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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공교육, '다 X까라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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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공교육, '다 X까라 그래!'

[뷰포인트] 미이케 다카시 <크로우즈 제로> 리뷰

일본영화계 중에서 미이케 다카시 감독만큼 '종잡을 수 없는' 감독이 또 있을까. 일 년에 네다섯 편의 영화를 한꺼번에 만들면서도 범작은 섞일지언정 졸작은 없으며, 그 범작마저도 다른 웬만한 감독들의 웬만한 완성도를 훌쩍 넘어설 뿐만 아니라 감독 고유의 취향과 특성이 오롯이 녹아있다. 그의 영화세계에 어떤 영화로 첫 입문을 하느냐에 따라 미이케 다카시 감독에 대한 호오가 극명하게 갈릴 수밖에 없는 게, 그는 잔혹무지한 호러영화에서부터 빛깔 고운 퀴어 로맨스까지 장르도 스타일도 다종다양하게 영화를 만들어왔기 때문이다. 만약 호러영화에 취약한 사람이 예컨대 <이치 더 킬러>같은 영화로 첫 입문을 했다면, 그는 평생 미이케 다카시의 이름만 들어도 움찔하며 도망다닐 수밖에 없을 것이다. 확실히 미이케 다카시 감독은 사람들의 상상을 언제나 넘어서서 '끝까지' 가버리는 폭력과 액션, 그리고 잔혹하기 그지없는 사지절단의 신체훼손 장면들을 통해 명성(악명?)을 쌓았다. 그의 영화에 광적인 지지를 보내는 팬들 역시 대체로 B급 장르물에 대한 이해가 남다른 관객이 많다. 그러나 그의 영화가 가지는 매혹을 그저 잔혹한 비주얼에서만 찾는다면 그건 미이케 다카시 감독의 영화세계 중 극히 일부만 흘깃 본 것에 불과할 것이다. 실제로 미이케 다카시가 창조하는 공포와 오싹한 전율은 '그런 식'의 잔혹한 장면이 없는 영화에서도 얼마든지 얻을 수 있으며, 그가 전해주는 영화적 쾌감이란 단순히 빛깔 좋은 화면을 보거나 비주얼 쇼크를 경험하는 것 이상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가 인간의 본성과 폭력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놓치지 않고, 그것을 다시 자신만의 개성 넘치는 화면 속에 녹여내기 때문일 것이다.
크로우즈 제로
지난 주에 개봉한 <크로우즈 제로>는 미이케 다카시 감독이 작심하고 흥행을 노려 만든 대중영화다. 국내에도 상당한 팬을 거느리고 있는 일본의 꽃미남 아이돌 스타들을 대거 등장시켜 과장되면서도 스타일리시한 '싸움 씬'들을 선보이는 이 영화는, 한 마디로 말해 '학원폭력물'이다. 그것도 국내 청소년 금서 목록을 위태롭게 가로지르기 일쑤인 '일본 학원폭력물 만화'에 속하는 작품을 원작으로 삼았다. 어쩌면 호르몬이 들끓는 10대 남자아이들을 대상으로 폭력을 미화하며 조장하는 '질 나쁜' 대중문화라고 낙인찍히기 딱 좋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이 영화는 그 장르 만화들에 자주 등장하는 헤어스타일과 옷차림을 그대로 구현한 인물들이 등장해 만화식의 과장된 액션을 선보인다. 영화의 유머 역시 만화식 리듬으로 창조되는 감각을 고스란히 살렸다. 주인공인 타카야 겐지(오구리 슌)는 야쿠자 보스의 아들이며, 온갖 싸움꾼과 문제아가 모인 고등학교에서 저마다 짱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이 영화의 중심 줄거리다. 게다가 겐지가 짱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건 아버지로부터 야쿠자 조직을 넘겨받기 위해서니, 말 다했다. 한국의 근엄한 어른들이 기겁을 하고 손사래를 칠 만한 내용이다. 그러나 <크로우즈 제로>는 학원폭력물이 역설적이게도 어떻게 애틋하고 건강한 성장물이 될 수 있는지 완벽하게 설득해주는 영화다. 만화식 과장이 한껏 강조된 영화 속 세상은 아무리 죽을 듯 맞는다 해도 단 한 사람도 결코 죽지 않는 '판타지'의 세계이다. 싸움을 못 하는, 즉 '선수'가 아닌 사람을 때리거나 여자를 납치하는 건 천하에 비열한 짓이고, 비겁한 수를 쓴 자는 부메랑으로 돌아온 비겁한 수에 맞아 쓰러지며, 일단 한 번 맺은 의리와 약속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켜야 한다. 나름의 윤리적 법칙이 엄격하게 지배하는 세계인 셈이다. 단 한 명만이 차지할 수 있는 최고의 짱 자리를 놓고 다양한 '선수'들은 때로는 '미팅 주선'과 같은 방법을 통해 세력간 합종연횡을 형성하기도 하고, 오래 전에 학교를 다닌 적이 있는 야쿠자 끄나풀로부터 전략과 전술을 전수받기도 한다. 배경이 문제아 고등학교이고 이 아이들이 노리는 것이 학교 싸움짱의 자리여서 그렇지, 이런 과정들은 소년 스포츠물, 특히 단체팀 경기 종목을 소재로 최고가 되기 위해 정정당당한 대결을 거치면서 스포츠맨쉽을 통해 인생을 배우는 아이들의 고군분투와 별반 다르지 않다. 다수의 훌륭한 성장영화들이 이쯤 되면 이 영화가 겉으로는 문제아 고등학생들을 전면에 내세운 학원폭력물이라곤 해도 실제로는 냉혹한 사회에서 우리네 평범한 사람들이 펼쳐야 하는 생존경쟁에 대한 훌륭한 은유가 되지 않을까. 게다가 영화에서 짱 자리의 가장 유력한 후보로 영화를 이끄는 세리자와 타마오(야마다 타카유키)와 타카야 겐지는 둘 다 상반된 타입의 '바람직한 리더'의 자질을 갖춘 아이들이다. 세리자와 타마오는 뛰어난 (싸움) 실력과 함께 다른 실력있는 선수들을 강한 리더쉽으로 이끌 줄 아는 카리스마를 지녔고, 반칙패를 쓴 친구를 엄하게 처단하면서도 적절한 타이밍에 그를 다시 보듬을 줄 아는 관용도 지녔다. 중병(뇌종양)을 숨긴 채 혼자 앓고있는 친구를 살뜰하게 챙기는 다정한 마음씨까지 갖고 있다. 반면 타카야 겐지는 보다 '부드러운 리더'의 타입이다. 물론 그 역시 무시무시한 싸움 실력을 갖췄지만, 남들에게 쉽게 무시당하기 일쑤인 이에게도 마음을 열고 '형으로 모실 테니 도와주세요'라고 말할 줄 알고, 바지에 실례한 친구를 위해 비록 여성품 가게일망정 가게문을 두드려 속옷과 바지를 사오는 아이다. 자신의 잘못을 따끔하게 충고하며 경고하는 친구에게 그만의 방식으로 용서를 구할 줄도 안다. 1대 수십 명의 싸움에서 피떡이 되도록 얻어맞고도 끝까지 일어나는 악바리 근성을 지녔는가 하면, 좋아하는 여자아이로부터 들은 '저질!'이라는 말 한 마디에 엉엉 울면서 눈가를 소매로 닦아내는 여린 심성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영화는 대체로 세리자와 타마오보다는 타카야 겐지의 편에서 진행되는데, 세리자와의 무리가 학교 내 세력제패를 위해 전략적으로 모인 집단이라면, 겐지의 무리는 겐지의 성품에 반한 다른 선수들이 자발적으로 그를 리더로 추대하고, 기꺼이 그를 위해 충성을 바치면서 형성된 집단이다.
크로우즈 제로
영화의 클래이맥스는 세리자와의 무리와 겐지의 무리가 대격돌을 하는 집단 싸움씬인데, 이 장면의 미학적 쾌감은 폭력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입을 떡 벌리고 감탄할 만큼, 그리고 죄책감 가득한 쾌감을 느끼게 할 만큼 강렬한 에너지를 자랑한다. 보는 사람마저 치솟는 아드레날린에 묵은 스트레스가 싹 가실 정도다. 안 그래도 다양한 스타일의 꽃미남들이 대거 등장하여 눈이 즐거운 데다가, 피가 튀고 눈이 시뻘겋게 부어오를지언정 이 영화의 싸움씬은 지극히 탐미적으로, 기술적으로도 매우 훌륭하게 촬영됐다. 더욱이 세리자와와 타카야의 1대 1 대결씬은 마치 실사와 너무 똑같은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한 미장센으로 촬영되어 현실에서의 끔찍한 폭력과 영화 속에서의 가상적이고 쾌감어린 폭력은 완전히 다른 세계일 수밖에 없음을 눈앞에 또렷하게 보여준다. 미이케 다카시는 국내 한 영화잡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현실에서의 폭력이 공포라면 폭력을 영화적으로 표현하는 건 쾌감이며, 현실과 영화 사이의 그런 아이러니함이야말로 영화의 본질'이라고 밝힌 바 있는데, 과연 이 영화를 보다보면 영화에서 묘사되는 폭력이란 단순히 폭력을 표현하는 수위의 문제가 아니라, 폭력을 어떤 입장에서 어떻게 다루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다수의 아주 '일반적인' 상식을 거스르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이유에서 이 영화는 단적으로 표현해 '부모가 청소년 자식의 손을 잡고 함께 관람할 수 있는 학원폭력물'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노파심 어린 걱정을 절대 놓을 수 없는 부모 입장에서는 이 영화 속의 폭력이 '판타지'이자 현실의 폭력과는 다른, 허구의 세계 안의 '양식화된 폭력'임을 한번쯤 강조할 필요성이 없진 않겠지만, 아무렴 어떤가. 아이들은 그런 만화나 이런 영화 속의 주인공들처럼 자신이 그런 무시무시한 주먹을 가진 싸움짱이 될 수 없다는 것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폭발 직전으로 드글드글 끓어오르는 아드레날린을 진정시키거나 통제하는 방법 중 하나로, 어쩌면 부모가 이런 영화를 함께 보고 서로 의견을 나누는 것도 나름 괜찮은 방법이 아닐까. 게다가 남자들의 싸움질이라면 진저리가 쳐질 수밖에 없는 젊은 여성들이야 이 영화의 맛을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다고는 쳐도, 사회생활을 하며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생존경쟁의 삶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이 영화가 전해주는 은유적 쾌감이 상당할 것이다. 어차피 대중예술이든 고급예술이든, 예술이란 것 자체가 인간의 반사회적 일탈 에너지를 사회적 형태 안으로 수렴하는 하나의 방식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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