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저녁 세종문화회관 예술아카데미에서 열린 '건국 60주년 기념 연속 강연'에서 '한국경제, 죽어야 산다'라는 주제로 강연을 한 김종인 전 의원은 현재 우리 경제는 리더십 상실의 시대에 갇혀 있다고 주장했다. 비전과 창의성이 없는 경제관료가 우리 경제가 안은 문제점을 알면서도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는 위기론이 확산되고 있는 한국 경제의 근본적 문제점으로 과거 체제 극복의 실패를 지목했다. 정부의 인위적 시장 통제와 그로 인한 재벌집단의 폐해가 지금도 해소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다.
김 전 의원은 경제관료들이 근본 원인을 알고 있음에도 '위기론'을 스스로 전파하며 고치지 않으려는 자세를 비판했다. 이번 강연은 국무총리실 소속 건국 60주년 기념사업추진기획단 주관으로 열렸다.
리더십 상실의 시대…강만수 경제팀은?
지금 경제 상황이 위기냐 아니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시장 전문가들 사이에도 '지금이 위기'라는 주장과 '지금은 경기 후퇴(recession)'라는 의견이 갈린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공통적으로 경제 책임자의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사실상 경제주체의 신뢰를 잃어버린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을 경질하라는 목소리가 높은 것도 이 때문이다. 지금의 경제팀으로는 리더십을 발휘할 수 없다는 얘기다. 김 전 의원도 같은 지적을 했다.
김 전 의원은 "지금은 리더십이 필요한 시기다. 경제관료가 자리만 탐내지 말고 무엇을 해야할 지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며 "그런데 지금은 그런 마음 자세를 가진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처방을 잘못해 환자를 더 심한 고통에 빠뜨린 의사는 물러나야 한다. 경제운용자도 마찬가지"라며 우회적으로 현 경제팀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다.
그는 다만 "현 경제팀 관료를 경질해야 하느냐"는 질문에는 "대통령이 알아서 할 일"이라며 직설적 언급을 삼갔다.
김 전 의원은 현 정부에 "경제구조를 제대로 진단하고 새로운 프레임워크를 짜라. 무엇보다 솔직해지라"며 "국민을 설득하지 못하면 현재의 상황을 넘지 못한다"고 충고했다. 이명박 정부 낮은 지지율의 원인이 결국 국민에 솔직하지 못한 정부 스스로에 있다는 지적이다.
김 전 의원은 강연 내내 '정부의 리더십'과 함께 '미래를 알면서도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을 내비쳤다. 지금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이 불러올 파급효과가 어떤지 알면서도 그에 맞게 대응하지 않으면 문제가 커진다는 충고다. 그 정책이 무엇인지는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았으나 경제정책 실패 사례로 국민의 불만을 산 과거 정권을 예로 든 것을 감안할 때 친재벌정책과 무리한 시장 개입 등을 꼽은 것으로 보인다.
그 예로 그는 국민의 불만이 커지는 것을 알면서도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다 단두대에 처형당한 프랑스 루이 16세와 통일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한 독일 정부관료를 들었다. 그는 "우리 경제정책 담당자들이 이대로 우리 경제를 굴리면 어떻게 될지 알고 있을 것이다. 제발 담당자들이 루이 16세처럼 사고하지 말고 국민에게 문제를 제대로 말하고 솔직해지라"고 거듭 당부했다.
한편 김 전 의원은 지금 우리 경제의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로 부동산 투기를 들었다. 그리고 잘못된 정부 정책이 이를 부추긴다고 지적했다.
그는 "부동산 투기로 양극화가 더 심해지고 있다. 여기에 정부의 잘못된 정책 때문에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다"며 "경기부양 논리가 금리인하로 이어지면서 부동산으로 돈이 몰렸다. 자연스럽게 구조조정이라는 단어가 사라졌다. 노무현 정권도 이를 방치해 경제정책에 실패했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정부가 재벌 키우던 60년대 경제체제는 변하지 않았다
김 전 의원은 지금의 한국 경제 체제를 '60년대식 재벌 중심 체제'로 규정했다. 그가 말하는 재벌 중심 체제란 정부가 앞장서 일부 대기업 집단에 자본을 집중하고 이를 바탕으로 국가 경제를 운영하는 체제를 뜻한다.
김 전 의원은 "60년대 정부의 경제개발계획으로 적은 자본을 일부 재벌에 선택적으로 집중해 우리 경제가 발전했다. 정부가 재벌을 태동시킨 셈이다. 당시는 시장이 없었으니 당연했다"며 "그런데 70년대 중반 이후 정부가 중화학 공업 육성을 위해 다시 자본을 가진 재벌에 중화학 공업을 나눠주었고 이는 재벌의 무차별 영토확장으로 이어졌다. 그 체제가 죽 이어져 왔다"고 말했다.
김 전 의원은 "오늘날 우리 경제구조가 과거와 얼마나 달라졌느냐. 변한 게 없다"며 "여전히 30대 그룹, 20대 그룹이 자본을 모두 분점하고 있고 정부는 자본을 몰아주고 있으니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 예로 김 전 의원은 우리 증권시장을 지목했다. 여전히 증권시장이 시장경제 체제와는 맞지 않은 정부 개입 방식으로 굴러가고 있다는 얘기다.
김 전 의원은 "80년대 말에 증시가 1004에서 800대로 급락하자 정부가 시장에 한 번에 3조2000억 원을 풀어 인위적으로 증시를 떠받쳤다. 하지만 그런 처방은 한계가 있다"며 "지금도 변한 게 없다. 우리 증시는 외국인들에 너무도 편한 시장이다. 외국인들은 '한국 정부는 주가지수가 1500선 밑으로 빠지게 두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김 전 의원은 이 문제점을 한 번에 해결할 기회가 있었다고 말했다. 지난 1997년 외환위기가 그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기회 역시 정부의 실패로 놓치게 됐다고 언급했다. 결과적으로 당시 우리 경제에 도래한 위기이자 기회를 놓침으로 인해 지금의 경제 모순이 해결되지 않고 있다는 의미다.
김 전 의원은 "IMF 사태가 왜 왔느냐. 지난 1993년 출범한 정권(김영삼 정권)은 '신경제 100일 계획'이란 걸 들고 나왔다. 경제 장벽을 모두 터 재벌의 무한 중복 투자를 가능케 한 것이다"며 "이게 60년대 체제가 안은 재벌 경제의 문제점을 확산시켜 IMF 사태로 직결됐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뒤를 이은 정권도 문제를 극복하지 못했다. 김 전 의원은 "다음 정권(김대중 정권)이 공적자금을 은행에 지원하면서 인위적으로 구조조정을 시켰고 2년 만에 'IMF 졸업했다'고 자랑했다. 부실은행에 공적자금을 집어넣고 의기양양해 한 것이다"며 정권의 인위적 조치로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고 말했다. 노무현 정권 역시 같은 선상에서 문제였다고 지적했다.
선성장 후분배…"그 사람들이 언제 후분배를 한 적이나 있나"
우리의 60년대 체제의 대표적 구호가 바로 '선성장 후분배'론이다. 나눠야 할 파이 자체가 적으니 일단 이를 키우자는 것이다. 이는 사회적 자본의 재벌 집중 논리로 곧잘 인용돼 왔다.
시장 경제 자체를 운용할 여력이 없었던 60년대 당시에는 이 논리가 설득력이 있었다. 그러나 경제 규모가 세계적 수준으로 커지고 대외적으로 시장 경제를 표방하는 지금도 이런 논리를 고집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김 전 의원은 지적했다.
김 전 의원은 "지금도 선성장 후분배 얘기가 나온다. 그런데 그 사람들(성장론자)이 한 번이라도 후분배를 시도한 적이 있는지 의문"이라며 "대한민국 역사상 그런 일은 없었다. 지금은 맞지도 않는 논리다"고 비판했다.
김 전 의원은 이어 "우리는 지금 60년대 체제를 가지고 글로벌 체제라고 말은 잘 한다. 그런데 태생적으로 시장경제와는 동떨어진 체제를 두고 글로벌 체제 운운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했다. 일부 언론과 정치인은 현 경제체제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시장경제와 맞지 않다"고 비판하지만 정작 우리는 아직 제대로 된 시장경제를 경험하지도 않았다는 뜻이다.
김종인은 누구 김종인 전 의원(68)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경제개혁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노태우 정권 시절 보건사회복지부 장관을 거쳐 청와대 경제수석을 맡았고 그 후 국회의원에 네 번 당선됐다. 17대 국회가 끝난 후 지난 달 28일 민주당을 탈당했다. 그가 행한 대표적 경제정책이 우리나라 헌법에 경제민주화에 대한 근거를 명기한 것이다. 일명 '김종인 조항'이라고도 불리는 헌법 제119조 2항은 "국가는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경제철학이 정책으로 실현된 사례가 5.8 부동산 조치다. 경제수석이던 1990년 당시 그는 재벌이 보유한 비업무용 부동산의 매각을 유도해 재벌의 무분별한 '재테크'를 규제했다. 이에 대해 그는 "당시 재벌이 부동산 재테크에 쏟아부은 돈이 100억 달러에 달했다. 우리나라 무역수지가 300억 달러 정도 하던 시절이었다. 재벌을 개혁하지 않고서는 정상적인 시장경제 정책을 추진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했다. 현재 18대 국회에서 개헌논의가 진행되는 한편 이 헌법 조항을 수정하려는 움직임도 포착된다. 경쟁의 자유를 강조하는 방향으로의 논의가 그것이다. 김 전 의원은 그러나 "한나라당 의원이 바보가 아닌 이상 그 법에 손을 대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할아버지인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을 닮은 듯한 원리원칙주의자인데다 확고한 경제관념을 가지고 있어 마찰도 많았다.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으로 구속된 데 대해서도 '김영삼 당시 후보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반대해 밉보인 것'이라는 소문이 많았다. 남다른 원칙과 고집 덕분에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에서도 경제부총리 하마평에 곧잘 오르내렸다. 현 정부에서도 대통령 비서실장 후보로 거론된 바 있다. 중앙고, 한국외대를 졸업하고 독일 뮌스터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로도 재직했다. |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