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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식 경영'은 세계화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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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삼성 식 경영'은 세계화될 수 없다"

[화제의 책] <아시아로 간 삼성>

과장 시절부터 그를 지켜봤는데, 어느새 전무가 됐다. 나이를 먹었지만, 세련된 외모는 녹슬지 않았다. 화려한 여성 편력도 여전하다. 일본 만화가 히로카네 켄시의 <과장, 시마 코우사쿠>(<시마 과장>) 연작 속 주인공에 관한 이야기다.

'우익의 로망'이 된 '샐러리맨의 로망'

이 만화는 한국에서도 번역돼 큰 인기를 끌었다. 최근에는 <시마 전무>까지 일부 번역됐다. 한국 독자들이 <사원 시마>부터 <시마 사장>까지 한꺼번에 읽게 될 날도 머지않았다.

대기업 사무직 남성들의 '로망'을 잘 묘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이 만화 속 주인공 시마는 이제 더 이상 중간 관리직이 아니다. 이사, 상무를 거쳐 전무가 됐고, 일본어 원작에서는 이미 사장이 됐다.

당연한 일이지만, 해외 시장을 담당하는 임원이 된 시마는 더 이상 '샐러리맨의 애환'에 공감하지 않는다. 대신, '일본 경제의 미래'에 관심을 쏟는다. 그래서인지, <시마 이사>, <시마 상무>, <시마 전무> 속 인물들의 대사에는 일본 사회 주류 보수 진영의 고민이 잘 녹아 있다.

이를테면 만화 속 인물들이 "요즘 일본 학생들의 수학 실력이 너무 엉망이다"라며 걱정하는 대목에서는 '여유 교육'에 대한 일본 보수 세력의 반감이 잘 드러나 있다. 일본 내 혁신 세력은 오래 전부터 지나치게 많은 지식을 암기하도록 강요하는 일본식 교육을 비판해 왔다. 여유 교육은 그래서 나온 대안이다. 학습량을 줄이는 대신 과목 간 경계를 허물어서 종합적인 사고력과 감수성을 키우자는 것. 하지만 일본 재계가 중심에 놓인 보수 세력의 반발로 인해, 아베 정부는 지난 2007년 여유교육 폐지를 선언했다.

또 인도, 중국 등 신흥 시장에서 약진하고 있는 한국 기업에 대해 경계심을 품는 대목도 자주 나온다. 그리고 고령화 사회에 접어든 일본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는 대목도 있다. 중국과 일본 사이의 과거사 문제, 한국과 일본 사이의 독도 문제처럼 민감한 대목에 대해서도 만화 속 인물들은 거침없이 의견을 밝힌다.

이쯤 되면, 이 만화는 대기업 사무직 남성들의 '로망'인 동시에 일본 우익의 '로망'이기도 하다.

중국에 진출한 일본 기업, 파업에도 끄떡없다?…'만화니까'
▲ 임원이 된 시마는 더 이상 '샐러리맨의 애환'에 관심이 없다. 대신, '글로벌 기업'이 된 일본 대기업이 해외 현지 법인을 운영하며 겪는 마찰을 해결하기 위해 분주히 뛰어다닌다. ⓒ프레시안

하지만 '로망'은 결국 '로망'일 뿐이다. 현실과는 아주 멀다. 대기업에서 20년 넘도록 일벌레로 살아온 사람이 시마처럼 세련된 분위기를 풍기기란 쉽지 않다. 직장 생활에서 겪는 위기가 몇 페이지 넘어가기 전에 행운으로 반전되고 10여 페이지마다 한 번씩 새로운 로맨스가 피어나는 상황은 현실에서라면 누구에게라도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하긴, '그러니까 만화지'라며 웃어넘기면 그만이다.

그런데 정말 현실과 동떨어진 묘사에서는 선선히 웃어넘기기가 좀 께름칙하다.

주인공 시마가 이사, 상무 시절 맡았던 일이 중국, 인도 등 아시아 시장을 개척하고 관리하는 것이다.

중국에서 시마는 현지 노동자들이 주도한 파업에 부딪힌다. 이런 파업은 중국과 일본 사이의 불행한 과거사와 맞물려, 더 큰 파장을 낳는다.

하지만 만화 속에서 파업은 금세 끝난다. 시마 주위에 있는 많은 교양 있는 중국인들은 경영진의 편을 들어준다. 또 파업을 주도한 중국 노동자들은 국가 경제의 미래를 읽지 못하는 어리석은 무리로 묘사된다. 그리고 시마는 다시 로맨스로 빠져든다.

역시 만화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중국, 인도, 베트남, 동유럽, 중남미, 아프리카 등에 진출한 선진국 기업이 현지 주민과 노동자들에 큰 상처를 준 사례는 많다. 또 이렇게 생겨난 상처는 고유한 역사적, 문화적 맥락 속에서 다시 헤집어지거나 들쑤셔지곤 했다.

과거 개발연대에 마산, 창원 등에 입주했던 일본 기업의 공장에서 일했던 한국인 노동자들이 겪었던 일이기도 하다.

글로벌 기업의 공통적인 고민…"현지인과의 갈등, 어떻게 풀지"

시마가 일하는 곳은 하츠시바 전산. 한국으로 치면 삼성전자쯤 되는 기업이다. 삼성전자 임원들이 혹시 이 만화를 본다면, 해외 시장에서 승승장구하는 주인공에게 자신을 이입하며 카타르시스를 느낄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만화 속에서도 한국의 삼성전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 기업에 대해 주인공은 대등한 경쟁자로 인정하고 있다. 그래서 하츠시바 전산을 삼성이나 엘지 계열사로 바꿔놓고 만화를 읽어도 어색하지 않다.

그런데, 임원이 된 시마가 중국, 인도, 동남아시아 등에 대해 품고 있는 생각에는 일본 재계의 통념이 그대로 반영돼 있다. 그리고 이런 통념은 현지인들과 마찰을 빚는다. 물론, 만화에서는 이런 마찰이 매끄럽게 해소되지만.

하츠시바 전산을 한국 대기업으로, 주인공을 한국인으로 바꿔놓고 보면 어떨까. 크게 다르지 않을 게다. 일본 재계와 한국 재계의 문화는 큰 차이가 없다. 따라서 시마의 생각과 한국 대기업 임원의 생각 역시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시마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해외로 나간 한국인 임원들도 현지에서 마찰을 겪고 있지 않을까. 그리고 현실은 만화와 다르니까, 이런 마찰은 쉽게 해소되기보다 깊은 상처로 곪아가고 있지 않을까.

"아시아 이웃 국가들에서 한국 기업은 이미 가해자다"

이런 질문에 대해 답을 준비한 사람들이 있다. 지난 10년 동안 해외에 나가 있는 한국 기업에 대한 감시 활동을 해 왔던 국제민주연대 활동가들이다. 이들은 한국 기업들이 해외에서 벌이는 행태에 대한 감시가 절실하다고 이야기한다. '세계 경영' 등의 구호로 마냥 미화만 하기에는 그늘이 너무 짙다는 것.

이들은 "아시아 이웃 국가들의 눈에 한국 기업은 이미 인권침해를 일으키는 가해자의 모습으로 비치고 있었다. 해외 현지 인권 운동가들은 '한국 기업이 다른 아시아 기업에 비해 폭력적·군사적'이라고 평가 한다"라고 설명한다. 한국을 더 이상 '강대국에 수탈당하는 피해자'로만 묘사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이처럼 "우리는 피해자"라는 인식에 갇혀 있는 한, 한국 기업들이 아시아 이웃 국가들 속에서 '가해자'로 통하는 현실을 똑바로 볼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난 세기, 인권 활동가들의 관심사는 주로 국가 권력의 폭력과 횡포를 견제하는데 맞춰져 있었다. 그리고 최근 촛불 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에게 경찰이 연이어 폭력을 휘두른 일에서도 드러나듯, 국가 권력에 대한 감시와 견제는 여전히 절박한 과제다. 하지만 21세기로 접어들면서, 인권 활동가들에게는 새로운 과제가 더 추가됐다.

국제민주연대 활동가들은 "비민주적 정치체제를 가진 나라들에서 이윤 추구에만 주력하는 기업 활동은 노동자들의 상황을 최악으로 만들 뿐만 아니라 종종 독재 권력을 지원하는 역할까지 함으로써 그 나라의 미래 또한 암울하게 만들고 있다"라고 말한다.

한국 기업들, 동남아 군사 정권의 버팀목 구실

이처럼 외국 기업이 독재 권력을 지원해 현지 민주화 운동가들에게 비난을 사는 사례는 흔하다. 버마가 대표적이다. 버마 땅에 묻힌 자원을 개발하는 외국 기업은 버마 군사정권을 지탱하는 든든한 버팀목이다. 물론 기업이 공짜로 정부를 위해 봉사하는 것은 아니다. 군사 정권이 자원 개발에 대한 권리를 이들 기업에게 넘긴 대가다. 초국적 기업과 군사 정권이 공생 관계를 이루고 있는 셈.

그리고, 버마 군사 정권과 결탁한 기업 가운데는 한국 기업도 포함돼 있다. 지난 2005년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니니 르윈 태국 치앙마이대학 초빙교수는 "대우인터내셔널과 한국가스공사가 각각 60%와 10%의 지분을 갖고 있는 버마 '쉐(Shwe)' 가스전과 가스관 사업은 버마 군부 독재정권의 심각한 인권 침해를 방조하는 것"이라며 "이미 군부 독재정권은 쉐 지역 안으로 들어온 어부들의 배를 빼앗은 뒤 고문을 하고, 대우인터내셔널의 빌딩을 짓기 위해 숲을 제거하는 데 주민을 강제로 동원한 뒤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등 심각한 인권 침해가 벌어지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한국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하에 진행되고 있는 대우인터내셔널의 천연가스 개발 사업은 버마 국민들에게 이익이 돌아가지 않고 결국 버마 군사 독재정권을 돕는 결과로 귀결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 버마 군사정권과 한국 기업
- '버마 민주화' 요구 앞에 부끄러운 한국

"버마를 '겁 많은 한국'처럼 만들고 싶지 않아요"
"한국, '민주주의'를 말할 자격이 있는가"
한 고교생의 '버마민주화 프로젝트' 분투기
대우인터내셔널, 방산물자 버마 불법수출 의혹
"우리는 '80년 광주' 기억하는데 한국은 다 잊었나"
"해방 60년…이제는 '가해자'의 길 걸으려나?"
버마, 대우인터내셔널 가스 개발 현장을 가다
아웅산 수지 환갑 맞아 버마 국경을 가다
"대우의 버마 가스개발, 군부 만행속 진행돼"

대우인터내셔널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 기업들은 1968년 처음 해외 투자를 시작한 이래, 현재 150여 국가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가장 많은 투자가 이뤄진 지역은 아시아다.

첼시 유니폼에 박힌 삼성 로고는 한국인의 자랑?

한국 기업에도 수많은 '시마'들이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들은 아시아 곳곳에서 현지인들과 때로 협력하고, 때로 갈등한다. 만화 주인공 '시마'가 경쟁상대로 여기며 신경을 곤두세우는 한국 기업인 삼성의 경우는 어떨까. 물론, 삼성에도 많은 '시마'들이 있다. 삼성에 있는 '시마'들이 한 번쯤 읽어봐야 할 책이 나왔다. 국제민주연대와 아시아노동정보센터가 기획하고, 장대업 아시아초국적기업 감시연대 코디네이터 등 여러 활동가와 연구자들이 지은 <아시아로 간 삼성 - 초국적기업 삼성과 아시아 노동자>다.
▲ ⓒ프레시안

왜 하필 삼성인가? 저자들은 유럽 프리미어리그 축구 경기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국내 많은 축구 마니아들은 프리미어리그 결승전을 보기 위해 새벽 3시까지 기다리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리고 프리미어리그 소속 팀인 첼시 선수들의 유니폼에는 삼성 로고가 찍혀 있다.

대륙의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축구 경기를 생중계로 보기 위해 밤을 새우는 한국인들, 그리고 한국 기업의 로고가 박힌 유니폼을 입고 뛰는 유럽 선수들은 한국이 나라 밖 세상과 얼마나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삼성은 첼시 유니폼에 삼성 로고를 넣기 위해 849억 원을 동원했다. 그리고 삼성은 첼시와의 스폰서십 계약으로 유럽 시장에서 인지도가 높아져 삼성전자 휴대폰 매출이 네 배로 뛰는 성과를 거뒀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사례는 국내 대기업의 해외 마케팅 성공 사례로 널리 인용된다.

물론, 축구 선수의 유니폼에만 삼성 로고가 박혀 있는 게 아니다. 한국이 따라잡아야 할 모델로 오랫동안 여겨졌던 미국과 유럽 국가들의 주요 거리에서 삼성 로고가 찍힌 광고물을 만나는 것은 흔한 일이 됐다. 해외여행을 하면서, 이런 광고를 보면 뿌듯해진다는 이들도 많다. 이런 이들에게 삼성의 성공은 한국경제의 성공으로 통한다.

그래서 해외에 진출한 삼성의 어두운 면모를 들추는 일은 부담스럽다. 국가적 자부심의 근거를 훼손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대박 터뜨린 이병철, 처음부터 '국제적'이었다"

그럼에도, 저자들은 아시아 이웃 국가 노동자들에게 비친 삼성의 모습을 가감 없이 드러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시아 이웃 국가들과 한국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으려면, 한국 기업들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반성하고 고치려는 노력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해외에 진출해서 경제적 성공을 거둔 기업이 국가적 자부심의 원천으로 통하는 상황은 이런 노력을 방해하는 걸림돌로 작용한다. 이런 걸림돌을 치우려면, 가장 큰 자부심의 원천으로 통하는 기업, 즉 삼성에 대해 살피는 게 필수적이다.

이 책의 본론은 삼성 창업자인 고(故) 이병철 회장이 1938년 대구에서 삼성 상회를 세우는 대목에서 시작한다. 삼성은 설립 당시부터 '국제적'이었다. 이 회장은 당시 일본군이 만주로 향하게 되면, 중국과 무역 거래를 할 가능성이 생긴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만주와 베이징에 건어물과 건과를 수출해서 큰 돈을 벌었다. 전쟁은 사업가에게 돈 벌이의 기회가 된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꿰뚫어 봤던 셈이다. (☞관련 기사: "건설족 내버려두면, 전쟁 난다")

나라 안에서 터진 전쟁 역시 삼성에게는 악재가 아니었다. 한국전쟁은 오히려 기회였다. 인민군이 남하하면서 삼성은 사업의 터전을 부산으로 옮겼다. 수백만 피난민이 모인 부산에서 삼성은 재활용 철강을 일본에 수출하고, 설탕과 비료 등을 수입했다. 당시 필수 소비재가 극도로 부족한 상황이었기에, 삼성은 일방적으로 가격을 정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 삼성은 한국을 대표하는 주요 기업이 돼 있었다.

이렇게 자본을 축적한 삼성은 차츰 소비재 산업에서 벗어나 중화학 공업과 전자산업으로 옮겨갔다. 이제 삼성전자는 세계 전자 산업을 움직이는 축 가운데 하나가 됐다. 세계 곳곳에서 현지 법인을 운영하는 삼성전자는 인텔, IBM 등과 마찬가지로 초국적 기업, 글로벌 기업 등으로 분류된다. 삼성전자가 국경을 넘나들며 돈을 굴리는 초국적기업이 됐지만, 많은 한국인들은 여전히 삼성전자를 '한국인의 자부심'과 결부시킨다.

삼성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다. 하지만, 삼성이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아시아 이웃 국가들에게까지 꼭 좋은 일은 아니다.

공권력을 '해결사'로 활용하는 '무노조 경영' 원칙

삼성은 태국과 말레이시아에서 노동조합 설립을 효과적으로 막아냈다. 방법은 1960년대 제일모직노동자들에게 적용했던 것과 비슷하다. 직접 손에 피를 묻히기보다, 공권력을 해결사로 활용하는 것.

1960년 4·19 혁명 직후, 제일모직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회사 측은 152명의 노동자에게 정직 처분을 내리고, 영업을 중지하는 것으로 맞섰다. 이는 불법 조치였다. 노조는 부당노동 행위 중지, 152명 노동자에 대한 불법 정직 처분 취소, 불법적인 공장 폐쇄 철회 등을 요구하고 나섰다. 하지만 회사는 침묵했다. 그러자 제일모직 노조는 같은 해 7월 4일 공장을 점거하고 농성을 시작했다.

역시 회사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대신, 경찰이 공장에 들이닥쳤다. 결국, 농성은 하루 만에 끝났다. 삼성이 평소 경찰 및 권력기관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해 왔기에 가능했던 결과였다.

결국 제일모직 노동조합은 해산됐고, 대신 '무노조 원칙'이 삼성의 경영원칙으로 자리 잡았다.

1960년 제일모직과 1999년 삼성전자 말레이시아, 역사는 반복된다

비슷한 상황이 39년 뒤 말레이시아에서 재연됐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삼성전자 공장을 유치하면서 "10년 동안 노동조합을 허용하지 않겠다"라고 약속했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노동조합 결성 움직임은 막을 수 없었다. 1999년 6월 14일, 국제금속노동자협회 소속 전기산업노동조합은 삼성전자 말레이시아 법인에 노조가 설립됐다고 발표했다.

말레이시아 정부가 곧 '해결사'로 나섰다. 말레이시아 인력자원부는 불과 3개월 만에 "전기산업노동조합이 삼성전자 말레이시아 법인 노동자들을 대표할 수 없다"고 발표했다.

노조 설립을 둘러싼 분란이 생기면, 2~3년가량의 결정 기간을 갖는 게 정부 관례였다. 하지만 말레이시아 정부는 스스로 관례를 깼다. 당시 삼성전자 말레이시아 법인의 주요 생산 품목은 전자레인지, 마이크로파 전자관, 인쇄회로기판 등이었는데, 이런 품목은 '전자제품'이며 '전기제품'이 아니라는 게 결정의 근거였다. 노동계에서는 말레이시아 정부가 삼성과 맺은 '무노조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억지스런 결정을 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하지만 현지 정부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삼성이 평소 말레이시아 정부와 돈독한 관계를 맺어뒀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국내에서 권력기관과 유착해서 노조 설립을 막았던 삼성은 해외 법인을 운영하면서도 비슷한 방법을 적용하고 있는 셈이다.

"'무노조 경영'은 세계화될 수 없다"

그런데 공권력을 해결사로 활용하는 '무노조 경영'은 국경을 벗어나서도 계속 통할 수 있을까. 저자들의 답변은 회의적이다. 삼성의 제품은 세계 곳곳에서 팔릴 수 있지만, 삼성의 '무노조 경영'은 세계화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한국에서와 달리, 삼성 해외 법인에서 일하는 현지 노동자들은 승승장구하는 삼성을 보며 국가적 자부심을 느끼지 않는다. 그들에게 삼성은 일자리를 제공하는 곳 이상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일자리로서의 삼성이 갖는 매력은 썩 높지 않다. 많은 초국적 기업들처럼, 삼성 역시 연구개발 등 핵심 부문은 국내에 남기고 노동집약적 부문만 해외에 넘기는 전략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싼 인건비'가 공장을 운영하는 이유인 이상, 노동자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경제적 보상의 수준에는 한계가 있다. 게다가 노조가 없는 삼성은 민주적으로 노동자들과 대화하는 법을 익힐 기회가 없었다. 문화적 차이로 인해 갈등이 생겼을 때, 이를 푸는 능력이 취약하다는 뜻이다. (☞관련 기사: "'삼성 식 경영'을 고발한다", '이재용의 꿈', 한국 경제에도 희망일까?)

중국 공장 노동자들의 파업을 무사히 넘겼던 '시마 상무'의 행운을 삼성은 기대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삼성, 아시아 노동자들을 만만히 보지 말라"

저자들의 전망은 이렇다. 세계무대에서 활약하는 '시마 과장'을 보며, 자신의 미래를 그리고 있을 많은 '삼성맨'들에게 전하는 충고이기도 하다.

"삼성은 한국에서 아시아로, 아메리카 대륙으로, 중국으로 움직이고 단순기술에서 하이테크로, 트랜지스터 라디오에서 반도체로 움직인다. 삼성은 자기 자신, 노동자, 국가, 그리고 경쟁자들에 의해 창출된 공간에서 발전해 왔다. 실제로 삼성은 시장뿐만 아니라 노동자와 끊임없이 투쟁해 왔다. 그동안 삼성의 성장은 성공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삼성이 지금껏 해온 방식으로 미래의 도전도 잘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 말하기는 너무 이르다.

삼성이 노동자들의 정치적 권리를 배제한다는 원칙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노동자들의 단결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최근 몇 년간 자신들의 영혼과 단체행동권을 주장하기 시작한 노동자들을 다루기란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

국제 사회는 그리 만만하지 않고, 무엇보다 아시아의 노동자들은 그리 녹녹한 상대가 아니다. 그들은 식민주의와 인종분열, 군사독재와 민간인 학살, 초국적기업의 횡포를 모두 버텨온 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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