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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즈보다 무서운 광우병? 광우병보다 무서운 에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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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즈보다 무서운 광우병? 광우병보다 무서운 에이즈?

[인권오름] 불안 경쟁의 정치를 넘어

미국산 쇠고기 수입협상에 반대하는 초기 집회에서 발언을 할 기회가 있었다. 우리가 왜 싸우고 있을까를 물었더니 큰 목소리로 "죽기 싫어서!"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촛불의 시작은 '불안'이었다. 비정규직이 확산되고 집값은 치솟고 병원비는 점점 비싸지고 몸으로 체감하는 경기가 바닥을 치는 동안 불안은 점점 심화되어왔다. 그러나 간난신고한 삶도 언젠가 '나의 노력'으로 필 것이라는 기대가, 그리고 그 노력이 빛을 발할 기회를 이명박이 만들어줄 것이라는 기대가 불과 반 년 전만 해도 불안에 장밋빛 커튼을 드리우고 있었다. 그 '불안'이 밥상으로 성큼 기어들어오자 결국 폭발했다. 먹고살기 힘들어 죽겠어도 쥐 죽은 듯이 살고 죽을 둥 살 둥 일하면 '죽을 건 환갑집 돼지'일 줄 알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점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광우병에 의해 호출되는 에이즈
  
  촛불이 번져나가며 대중의 '불안'이 '불만'으로 전화된 지는 오래다. 분위기 파악이 늦은 정부는 한동안 '불안'을 가라앉히려는 대응만 하다가 오히려 '불만'을 키웠고 이제야 조금씩 불만을 인식하며 경계하고 있는 모습이다. "국가 정체성에 대한 도전"을 읽어냈으니 말이다. 그러나 '불안'은 여전히 남아있다. 안전을 입증하려는 세력에 의해서든, 불안을 줄일 수 있는 조치를 요구하는 세력에 의해서든 광우병 쇠고기의 위험은 지속적으로 환기되고 있다.
  
  이때 에이즈에 대한 비유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질병에 대한 지식이 쌓이고 20여 년 넘게 정확한 정보를 전하려는 노력이 이어져왔지만 여전히 에이즈는 인류에게 현존하는 공포다. 그 공포의 결과는 무참한 인권침해와 차별이었고 차별은 다시 공포를 강화하며 반복되어 왔다. 촛불시위의 "건강성"을 묻는 인터넷 언론의 한 칼럼은 HIV 감염인의 시위 참여를 문제삼으며 부정의 근거로 들었다. "미친소 문제가 아닌 상황에서 에이즈보균자가 정상인과 어깨를 걸고 피를 토하는 구호를 내갈기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며 "에이즈 보균자라는 광우병 보균 소(미친소) 못지않은 무서운 존재"를 만나면서 광우병에 걸렸을 가능성이 있는 쇠고기 수입을 반대한다는 것은 "진정성"이 없다고 역설한다.
  
  불안은 어디에서 증폭되는가
  
  HIV 감염인과 어깨를 거는 것은 전염의 위험이 없다는 상식을 알려주기에도 아까운 칼럼을 굳이 인용하는 것은 불안을 경쟁하는 담론이 언제든 빠질 수 있는 함정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진보적인 언론이라고 일컬어지는 언론들과 소위 '진보적 인사'들도 에이즈 비유를 종종 유포한다. 에이즈보다 무서운 광우병, 에이즈만큼 무서운 광우병 등의 비교는 촛불의 요구를 정당화하는 긍정의 근거로 사용되면서 우회적으로 에이즈에 대한 공포를 강화하고 있다. 그러나 공포와 불안은 비교될 수 없으며 증명될 수도 없다. 다만 통계적으로 예측되는 '위험'이 있을 뿐이다.
  
  현대 사회에서 '위험'은 도처에 널려 있고 끊임없이 만들어진다. 불안은 어떤 위험이 예상 가능할 뿐만 아니라 위험을 막을 경로도 예상 가능한 지점에서 증폭된다. 수 명의 남성들이 알 수 없는 질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나가던 것이 '게이돌림병'으로 정체화 하는 순간 불안은 증폭되었고 소떼들이 갑자기 비틀거리다 쓰러져가는 '알 수 없는 일'이 프리온을 통해 전염되는 병으로 밝혀지면서 불안은 제자리를 얻었다. 프리온은 어떤 방법으로도 사라지지 않아 광우병에 걸린 쇠고기를 먹으면 인간이 '변종 크로이츠펠트-야콥병'을 얻게 된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쇠고기 거래가 국제무역의 주요의제로 등극했다.
  
  불안은 불안을 벗어나야 한다
  
  그러나 크로이츠펠트-야콥병은 광우병 쇠고기를 먹지 않고도 자연발병할 수 있으며 인류에게 여전히 불치의 병으로 남은 질환은 이보다 훨씬 많다. 불안을 잊자는 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불안을 직시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불안이 불안에 머무를 때 그것은 나와 타인을 경계 짓고 나의 안전을 위해 다른 모든 가치가 희생될 수 있다는 인식을 정당화하하며 연대를 훼손하게 된다. 에이즈인권의 역사가 이를 증명하며 광우병에 의해 에이즈가 호출될 때마다 우려스러운 것도 이 때문이다. 불안은 불안을 벗어나야 한다.
  
  에이즈는 누구나 걸릴 수 있지만 누구나 예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성이, 가난한 사람들이 더 많이 감염되고 더 많이 죽는다. 예방을 위한 정보와 수단은 불평등하게 접근되며 의약품에 대한 접근도 차별적이기 때문이다. 이윤만을 추구하는 제약자본은 질병의 예방과 치료보다는 질병에 대한 공포가 의약품의 비싼 가격을 지탱해주기를 바란다. 바이러스의 전염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질병의 확산을 막고 감염인들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는 분명하다. 개인적 수준에서의 콘돔 사용뿐만 아니라 의약품 접근권의 실현, 여성의 권리 증진 등이 '위험'을 줄일 방안이다.
  
  광우병이 에이즈와 비교되어야 한다면 바로 이 지점에서 비교되어야 한다. 위험의 크기 자체를 저울질하며 불안을 경쟁할 것이 아니라 위험이 불평등하게 분배되며 그 위험을 막을 방안이 '있다'는 점에서 비교되어야 한다. 미국산 쇠고기가 수입될 때 그 위험의 대부분은 가난한 사람들의 몫으로 돌아간다. 또한 인간다운 삶의 권리를 학교에, 군대에, 사회복지시설에 저당잡힌 이들에게 더 많이 돌아갈 것이다. 위험의 불평등한 분배가 무역규제를 통해 완화될 수 있다는 점이 우리가 싸우는 근거다. 크로이츠펠트-야콥병으로부터의 안전을 보증받는 것보다 인류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으로 위험과 불평등을 줄이는 것이 싸움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비유는 재구성되어야 한다
  
  보수언론만 HIV 감염인과 어깨 거는 것을 상상 못하는 것이 아니다. 촛불의 흐름도 HIV 감염인과 함께 하는 것을 상상하지 못한다. 광우병을 에이즈에 비유하는 반복되는 수사는 보수언론의 노골적인 논리보다 강하게 HIV 감염인을 배제한다. 광우병이 에이즈에 대한 공포를 불러내는 공간에서 HIV 감염인이라는 이유로 겪었던 차별과 인권침해를 고통스럽게 기억해내야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일반화된 광우병과 에이즈의 비유를 멈춰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시민들의 저항을 근거 없는 불안으로 치부하며 '위험'조차 부정하는 정부와 보수언론에 대해서도 불안으로 경쟁할 필요가 없다. 증폭된 불안은 근거 없는 불안이 아니라 답을 아는 불안이다. 광우병 위험이 있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 촛불의 흐름을 촉발할 수 있었던 것은 불안 그 자체가 아니라 위험을 막을 수 있는 방안의 구체성에 기인한다. 여전히 광우병과 에이즈의 비유가 필요하다면 '위험'을 확산하는 구조를 폭로하고 '위험'을 줄일 수 있는 정답을 우리가 알고 있다는 점에서 비유되어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불안을 사라지게 할 힘이 우리 안에 존재한다는 점을 확인하는 것이며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것들을 판단하고 결정할 권한을 우리 안에 귀속시키는 것이다. 죽기 싫어서 싸우기보다, 죽도록 싸워보는 것이 어떤가.
  
  (이 글은 주간 인권신문 <인권오름>에도 실렸습니다. <인권오름> 기사들은 정보공유라이선스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정보공유라이선스에 대해 알려면, http://www.freeuse.or.kr 을 찾아가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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