의 시나리오로 대종상 각본상을 받았다.

<오적 김지하 필화사건>, <거창 양민 학살 사건> 등의 다큐멘터리를 작업했고, 1995년 3월 프랑스 파리에서 <어디에?>라는 제목으로 조형 설치 미술전을 가졌다. 특히 2001년 12월 오사카, 2003년 4월 도쿄에서 공연된 그의 창작극 <섬.isle.島>은 한국과 일본의 예술 문화 교류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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