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혁명은, 그래서 혁명이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혁명은, 그래서 혁명이다"

손문상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ㆍ<23> 쿠바 산따끌라라

3뻬소짜리 백동전을 하나 꺼낸다.

"20쎄우쎄만 주세요."

"20쎄우쎄요?"

"네, 저에겐 딸린 동생이 다섯이나 된답니다. 이 아이들을 먹여야 해요."

"모든 이들이 이 동전을 원하지 않나요?"

동전 앞면에는 체 게바라의 얼굴이 다소 투박하게 새겨져 있다. 그리고 체 게바라의 머리 위에 새겨진 글귀 '조국이 아니면 죽음을(PARTRIA O MUERTE)'.

이제는 지루하게 흘러가고 있는 혁명의 한 복판에서 3뻬소짜리 동전을 500뻬소(1쎄우쎄는 25뻬소 나시오날이다.)에 팔고 있는 이 헤진 옷의 쿠바 청년을 보고 든 생각. '악화가 양화를 몰아낸다'는게 아니라 체 게바라가 3뻬소 동전을 몰아내고 있는 새로운 경제 현상?

여하튼 3뻬소짜리 동전이나 지폐는 쿠바에서도 드문 편이다. 체 게바라는 3뻬소를 단박에 500뻬소로 만들어버리는 힘이 있다. 괜히 쿠바중앙은행 총재를 지낸 게 아니다. 무디스나 스탠다드 푸어스의 신용정보 시스템에 접속해도 이만큼 체 게바라의 신용도를 확증해 주긴 힘들 것이다. (물론 대부분 동전을 사지 않지만, 이런 청년들이 꽤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 누군가는 사기도 하는 모양이다.)

체 게바라는 죽어서도 쿠바 인들의 영웅이자, 연인이며, 동시에 강인하고 따뜻한 사령관이다. 간혹은 앞서의 사건처럼 세계 최고의 신용을 담보하는 중앙은행 총재로 부활하기도 한다.

쿠바가 독자적인 경제 체제를 포기하고 관광산업을 외화벌이의 수단으로 결정한 후, 체 게바라는 카리브해, 살사, 담배, 럼, 그리고 헤밍웨이와 함께 중요한 관광 수입원 중 하나가 되었다.

그는 68혁명의 기억을 훈장처럼 달고 다니는 서양의 허영심 많은 전후세대의 감성을 자극한다. 그들이 꿈꿨던 평등한 세상은 오지 않았다.

이제 세계 경제를 이끌어가는 주역이 되었으므로 쿠바와 체 게바라는 심적 위안을 주는 '우상'으로 변모해 버렸는지도 모른다. 고로 이들에게 체 게바라는 '인간극장'의 주인공쯤 될 것이다.

1958년 12월 29일 쿠바 혁명의 완성(혹은 적어도 그렇게 보였을)을 사흘 남겨두었다는 사실을 조심스레 인정하기 시작한 체 게바라의 부대는 산따끌라라(Santa Clara)가 완전히 혁명군의 수중에 놓였음을 확신하고 아바나로 진격했다.

쿠바를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은 사건이었다. 이후의 일들은 인터넷에서 구할 수 있는 모든 연대기적 사실들이 말해줄 것이다.
▲ 익숙한 자동차들이 많이 보인다. 아바나 시내를 빠져나오며. ⓒ손문상

산따끌라라는 체 게바라의 도시다. 혁명의 전기를 마련한 전투가 있었고, 전투를 지휘한 사령부가 있으며 후에 볼리비아에서 돌려받은 체 게바라의 유해가 안장된 기념탑과 무덤이 있는 곳이다. 물리적인 공간으로 보자면 혁명의 시작인 시에라 마에스뜨라와 정점이었던 아바나, 그 사이에 위치해 있다. 쿠바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장소인 것이다.

동시에 아르헨띠나의 알따그라시아에서 시작된 젊은 날의 여정이 절정을 이루는 곳 역시 이역만리 떨어진 이 곳, 쿠바의 산따끌라라다. 이 드라마틱한 곳을 방문하기 위해 우리는 드라마틱한 렌트카 여행을 시작했다.

렌트카는 우리에게 익숙한, 아토스. 국영 렌트카 사무소인 쿠바카(Cuba Car)에서 200쎄우쎄의 보증금을 내고, 하루에 55쎄우쎄를 친다. 휘발유는 옥탄값 90 이상만 넣도록 되어 있다. 사실 기름이야 아무거나 넣어도 상관없잖아, 라고 생각한다면 별수 없지만, 엑셀을 밟을 때 전해오는 파워는 분명 기름의 질과 관련이 있다. 차가 왠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는 말이다.
▲ 피규어 같은 낡은 미국제 자동차들은 어느새 쿠바의 이미지가 되어 버렸다. ⓒ손문상

자 이제 도로로 나서 볼까? 쿠바에 없는 대표적인 두 가지가 외계인과 도로표지판이다. 방향을 나타내는 표지판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발견하기가 어렵다. 다만 거리를 나타내는 표지판이 있는데, 이 표지판을 보고 현 위치와 목적지까지의 거리를 가늠할 수 있는 방법은 따로 익혀야 한다.

표지판이 필요한 사람들은 물론 관광객들뿐일 것이다. 쿠바에 놓인 도로란 게 대개 뻔해서, 기준점이 되는 한 지역에서 다음 지역까지 갈 수 있는 길은 딱 하나 뿐이기 때문이다. 많은 길은 필요 없다. 마치 쿠바의 역사처럼. 사정이 이렇다보니 고속도로(Autopista)를 타기위해 아바나 시내를 빠져나가는 것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그나마 말레꼰 해안 도로는 우리에게 이미 익숙해 있어서, 아바나 시가지를 빠져나오는 것 자체는 무리가 없었다.
▲ 낡은 시보레 자동차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손문상

하지만 문제는 지금부터. 초행자가 아우또피스따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옵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지도를 해석하거나,(말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 사람들에게 묻거나. 전자의 방법은 일반적으로 초보에게 널리 추천되지 않는다. 도로에 익숙해져야 하고 지도를 보는 방법을 습득해야 하는데, 길눈 밝은 베테랑 운전자라도 감을 믿고 가다가는 길을 잘못 들기 십상이다.

전에 말했듯, 모든 길은 '하나'뿐이라 한번 엇나가면 고스란히 온길을 다시 돌아와야 한다. '지도야 뻔한 거 아냐? 그림으로 감 잡아서 때려 맞추면 되는걸 뭐...' 라고 생각했다가는 큰 코 다친다. 다시 말하지만 '표지판'이란 게 없다.

예를 들어 지도에 표시된 대로라면 고속도로에 진입하기 위한 포인트를 잡기 위해 일단 철길을 두 군데 지나쳐야 한다. 문제는 우리가 본 철길이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 감을 믿었던 우린 처음 지나친 철길 다음에 나와야 할 두 번째 철길을 발견하지 못한 채 한참을 달렸다. 결국 지나쳐왔다는 결론을 내리고 남을 만큼 충분히 가속기를 밟고 있었을 때, 길을 묻기 위해 지나가는 택시를 잡았다. 고속도로로 진입하는 A 국도를 찾고 싶다고 말했더니, 이 친구들, 자기네 차를 따라오란다. 결국 차를 돌려 온 길을 더듬어 갔다.

그 때 철길 발견. 알고 보니 언덕을 넘으면서 언덕 밑으로 난 터널과 철길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건널목'만 생각했던 우리의 불찰이었다.

즉, 두 가지 옵션을 모두 테이블에 올려놓아야 한다. 물론 처음 사람들에게 길을 물을 때는 망설이기도 했다. 길을 묻기 위해 차창을 열면 상대가 먼저 자기 목적지를 외쳤기 때문이었다.
▲ 도로 주변엔 언제나 히치하이킹을 하는 이들이 있다. ⓒ손문상

사람들은 히치하이킹을 하기 위해 길가 여기저기에 삼삼오오 모여 있다. 가끔 경찰이나 노란 옷을 입은 공무원들이 주위에 서서 직접 차를 잡아주기도 한다. 대중교통과 에너지가 부족한 쿠바의 실상을 보여주는 사례다. 하지만 아무나 태울 수 없는 일이다. 간혹은 멋진 여성이 허름한 포대 자루를 무겁게 들고 히치하이킹을 하는데, 운전자의 안전운행에 심각한 방해가 되기도 한다. (잊지 않았겠지만, 이 글은 '수컷들'의 여행기다.)

이런 국가 장려의 카풀제도는 색다른 풍경이긴 했지만, 운송 수단과 에너지가 부족한 쿠바의 현실이 처량하게 느껴지진 않는다. 이들에겐 많은 운송 수단이 필요하지 않다. 지역에 근거해서 자급자족하며, 수십 킬로미터 반경 안에서 직장 생활이 이루어진다. 뜸하지만 지역 버스도 다닌다. 때로 도로 갓길을 걸어 다니는 사람들도 많다.

인구 1200만여 명의 쿠바인들이 쓸 생필품을 비롯, 여타 상품의 운송문제 역시 도로 하나면 족할 정도로 유통량이 많지 않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여유'다. 도로가에 서서 잡을 수 있는 보장도 없이 히치하이킹을 하는 이들의 얼굴에는 조급함 따위를 찾아볼 수 없다.

간혹 급한 사람들은 지폐(물론 뻬소 나시오날이다.)를 손에 쥐고 마주 오는 차 앞에 나와 흔들어대는 과감함을 보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냥 도로 주변에 잡담을 나누며 앉아 있다.
▲ 고속도로라도 상관없다. 도로에는 가끔 직접 가꾼 생산물을 파는 시민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나와 있는 모습도 보인다. ⓒ손문상

그러나 이런 풍경도 쿠바 유일의 고속도로에 진입하면 사정이 조금 달라진다. 고속도로의 특성상 히치하이킹을 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있다면, 중간의 휴게소나 주유소 앞에서 기다리는 정도.

고속도로라고는 하지만 특별한 통제도 없다. 중간에 길이 나오면 속도를 줄여 빠져나갈 수도 있고, 도로 주변에 마차나 달구지가 지나가기도 한다. 도로 상태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좋았다. 지나다니는 차도 별로 많지 않고. 당신이 스피드 광이라면 한번 도전해 볼만 하다. 다만 앞서 말했듯, 달구지와 마차, 그리고 갑자기 속도를 줄이는 차를 조심한다는 전제 하에 말이다.
▲ 여기, 고속도로 맞다. 아바나 시내에서 마차는 관광객 대상의 '서비스'지만 지방에서 마차는 중요한 교통수단이다. ⓒ손문상

우여곡절 끝에 고속도로에 진입. 우리는 드디어 깨달음을 얻었고, 지도를 펼친 채 세상 어떤 학자보다도 진지한 표정으로 연구에 돌입했다. 도로에는 표식이 될 만한 지점, 이를테면 작은 마을이나 주유소 등을 기점으로 촘촘히 점이 찍혀 있는데, 점과 점 사이에 킬로미터를 단위로 하는 숫자가 써 있다.

쿠바의 지도는 '보는 것'이 아니라 '계산하는 것'이다. 수치와 거리감을 가지고 대략 현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다행히 고속도로엔(물론 고속도로에서만) 1 킬로미터 간격마다, 현재 아바나에서 얼마나 멀어지고 있는 지 알 수 있도록 표지판이 서 있었다. 그리고 지나치는 주유소와 도로변 식당, 마을 표지판을 유념해서 봐야 현 위치를 대략 가늠할 수 있다.

막상 아바나 시내를 빠져나오자 주변은 한산한 시골의 경치로 바뀌었다. 야자수가 듬성듬성 박혀 머리채를 흔들어대고 있는 사탕수수 밭이 넓게 펼쳐지다가, 갑자기 숲이 나온다.
▲ '설탕 회사'인 '9월 5일(5 de Septiembre)' 선전물. ⓒ손문상

간혹 설탕공장의 굴뚝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광경도 볼 수 있다. 듬성듬성 구식, 혹은 신식 자동차들과 커다란 화물트럭이 눈에 띠는 평화로운 고속도로를 지나고 있자면 시커먼 연기를 내는 낡은 버스들도, 그 안에 탑승한 사람들의 모습도 정겨워 보인다.

이러한 삶의 틈에서 도로는 혁명의 전시장이기도 하다. 체 게바라 입간판을 발견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 매캐한 연기를 뿜어대는 버스를 보는 것도 쉬운 일이다. ⓒ손문상

▲ 도로 중간중간에서 설탕 공장을 발견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손문상

▲ 피델과 함께 혁명을. ⓒ손문상

▲체 게바라 역시 훌륭한 선전물이다. '역경과 장벽을 넘은 승리자 - 피델'. ⓒ손문상

간혹 남미 해방의 영웅이자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가장 존경한다는 시몬 볼리바르, 그리고 쿠바 독립의 영웅인 호세 마르띠가 나란히 등장하는 선전물도 눈에 띤다. 알바(ALBA, 미주대륙의 민중을 위한 볼리바리안 대안)를 필두로 하는 양국의 밀월 관계를 보여주는 듯 하다.
▲ 시몬 볼리바르와 호세 마르띠의 시대를 뛰어 넘는, 베네수엘라와 쿠바의 관계를 보여주는 선전물이다. ⓒ손문상

베네수엘라는 석유를 싼 값에 공급하고, 쿠바는 의료진을 파견한다. 쿠바의 의료 수준은 세계 최고라고 한다. 물론 겪어보진 않았지만. 쿠바는 베네수엘라 뿐 아니라 남미, 아프리카 등지의 97개 국가에 약 10만 명의 의료진을 파견하고 있다.

4시간 정도를 달려 산따끌라라에 도착했다. 밤이었고, 비가 내렸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시내로 들어오는 초입에 있는 '에르네스또 체 게바라 사령관의 기념비와 묘지(El Complejo Escultórico Memorial Comandante Ernesto Che Guevara, 이하 엘 꼼쁠레호, El Complejo)'에 잠깐 들렀다. 사진으로 익숙하게 보던 동상이지만 밤에 보는 것은 분위기가 또 다르다.
▲ 체 게바라의 기념비와 묘지가 있는 산따 끌라라(Santa Clara) 시내의 엘 꼼쁠레호(El Complejo). ⓒ손문상

▲ 밤에 본 체 게바라 기념비. ⓒ손문상

공군 휴가복 비슷한 유니폼을 입은 관리인 청년이 우리에게 다가와, 아침 8시부터 저녁 5시까지라며 박물관의 개장과 폐장 시간을 알려주었다. 우린 답례로 사탕과 초콜릿을 주었는데, 매우 좋아했다. 몇 개는 주머니에 넣더니 식구들에게 가져다 줄 것이라고 말했다. 의외로 쿠바인들은 어른이나 아이나 사탕과 초콜릿을 좋아한다.

차를 타고 시내로 접어들었다. 일단 아르마스 광장 주변에 있는 까사 빠르띠꿀라르를 알아볼 생각이었다. 그 때, 자전거를 탄 청년 하나가 죽이는 숙소가 있다고 우릴 꼬였다. 짧은 쿠바 체류 기간이었지만, 뭐든 삐끼를 따라가는 게 가장 좋은 방법임을 알고 있던 우리는 그 친구를 따라가기로 했다. 우리가 지나온 여행지들과는 사뭇 다르다. 숙박비를 속이거나 무리한 팁을 절대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는 중앙 광장에서 꽤 떨어진 곳이라는 점 외에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숙소를 잡았다. 그리고 삐끼는 사실 이 집 아들이었다. 이런 식의 호객 행위는 명백히 허가되지 않은 방식이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중앙 광장에서 멀리 떨어진 이 곳까지 굳이 찾아 올 관광객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었다.

아바나에서와 달리 가격은 침대 두개 딸린 방이 25쎄우쎄. 먼 길을 달려와 배가 고픈 우리는 내친 김에 이 친구에게 식당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다. 열 시가 다 된 시간에 문을 연 식당은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비쌌지만 꽤 괜찮은 식당에서 고기와 해산물(이라고 해봤자 새우볶음에 약간 맵고 달짝지근한 소스를 끼얹은 것이다), 그리고 맥주를 마실 수 있었다.

숙소로 돌아온 우리는 낮에 주유소에 들러 사왔던 럼 술의 전설, '하바나 클럽'을 땄다. 아주머니에게 염치 불구하고 안주 부탁을 하니, 튀긴 바나나와 치즈, 그리고 토마토를 조금 내 오셨다. 이런 송구할 데가... 그러면서 조심스레 우리에게 묻는다.

"내일 아침 식사는 하실 건가요?"

"네, 아침 식사가 나오나요?"

"그럼요, 일인당 3 쎄우쎄를 주시면 빵과 햄, 계란, 버터, 그리고 주스와 커피, 우유 등이 준비된 아침식사를 준비해 드리죠."

"아메리카식이군요."

"호호호, 그렇죠. 미국식 아침식사랍니다."

"네, 준비해 주세요."

엄연히 불법이다. 식당을 겸하지 않는 이 까사 빠르띠꿀라르에서 먹는 아침식사로 지불할 6쎄우쎄는 말하자면, 주인의 '아르바이트'쯤 되는 것이다. 우리가 지불하는 숙박비에는 50%이상 세금이 붙는다.
▲ UBPC는 일종의 협동조합이다. 국가 위주의 계획 생산 시스템에서 느슨하지만 자율적인 형태의 협동조합 설립은 결과적으로 쿠바의 식량난을 해소한 일등 공신이었다고 한다. ⓒ손문상

하지만 특별히 수입을 신고하는 절차는 없다. 다만 숙박 기록부를 꼼꼼하게 작성하는데, 까사 빠르띠꿀라르를 관리하는 공무원들이 하루에 한 번씩 들러 전 날 누가, 몇 명이 묵었는지 확인하게 된다. 국가가 세금 징수 관리에 세세하게 관여 하는 것이다. 그 와중에서 사적으로 돈을 받고 제공하는 아침 식사는 이들에게 중요한 수입원이다. 우리는 아주머니의 정성이 들어간 술안주와 얼음까지 채운 잔을 보너스로 받아들며 아침 식사를 주문했다. 아주머니는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나갔다.

아침에 일어나니 과연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신선한 빵과 치즈, 그리고 방금 갈아 만든 과일 주스와 따뜻한 커피로 든든히 배를 채웠다. 우리가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던 아주머니와 할머니는 우리에게 행선지를 물었다.

"시에라 마에스뜨라(Sierra Maestra)까지 갈 겁니다."

우리는 비장한 각오나 한 듯 자신 있게 말했는데,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일단 시에라 마에스뜨라는 오늘 중으로 들어가기 힘들다는 것이다. 471 킬로미터면, 5시간 정도로 주파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지 않단다. 길이 좀 험한 게 아니라서 무려 8시간 정도는 넉넉히 잡아야 한다는 거리다. 아주머니는 우리가 산따 끌라라에서 가까운 트리니다드(Trinidad)처럼 멋진 해변가에서 카리브의 환상적인 경치와 함께 시가를 물고 살사를 즐길 것으로 생각했나보다. 그것도 물론 좋은 계획이긴 하다. 허나 우리는 시에라 마에스뜨라에 가기 위해 아르헨띠나에서부터 산 넘고 물 건너 바다 건너서 달려온 몸.

몸이 부서지는 것도 불사할 것 같은 우리 표정을 본 아주머니는 주소와 전화번호가 잔뜩 쓰인 노트를 들고 온다. "시에라 마에스뜨라까지는 여덟 시간 정도 걸려요. 그리고 시에라 마에스뜨라 산 속에 있는 피델의 꼬만단시아 데 라 쁠라따(Comandancia De La Plata)에 들어가기 전에 우선 '바야모(Bayamo)'에서 하루 묵어야 할 거예요. 바야모에 제가 아는 까사 빠르띠꿀라르가 있거든요. 그 곳에 가시면 숙소 찾느라 시간을 허비할 일 없을 겁니다."

빽빽이 적힌 주소록 한 곳에 바야모의 주소와 전화번호가 적혀있다. "이 곳에 가서 산따 끌라라의 미르따(Mirta)가 소개시켜주었다고 말씀하시면 알 겁니다. 제가 전화해 둘게요."

이런 풍습은 19세기 풍 유럽 소설들에서 본 것 같다. 소설 속 여행자는 하숙집 주인이 써 준 소개장을 들고 또 다시 낯 선 도시로 떠난다. 그 곳에서 사람을 만나고, 사랑을 하고, 어쩌고저쩌고... 지금은 21세기니까 소개장 대신 전화다. 요즘 세상에 누가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의 숙소를 소개해 줄까? 쿠바니까 가능한 이야기일 것이다.

"다음 일정은 어디죠? 산띠아고?" 하지만 빡빡한 일정 탓에 산띠아고까지 들를 수 있을 지는 의문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역시 미르따 씨가 소개해 준 산띠아고 까사 빠르띠꿀라르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받아 두었다.

이런 일들이 일상적인 것을 보니, 쿠바는 여전히 안면사회다. 될 수 있으면 자기가 아는 곳을 소개해주고 싶어 하고, 또 그렇게 소개 받은 이들은 산따 끌라라로 가는 여행객들에게 이 곳을 소개해 줄 것이다. 묘한 상부상조다.
▲우리가 묵었던 산따 끌라라의 호스텔 주인 할머니, 젊은 시절 체 게바라는 그의 연인이자 멋진 사령관이었다. ⓒ손문상

미르따 씨의 시어머니인 일흔 두 살의 할머니는 스물 셋에 혁명을 겪었다고 말했다. 체 게바라를 보신 적이 있냐고 물었다.

"오, 엘 체!(El Che), 많이 봤지. 내 남편이 혁명정부의 공무원으로 일했거든. 체 게바라와 함께 일을 한 거야. 너무 멋진 사람이야."

우리는 내친김에 할머니에게 체 게바라가 산따 끌라라에 입성하는 장면을 보셨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당시 할머니는 산따 끌라라에 살고 있지 않았고, 혁명 이후에야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를 왔단다.

하지만 체 게바라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할머니의 눈은 반짝거렸다. "쿠바인들은 모두 체 게바라를 사랑하지, 암, 그렇고 말고."

체 게바라는 이 할머니에게 영원한 젊은 연인인 것 같았다. 하지만 체 게바라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표정이 굳어졌다. 입술이 떨렸다. "미국인들이... 미국인들이 죽였어. 엘 체를..."
▲ 산따 끌라라의 아침 풍경. ⓒ손문상

▲ 산따 끌라라 시내, 하교길의 교복 입은 아이들. ⓒ손문상

체 게바라의 또 다른 '유적지'인 뜨렌 블린다도(Toma del Tren Blindado)와 로마 델 까피로(Loma del Capiro)에 들르기 위해 일찍 나섰다.

뜨렌 블린다도는 기찻길 옆의 공터에 있는 작은 박물관이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니 한 꼬마가 우리에게 다가와 뭐라고 말한다. 다른 이야기는 모르겠지만 자꾸 '원 달러'를 외치는 걸 보니 돈을 달라고 하는 것 같았다.

잠깐 고민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건장한 청년 하나가 와서 유창한 영어로 말을 건다. "이 꼬마가 당신의 차를 지켜 줄 테니 사례로 1달러를 달라고 하는군요."

우리에게 오자마자 망설임 없이 대뜸 아이의 말을 통역해주는 걸 보니 둘이 한패인 것 같았다. 우리는 꼬마와 거래를 성사시킨 후, 우리 차가 너무나 잘 보이는 '공터'에 있는 야외 박물관을 안심하고 돌아다니기로 한다.
▲ 뜨렌 블린다도 박물관 전경, 비죽비죽한 조형물은 폭격을 형상화한 것이란다. ⓒ손문상

▲ 산따 끌라라 전투 당시의 사진. ⓒ손문상

시에라 마에스뜨라의 '산채'를 빠져나온 '산적' 체 게바라는 주민들의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어 큰 어려움 없이 산따 끌라라에 입성한다. 이 때, 바띠스따 정부군이 400여명의 병력을 기차에 태운 채 이 곳 산따 끌라라로 향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체 게바라는 결정을 내린다.

'기차를 통째로 뒤집어버리자.' 1958년 12월 29일, 쿠바의 '불도저' 형님, 결국 기차를 뒤집고 화염병과 몇 정의 총, 그리고 시민들의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은 체 게바라 부대는 역사적인 쿠바 혁명의 주인공이 된다.

허술해 보이는 작전에는 치밀한 계산이 숨어 있었다. 체 게바라에게 중요한 것은 이미 정부군과의 교전이 아니었다. 구체제가 썰물처럼 물러난 자리를 메울 새 시스템을 적용하고, 혁명 정부의 첫 화폐를 발행함으로써 시민들의 패닉을 예방했다.

체 게바라는 이미 새로운 사회의 도래를 짐작하고 있었다. 1933년 쿠데타로 권력을 쥔 바띠스따의 공중누각이 힘없이 무너지는 장면이기도 했다. 그들이 근본 없는 '산적'이 아니라 '혁명군'임을 증명해주는 조치들이었다.
▲ 혁명은 처음으로 이 곳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정부군과의 격전지이자, 체 게바라에게 승리를 안겨주었던 곳, 산따 끌라라의 혁명 유적지, 뜨렌 블린다도(Tren Blindado). ⓒ손문상

▲ 이제 기차를 뒤집을 일 따윈 없을 것이다. 기차는 여전히 다닌다. ⓒ손문상

▲ 뜨렌 블린다도 기념비. ⓒ손문상

▲ 당시 전투에서 기차를 전복시키는 데 사용된 불도저가 전시되어 있다. ⓒ손문상

▲ 화염병이 박물관으로? 캐나다 제 맥주병으로 만든 화염병. ⓒ손문상

▲ 당시 사용됐던 무기도 전시되어 있다. ⓒ손문상

▲ 체 게바라가 지냈던 임시 숙소. 차분하고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손문상

차를 지켜주긴 뭘 지켜? 우리는 뜨렌 블린다도 박물관을 돌아다니며 아주 '잘' 보이는 곳에 주차어 있는 렌트카와 꼬마를 지켜볼 수 있었다. 꼬마는 이미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옆에 주차된 화물차 운전수와 신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게 보였다. 우린 꼬마에게 다가가 1쎄우쎄 짜리 동전을 쥐어주었다. 꼬마는 우리 얼굴을 힐끗 보더니 금세 사라져버렸다.

뜨렌 빌린다도를 나와 로마 델 까피로로 가는 길에서 지역 위원회 건물(Comitie Provincial) 앞에 서 있는 신기한 동상을 발견했다. 워낙 지천에 체 게바라가 널려있는지라 하마터면 그냥 지나칠 뻔 했지만, 이 동상은 조금 특별했다.
▲ 체 게바라 동상이 있는 산따 끌라라 지역 위원회 건물 ⓒ손문상

체 게바라 바지 밑단의 주름위에 새끼손톱만한 사나이가 오토바이를 타고 간다. 건빵주머니 위엔 군인들이 행군을 하고 있었고, 겨드랑이에 난 창에선 한 여자아이가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 체 게바라의 머리카락에는 해먹이 매달려 있고, 그 안에 한 사람이 누워 쉬고 있다. 허리춤의 버클에서 나온 수많은 사람들이 팔짱에 팔짱을 끼고 덩어리가 되어 서 있다. 시가를 들고 있는 손 등에는 핏줄이 힘차게 튀어나와 있었다.

체 게바라의 삶이 거기에 서 있었다. 우린 멋대로 이 동상에 이름을 붙였다. '이야기가 된 사나이' 팀 버튼 감독의 영화 '빅 피쉬'에 나오는 카피 문구를 훔쳐내긴 했지만, 이보다 더 동상에 잘 어울리는 이름은 없을 거였다.
▲ 산따 끌라라 지역 위원회(Comite Provincial) 앞에 있었던 '이야기가 된 사나이' 체 게바라 동상. ⓒ손문상

▲ 정교한 디테일과 아기자기한 아이디어가 만나 탄생한 동상이었다. ⓒ손문상

▲ 버클을 뚫고 나온 인간 띠. ⓒ프레시안

▲ 시가를 쥐고 있는 힘찬 손. ⓒ손문상

▲ 옆구리엔 창을 열고 웅크린 사람이 ⓒ손문상

▲ 전투화 위엔 오토바이를 탄 작은 사내가. 그렇다. 이 것이 이야기의 시작이다. ⓒ손문상

▲ 건빵 주머니엔 험준한 시에라 마에스뜨라(Sierra Maestra)를 오르는 병사들이 ⓒ손문상

▲ 다른 쪽 옆구리엔 창을 열고 밖을 내다 보는 여자아이 ⓒ손문상

▲ 머리카락엔 해먹을 치고 오수를 즐기는 사내가 ⓒ손문상

▲ 무엇이 영원할까? ⓒ손문상

▲ 군복 주름을 타고 행군하는 군인들도 ⓒ손문상

▲ 중간에 낮잠 자는 사내는 체 게바라의 오래된 사진속 포즈와도 닮았다. ⓒ손문상

▲ 제작 연도와 조각가의 이름일까? ⓒ손문상

▲ 태양 아래 말을 탄 체 게바라는 가슴에 자리잡았다. ⓒ손문상

▲ 체 게바라의 품에 안긴 아이의 손 위엔 쇠사슬에 엉킨 사람들이 ⓒ손문상

로마 델 까피로(Loma del Capiro)는 체 게바라의 임시 사령부가 있던 곳이다. 체 게바라의 사령부는 산따 끌라라 시내가 훤히 보이는 야트막한 산 정상에 자리하고 있었다. 소박한 조형물 속에 체 게바라의 얼굴이 있었다.

깔끔한 반바지에 폴로 티셔츠 차림의 나이 든 백인 관광객들이 잡담을 나누며 조형물 주위에서 사진을 찍었다. 아마 저 정도 또래였을 것이다. 체 게바라가 죽은 다음해에 온통 거리로 쏟아져 나온 이른바 '68 세대'가.
▲ 로마 델 까삐로(Loma Del Capiro)는 산따 끌라라 전투를 위한 체 게바라의 사령부가 있던 곳이며, 역시 유적지로 관리되고 있다. ⓒ손문상

▲ 로마 델 까삐로에서 내려다 본 산따 끌라라 시내. ⓒ손문상

▲ 로마 델 까삐로에서 우리 가이드를 맡아 주었던 할아버지. ⓒ손문상

▲ 체 게바라 '꼬만단시아(Comandancia, 사령부)' 기념비. ⓒ손문상

체 게바라의 기념비이자 묘지인 '엘 꼼쁠레호'에 다시 들렀다. 머리가 하얗게 센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유독 많았다. 커다란 관광버스를 타고 온 이들 백인 관광객들은 체 게바라 동상과 카메라 렌즈 사이에 끼어 웃음을 지어보이곤 했다.
▲ 저 또래일 것이다. 체 게바라에 열광한 서구의 68세대가. ⓒ손문상

▲ 기념품은 대부분 조악하다. 그래도 누군가는 이 조악한 기념품을 사고, 만족을 느끼고, 선물을 할 것이다. ⓒ손문상

체 게바라 박물관은 기념상 아래층에 자리하고 있는데, 사진 촬영은 금지되어 있을 뿐 아니라 사진기를 아예 안내 센터에 맡기고 들어가야 했다.

체 게바라와 볼리비아에서의 마지막 혁명 동지 28인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는 기념관은 박물관의 맞은편에 있다. 들어가기 전에 모자를 벗으라는 안내인의 말을 들었다. 모두들 모자를 손에 들고 조심스레 발을 들였다. 볼리비아 정글에서 활동하다 목숨을 잃은 동료들과 함께 체 게바라 얼굴이 음각된 채 벽에 붙어 있었다.
▲ 다시 찾은 엘 꼼쁠레호. ⓒ손문상

▲ 왜 체 게바라 기념비와 묘지를 찾는 이는 전부 노인들뿐일까? ⓒ손문상

죽은 이들은 쿠바에서 영웅이 되었다. 다만 살아남은 이들은 영웅이 되길 거부했다. 그것이 스탈린이나 김일성의 사례와 같은 '우상화'의 함정을 피하기 위한 '전략적' 측면에서인지 잘은 모르겠다.

피델은 그런 면에서 철저하다. 피델의 사진이 걸려 있는 집도 드물게 있지만 대부분 파안대소하는 모습이나, 시가를 물고 있는 등, 일상적인 스냅샷 들이다.

이와 반대로 죽은 체 게바라가 쿠바에서 부활하는 형태에는 일종의 종교적 색채마저도 감돈다. 흠결이 없는 체 게바라의 이미지 뒤에 선 피델 카스뜨로의 이미지는 어느새 게바라의 이미지와 중첩되는 것이다.

피델은 그런 면에서 영악하다. 하긴, 우상화는 어디에나 있다. 공산주의 국가의 우상에 반대되는 '히틀러'나 '무솔리니' 같은 방식의 숭배는 이제 낡았을 뿐이다. 서구 자본주의 국가에서 추앙 받는 수많은 세련된 우상들을 보라. 록펠러나 빌 게이츠는 자본주의 사회의 아이콘이자 '우상'에 다름 아니다.
▲ 1953년 7월 26일 피델과 함께 몬까다 병영(Cuartel Moncada) 습격을 주도했던 인물들. 결국 이 사건, 그리고 이 인물들은 쿠바 혁명의 시금석이 되었다. ⓒ손문상

물론 남미 여러 나라에서 체 게바라는 작금의 쿠바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사실상 '정치적 아이콘'으로써 말이다.

베네수엘라에서 체 게바라가 시몬 볼리바르와 동급이 되어 벽에 덕지덕지 나붙는 것처럼, 아르헨띠나 학생들이 '젊은이여 일어나라'라고 외치며 체 게바라 얼굴이 새겨진 피켓을 드는 것처럼 말이다.

68년도의 체 게바라와는 다르지만, 남미에서 체 게바라의 얼굴은 정치적 의미로 기능한다. 물론 체 게바라의 '혁명론'은 이들에게 중요치 않다. 체 게바라는 미국에 대항한 라틴아메리카인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었다.

베네수엘라는 조금 다르다. 체 게바라의 '인성 혁명'론과 차베스의 '인성 혁명'론은 많이 닮아있다. 혁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제도적 틀과 사상적 기반을 바꾸는 것만으로 부족하다. '사회주의적 인간'이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차베스 대통령은 체 게바라의 사상을 21세기 사회주의가 나아갈 지표로 삼은 최초의 남미 대통령이다. 체 게바라는 머그컵이나 티셔츠 뿐 아니라, 피켓, 혹은 교실에서도 아직 살아있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우습게 보일 수도 있다. 21세기에 혁명이라니, 낭만적이야. 순진한 사람들 같으니라고...

하지만 인류 역사상 어떤 누구도 혁명이 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지 않았다. 혁명은, 그래서 혁명이다.

('산따끌라라' 대신 '산타클라라', '아르헨띠나' 대신 '아르헨티나' 등으로 적는 게 바른 표기법이지만, 여행기라는 특성을 고려해 현지 발음에 최대한 가깝게 적었습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