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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시청 앞 지하철역에서 우린 다시 만났었지"

[나도원의 '대중음악을 보다'] 거리가 만든 노래, 거리에서 만난 노래

"시청 앞 지하철역에서 우린 다시 만났었지." 번잡한 도심 정거장은 이렇게 시작하는 노래와 함께 순간 낭만적인 공간으로 변모한다. 옷자락에 내려앉은 네모난 빛처럼 특정 장소에 색을 입힌다. 이런 노래를 부르는 것은 손으로 햇빛을 담아 쥐는 행위와도 같다.

"작은 내 안에 둥지 튼 너의 골목/ 그 속에서 난 눈뜬 채 길을 잃고"라는 싱어송라이터 이장혁의 읊조림으로 '영등포'는 어두웠던 청춘 한 단락의 상징으로 남게 된다. 손현숙이 "새벽부둣가 해장국집"이라든지 "새우젓사려 아낙네소리"와 같은 걸쭉한 노랫말에 음을 실어내는 순간 '소래포구'는 시원한 짠내 머금은 삶의 터전이 되어 다가온다. 음악인들이 드나드는 라이브 클럽들도 특별한 향기로 채워지곤 했다. 푸른새벽은 '빵'을, 챔피언스(Champions)는 와우교와 산울림소극장을 따라 걷다 만나게 되는 '스팽글'을 노래로 기념했다.

"거리는 시대를 잊어 돌아갈 집도 잊었네"
▲ "얼마 후 거리에는 촛불이 켜지고 국가수반은 12지신 중 하나로 불리게 된다. 올해는 쥐띠해가 확실한 모양이다. 밤마다 차 없는 거리를 조성하도록 유도하고 시민들의 걷기운동을 장려해준 것은 미덕이랄까." ⓒ프레시안

그 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타인은 알지 못하지만 어떤 냄새인지는 어렴풋이 맡아볼 수 있다. 세상의 일들이 그러하듯 사람들에게는 '다르면서 같은' 부분이 있고, 개별적인 추억의 장소는 얼마든지 보편적인 기억과 공간으로 퍼져나가기 때문이다. 때론 가볍지 않는 하나의 역사가 되기도 한다. 달동네 박물관이 생긴 '수도국산'을 플라스틱 피플(Plastic People)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거리는 시대를 잊어 돌아갈 집도 잊었네."

최근 많은 이들이 '무단횡단이 일상'이었던 시절에도 상상하기 힘들었을 '광장의 기억'을 가지게 되었다. 혹은 그 기억을 다시 불러냈다. 어쩌면 예고되었던 일이었지 모른다. 대보름에 때맞춰 거대한 쥐불놀이가 있었으니, 숭례문이 그 이름의 다른 의미처럼 불을 떠받치는 문이 되었고 정부중앙청사에는 화재가 있었다. 그러더니 과자봉지에선 생쥐머리가 나왔다. 얼마 후 거리에는 촛불이 켜지고 국가수반은 12지신 중 하나로 불리게 된다. 올해는 쥐띠해가 확실한 모양이다. 밤마다 차 없는 거리를 조성하도록 유도하고 시민들의 걷기운동을 장려해준 것은 미덕이랄까. 이러다가 서울 도심에 백로가 나타나겠다는 어림 반 푼어치 농담도 나올 법 했다.

그 곳에서 어느 밤, 손바닥에 피가 나도록 무언가를 잡아당겼고, 허옇게 뒤집어쓴 소화기 가루는 물줄기로 씻어냈다. 여한 없이 맞은 물대포에 버스 밑으로 나동그라지기도 했다. 어린 얼굴을 가진 전경들과 부대끼며 온몸의 근육으로 버텨야 하는 순간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무수한 주먹질이 머리로 날아들었다. 함께 한 사람들은 평화를 폄하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자신이 약할 때 무언가를 두려워하지만, 단지 그렇지 않았을 뿐이다. 영화 <300>을 재미있게 봤던지 경찰은 그들을 졸지에 '300명의 전문 시위꾼'으로 만들어버렸다.

여기저기 피를 흘리며 쓰러진 사람들과 서로 열을 끊고 끊기는 혼전 와중에 고립당한 전경아이들, 그리고 절단된 손가락을 찾아달라는 절규가 뒤섞인 밤은 현실이었다. 현실을 '현실적'으로 담으려는 시도들은 종종 무표정한 비현실을 창조해버린다. 실제는 비현실적이면서 현실적이고, 평범하면서 비범하다. 관습과 다르게 현실을 애니메이션으로 그리고, 환상을 실사로 그린 영화를 떠올릴 때가 더 많은 법이다.

옛날에는 이 사회가 기회가 균등하고 노력하면 얻을 수 있어서 좋은 체제라고 가르쳤다. 물론 지금도 그런 가르침은 있다. 하지만 현실의 맨살을 드러낸 '리얼월드'의 어느 구석에서 누군가는 반죽이 된 담배와, 물이 줄줄 흐르는 전화기와, 수백 년 전의 고문서처럼 젖어버린 수첩을 확인하고 있었다.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음악인은 젖은 몸을 떠는 남자에게 자기 옷을 벗어주는 호의를 베풀었다. 그런 경험을 대단한 무엇이라도 되는 양 말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그러한 가혹함이 일상인 사람들이 있기에 많은 이들은 침묵으로써 예의를 지킨다.

'광화문연가', '삼청동'에 등장한 그 거리의 2008년은…
▲ "동시에 루시드 폴(Lucid Fall)이 노래했고, 한적하던 거리에서 카메라를 든 방문객들로 북적이는 관광지로 변한 '삼청동'에는 5월 31일의 기억이 덧입혀졌다. 그렇게 거리에는 새로운 기억들이 쌓여간다." 지난 5월 31일 삼청동 인근에서 집회 참가자들이 경찰이 쏘는 물대포를 막으려 대형 태극기를 머리 위로 들었다. ⓒ프레시안

적지 않은 사람들이 중요한 경험을 한 그 거리는 이문세의 '광화문연가'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뻔하고 뻔한 감성으로 채색되었으나 쉬이 지나쳐지지 않는 "덕수궁 돌담길은 아직 남아있는" 그 거리이다. 동시에 루시드 폴(Lucid Fall)이 노래했고, 한적하던 거리에서 카메라를 든 방문객들로 북적이는 관광지로 변한 '삼청동'에는 5월 31일의 기억이 덧입혀졌다. 그렇게 거리에는 새로운 기억들이 쌓여간다.

언젠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평온해지고 광장은 다시 비게 될 것이다. 비가 골목마다 따라다니던 밤은 잊혀질 것이다. 마치 습관처럼. 하지만 빈자리는 원래 있던 것이 사라진 자리가 아니라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기에 비어있음으로도 존재를 느낄 수 있다. 그 곳에서 이 빠지는 꿈처럼 생생한 기억을, 날아가기 전에 잡아채듯 누군가는 새 노래를 만들 것이다. 분노와 공포가 창작을 추동하기도 하지만 작은 것에 대한 애정과 죽어가는 것에 대한 애틋함, 그리고 손에 잡히지 않게 될 기억이 낳는 노래들도 많다.

대중은 중계화면에 익숙해졌다. 영화에서조차 TV뉴스를 통해 폭풍이 도시를 습격하거나 야구경기에서 주인공의 활약을 중계하고, 자동차 백미러가 살인 장면을 반사하기도 한다. 미디어와 제3자적 시선의 일상화이다. 하지만 체험자들은 자신의 눈과 입으로 기록한다. 주인공은 늘 죽지 않는다기보다는 죽지 않은 이가 주인공인 된 것이다. 그리고 기록은 존재를 연속적이게 한다. 이것은 "민주정신을 경제성장으로 승화시키자"거나 하는 식의, 처음부터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승화 타령'과 다르다.

"그 날의 노래는 우리 귀에 아직 아련한데"

어릴 적엔 고분발굴의 윤리성에 대한 의문을 품곤 했다. 아직 잘 모르겠지만, 예술가는 자신의 무덤을 스스로 발굴하는 사람이라는 것만은 점점 분명해진다. 어느 화가는 형제의 무덤에 핀 노란 꽃을 잊지 못했다. 물론 여전히 다른 편에는 생각이 다르면 예술을 예술로 보지 않는 야만이 있다. 시청 앞에서 보수단체 회원들에 의하여 파괴된 미술작품들은 그 상처들이다. 그럼에도 좋은 것뿐만 아니라 나쁜 것도 잊지 말아야 함을 아는 이는 누가 나를 읽어줄 것인가 주저하지 않을 테고, 들리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은 이윽고 함성이 될 것이다.

옛 동네로 데려가 오랜 친구를 만나게 해준 '혜화동'으로 장소와 사람을 매듭지었던 청년들은 '시청 앞 지하철역에서'를 통해 지나간 젊음과 사랑을 차분히 기억하는 법을 일러줬다. 그런데 그 노래는 이제 어떤 새로운 공기를 함께 실어 나른다. 같은 장소에서 혹자는 아침에 함께 비를 맞으며 춤을 췄던 '처음처럼'이나 시민가요가 된 '헌법 제1조'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물론 새로운 노래라면 더욱 좋을 테고. 지금 이렇게 기다리고 있다. 동물원이 미리 노래했듯이. "우리의 영혼에 깊이 새겨진/ 그 날의 노래는 우리 귀에 아직 아련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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