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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는 권력이다. 사랑은 환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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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는 권력이다. 사랑은 환상이다.

[특집] 연극 <썸걸즈> 리뷰

여기 프랑스에서 살며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감독이 된 남자, 진우가 있다. 그는 최근 여자친구와 결혼 날짜를 잡은 뒤 한국에 돌아온 터다. 처음부터 끝까지 무대는 오로지 진우의 호텔 방. 그리고 이곳에 그의 옛 여자 네 명이 차례로 방문한다. 평범한 주부가 돼 있는 수줍은 성격의 15년 전 첫사랑 양선, 거침없고 자유분방한 민하, 진우의 선배 감독의 부인이자 한물 간 여배우 정희, 그리고 쿨하고 세련된 감성의 레지던트 의사 은후다. 각각의 여자들과 진우의 만남이 계속되면서 관객은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고 싶었다는 진우의 소박한(?) 의도와 시간이 여전히 아물지 않은 그녀들의 상처가 계속해서 충돌하는 것을 지켜보게 된다. 넘치는 매력과 재능으로 여자들에게 저돌적으로, 때로는 수줍게 접근하며 양다리도 불륜도 서슴지 않았던 그는 단 한 번도 책임있고 진지하게 관계를 이어가지 못했고 결정적인 순간엔 언제나 말없이 혼자 도망쳐 버렸던 이기적인 남자다. 그런 주제에 그녀들 기억 속에 자신이 '나쁜 남자'로 기억되는 것은 또 두렵고 싫다. 한 마디로 '좋은 건 다 하고싶고, 나쁜 짓은 해도 나쁜 놈은 되기 싫은' 남자다. 게다가 가장 쿨하게 시작해 감정적으로 가장 격하게 충돌하고 폭발하는 은후와의 만남에서 진우의 또 다른 찌질한 비밀이 드러난다. 이쯤 되면 객석에 있던 여자관객의 입장에서는 무대 위로 뛰어올라 주인공 진우 역을 연기하는 배우를 한 대 후려치고 싶은 분노와 짜증이 극도에 이르기 일쑤다. 하지만 그에게 그렇게 상처를 받았으면서도 10년, 15년이 지난 후 그의 연락에 그녀들이 결국 호텔방을 찾아왔듯, 관객들 역시 저 이기적이면서도 어린애 같은 남자를 결국 완전히 증오하지는 못 한다.
썸걸즈
1997년 영화 <남성전용회사>로 데뷔해 선댄스영화제에서 각광받은 뒤 <너스 베티>, <포제션> 등을 만든 닐 라뷰트 감독은 재능있는 희곡 작가이기도 하다. <썸걸즈>는 닐 라뷰트가 2005년 각본을 써서 초연을 올린 작품. 미국에서는 인기 TV 시트콤 <프렌즈>의 '로스' 데이빗 쉬머가 주인공을 맡아서 화제가 되기도 했던 작품이다. 국내에는 뮤지컬 배우 이석준과 베테랑 연극배우 최덕문이 주인공 강진우 역에 더블캐스팅되어 작년에 초연되었다. 올해 앵콜 공연으로 다시 무대를 찾아온 <썸걸즈>는 여배우 중 일부가 바뀌기는 했지만 이석준과 강진우가 그대로 다시 진우 역을 맡는다. 다른 것이 있다면 남자배우들이 그간 유부남이 됐다는 것, 그리고 뮤지컬 <김종욱 찾기>, <오! 당신이 잠든 사이에> 등에서 주연을 맡으며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뮤지컬 배우 전병욱이 7월 3일부터 새로운 강진우로 합류했다는 것이다. 우리말로 상당히 매끄럽게 번역, 각색된 <썸걸즈>는 생생한 구어체 대사를 '맛있게' 주고받는 배우들의 호연 덕택에 "내 주변에 저런 남자, 저런 여자 꼭 하나씩 있지" 싶게 만든다. 기자가 관람한 회차에서 이석준의 강진우는 각각의 여배우와 대사를 주고받는 감각이 상당히 리드미컬하면서도 자연스러워 객석의 자연스러운 웃음을 이끌어내며, 자기과시욕이 강하고 여자들에게 적당한 타이밍에 '불쌍한 모습'을 보일 줄 아는, 그래서 밉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강진우를 '미끈하게' 그려냈다. 하지만 대화가 계속될수록 남녀 모두의 쪼잔함과 상처가 폭로되면서 당연히 나올 법한 신랄한 블랙 유머의 느낌은 다소 둔한 편이다. 15년 전 자신을 버리게 만든 그 여자가 누구였는지 집요하게 따져묻는 첫사랑 양선은 충분히 이해받고 감정이입될 수 있는 캐릭터임에도 다소 단순하고 우스꽝스럽게만 묘사된 감이 있다. 연극이 진행될수록 각 캐릭터들이 드러내는 상처와 이 속에 들어있는 처절함과 치졸함과 억울함과 뻔뻔함은 관객들 각자 얼굴을 붉히며 찔려 할 면들을 매우 통렬하게 끄집어내고 폭로하지만, 이것이 막판으로 갈수록 물기나 유머가 전혀 없이 처절한 악다구니의 형태로만 가는 것도 아쉬운 부분이다.
썸걸즈
그러나 <썸걸즈>는 이기적인 '나쁜 남자'와 알면서도 속아주고 상처받을 수밖에 없는 여자들의 연애 관계가 실은 어떤 권력관계의 기반 위에 서 있는지, 연애 관계를 통해 사랑이라는 환상을 한쪽이 일방적으로 착취한 결과가 상대에게 어떤 식의 상처로 남는지를 매우 잘 보여주는 흥미로운 연극이다. 나아가 인간이란 존재가 빛 좋은 말잔치 뒤에 어떤 치졸한 본성을 숨기고 있는지, 사랑이라는 달콤한 마취약이 실은 어떤 섬뜩하고 고통스러운 가시를 품고 있는지 통렬하게 폭로한다. 4월 11일 오픈해 애초 8월 중순까지 공연될 예정이었던 이 연극은 입소문에 따른 인기에 힘입어 현재 대학로설치극장 정미소에서 오픈런으로 공연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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