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은 서울시의 홍보내용과 함께 앞으로 변화할 서울 중심가의 모습, 시와 구청의 대립, 교통 혼잡 등 예상되는 문제들을 연일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어디에도 이 지역에서 생계를 꾸려가고 있는 상인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청계천 복원사업의 연장선이라고 볼 수 있는 세운상가 재개발에서 영세상인들의 배제는 처음 청계천이 복원될 때부터 문제였다. 가장 직접적 이해당사자인 상인들의 목소리는 개발계획에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시와 건물 소유주 간의 대화만이 시가 주장하는 '주민의견 청취'일 뿐이다. 앞으로 개발 진척 과정에서 세입자들의 반발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리고 이런 논란은 서울시의 모든 재개발 사업에서 계속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
민간자율방식 개발, 세입자 보상은 無
가장 큰 문제는 이 개발이 전면적 민간자율방식으로 진행된다는 데 있다. 세입자 이주 대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4구역은 얘기가 다르다. 이 구역은 공기업인 SH공사가 사업시행자로 나선다. 이미 상인들의 이주대책도 착실히 마련됐다. '공익사업의실현을위한토지의취득및보상에관한법률(토지보상법)'에 따라 상가세입자들은 3개월 범위 내 시효보상(3개월치 영업 손실에 대한 영업이익 보상)과 이주비 등이 지원될 것으로 예상된다.
아예 이주를 희망하는 세입자는 서울의 또 다른 개발지 중 하나인 송파구 장지동 동남권역 개발지로 이동한다. 나머지는 바로 건너편 옛 조달청 자리에 임시이주상가로 입주할 수 있다. 4구역 1700여 세대 중 약 750세대는 여전히 인근에서 장사를 할 수 있다.
하지만 4구역을 제외한 다른 지역 상인을 위한 대책은 전혀 없다. 이 지역들은 전부 민간자율방식으로 개발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서울시가 총 18조 원까지 예상되는 자금을 마련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에 당연한 선택일지 모른다.
문제는 민간자율방식이 가진 폐해다. 민간자율방식 체제 하에서 공사는 관리자 자격으로만 개발에 개입한다.
또 민간이 들어오면 당연히 땅값은 상승한다. 이는 분양가 상승으로 이어진다. 세운상가 터에 남기를 원하는 세입자가 감당할 수 없는 부분이다.
떠나기도 어렵다. 민간자율방식은 공공개발이 아니기 때문에 토지보상법이 적용되지 않는다. 세입자들이 보상받을 길이 없다. 말 그대로 민간인 소유주의 '자율'에 맡기는 방식이다. 이를 두고 건국대 백준 겸임교수(부동산대학원)는 15일 "고양이에게 생선 맡기는 꼴"이라고 비판했다.
서울시는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했다는 입장이다. 이번 사업을 담당하는 서울시 균형발전본부 도심재정비1담당관 관계자는 "상업용지의 경우 세입자 이주대책은 원래 근거가 없다. 법적 근거가 없는 사업임에도 시는 계획을 마련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주하고 싶어도 높은 분양가 때문에…
많은 상인이 이주를 결정하고 있다. 오는 11월이면 헐릴 가능성이 높은 현대상가의 경우 협의보상률이 98%에 달한다. 청계천이 복원되면서 이미 상권이 많이 죽었기 때문이다.
상인들 중 상당수가 서울시가 이주지로 결정한 장지동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이곳은 아직 상권이 제대로 형성되지도 않은 곳이다. 동남권역유통단지사업단이 마련된 SH공사에 따르면 동남권역 유통상가의 공사진행도는 70~80%대에 불과하다. 거기에 인근 주거지가 들어설 장지지구 공사도 역시 81%의 공정률을 보이고 있다. 아직 상권이 형성되지도 않은 지역에 들어선 전자제품 상가의 장사가 제대로 될 리 없다.
또 장지동 지역은 개발되면서 분양가가 크게 올랐다. 세입자가 이주를 하고 싶어도 마땅한 자금을 마련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세운상가에서 전선과 케이블, 조명기구 등을 판매하는 ㅈ전자의 김형석 사장(가명)은 "장지동 분양가가 공개됐는데 1층에 자리잡으려면 최소 4억 원 가까이 분양가를 내야 한다"며 "여기에 권리금 1억1000만 원을 주고 겨우 들어왔는데 어떻게 그런 곳에 그 많은 분양가를 내고 가냐"고 따졌다.
실제 장지동의 분양가는 영세 세입자인 세운상가 상인들이 들어가기에는 조금 부담스러운 수준이다. 취약한 상권을 감안하면 더욱 그러하다.
청계전자상가협의회가 발표한 장지동 분양가는 기준면적 22.68㎡의 경우 1층의 최저분양가가 3억6000만 원, 최고 분양가는 5억6000만 원에 달한다. 목 좋은 위치의 1억 원대 상가를 찾기 위해서는 6층 이상으로 올라가야 한다.
김 사장은 "구의동 테크노마트도 처음 개발됐을 때 초기 입주자들이 장사가 안 돼 얼마나 많이 떠난 줄 아느냐"며 "상권이 형성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 서울시에서 상인들 고려는 전혀 안 하는 듯하다"고 말했다.
군사독재시절보다도 후퇴한 개발정책
근본적으로는 개발 과정에 세입자의 의견이 전혀 반영되지 않는 현 제도 자체가 문제다. 오히려 지금의 개발 정책은 세입자 권리 보호 측면에서는 군사독재 시절보다 후퇴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재개발이 시작된 해는 1973년이다. 이때도 세입자들은 '참여조합원' 자격으로 발언권을 가졌다. 세입자 권익은 지난 2003년 시행된 '도시및주거환경정비법(도정법)'이 시행되면서 후퇴하기 시작했다. 참여조합원 관련 조항이 삭제됐기 때문이다.
백준 교수는 "도정법이 시행되면서 적어도 개발에 관해서는 철저하게 정부와 지주가 주도하는 철저한 신자유주의 시스템이 뿌리내렸다. 세입자들이 개발에 참여하는 의사소통 통로가 사라진 것이다"고 지적했다.
극단적인 폐해는 지난 2006년 7월 뉴타운 사업 추진을 위해 시행된 '도시재정비촉진을위한특별법(도촉법)'에서 드러난다. 이 법에는 도정법에 그나마 남아있던 구역지정 단계에서의 세입자 의견수렴 과정마저 사라졌다. 백 교수는 "도촉법은 사업성만을 중요시하는 시스템에 법령이 맞춰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며 "갈수록 세입자들의 생존권과 참여권이 열악해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배제되는 상인들은 희망을 잃고 있다. 청계천변에서 조명등을 판매하는 ㅊ기전의 유오진 사장은 "우리나라에서 언제 나랏님들이 우리와 합의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느냐"며 "관리들에게는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는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와 관련 연세대 이제선 교수(도시공학과)는 지난 7일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이 주최한 토론회에 참석해 지금의 도시재정비 사업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을 찾아야 할 때라고 주장했다. 당장 취할 수 있는 변화는 공공개발에서 찾을 수 있다는 얘기다.
이 교수는 "재정비촉진사업의 경우 사업이 무분별하게 추진되면서 '선계획-후개발'이라는 도시의 계획과 개발에 관한 원칙이 훼손되고 있다. 여기에 지구지정 시 주민동의 없이 주민공람과 공고만으로 사업추진이 가능해 주민참여를 제약하고 있어 피해가 커지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도시재정비사업의 문제점 개선을 위해 사업이 지역 내 주민들이 가진 요구 사항을 수렴할 수 있는 공공사업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개별사업을 통합해 시행할 수 있는 가칭 '도시재생법'을 제정해 그 동안 주민에게 전가시켰던 기반시설 설치에 대한 재정 지원을 확충해야 한다"며 "이와 함께 재정이 열악한 주민을 지원할 수 있는 방안도 마련돼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남근 변호사(민변 민생경제위원장)도 "근본적으로는 공공성을 위해 공기업이 주도하는 공영개발방식을 따르는 게 바람직하다"며 공공사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특히 "'형평성의 문제'를 해결해야 할 시점이다. 세운상가의 경우 장기간 이곳에서 영업한 사람들에 대한 실질적 대책을 서울시 차원에서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세운상가, 피맛골, 청진동…기억 품은 옛 터가 사라진다 서울시의 재개발 정책이 줄을 잇고 있다. 이에 따라 옛 정취를 고스란히 갖고 있는 피맛골과 청진동의 지도가 바뀔 것으로 전망된다. 과거 개발독재 시절 서울의 대표적 전자상가였던 세운상가는 주상복합단지로 변신한다. 서울시에 따르면 '청진구역'으로 이름지어진 피맛골과 해장국 거리로 유명했던 청진동 일대가 도시환경정비구역 재개발사업에 따라 내년부터 철거된다. 이미 이곳에서 터 잡았던 많은 상점들이 이전을 준비하고 있다. 이에 따라 조선시대부터 이어진 서민들의 편안한 휴식처였던 이곳이 사실상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이곳의 지도는 착착 진행되는 재개발사업에 따라 조만간 고층 빌딩 숲으로 바뀔 것이다. '잠수함이고 소총이고 다 만들 수 있다'던 종로구와 중구 일대 세운상가도 자취를 감춘다. 80~90년대 청소년기를 보낸 사람들에게는 복제판 성인비디오 구입처로 기억남을 이곳은 오는 2015년까지 총 18조 원이 투입돼 대규모 주상복합 단지로 변신한다. 이곳은 지난 1982년부터 재개발 계획안이 끊이지 않고 나온 대표적 노후지역이다. 서울시는 세계문화유산인 종묘 보호를 위해 근방 건축물 높이를 기존 세운상가 높이인 약 55m 이하로 제한할 예정이다. 세운상가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길에는 폭 20m 이상의 보행공간을 만들어 남산에서 종묘로의 시각통로를 확보한다는 방침이다. 이들 지역 개발로 종로구를 대표하던 서울 특유의 문화 공간은 사실상 다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 젊은 문화 지역으로 인정받아온 혜화동 대학로 거리는 이미 넘쳐나는 상업시설로 옛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피맛골과 세운상가 터에 새로이 자리잡을 '그 어떤 곳'은 과연 새로운 기억의 보존터가 될 수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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