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關·聯의 글자풀이는 그렇지 않다. 關은 <그림 1>과 같은 모습을 원형에 가까운 것으로 보고 문에 빗장을 지른 모습의 상형이라고 한다. 聯은 <그림 2>처럼 오른쪽이 絲(사) 형태인 글자꼴에 주목해, 싸움에서 얻은 적의 귀를 잘라 실에 꿰어 놓은 것을 나타냈다는 설명이다. 둘 다 상형적이거나 생경한 회의자식 설명이다.
關·聯의 글자 구성을 보면 門(문)과 耳(이)가 모두 훌륭한 의미 요소일 수 있음이 눈에 띈다. 또 한자 초기에 초성에 ㄱ/ㄹ이 함께 들어 있는 겹자음이 있었다는 얘기를 감안하면 '관'과 '련'은 같은 발음에서 변한 것일 가능성이 있고, 두 글자의 공통 부분은 바로 이런 겹자음 초성을 지닌 발음기호였을 수 있다.
이 글자는 玄(현)을 둘 겹친 玆(현)자로 보인다. 玄은 <그림 3> 같은 모습을 기본으로 해서 위아래에 다소 장식이 붙기도 하고 없기도 해서 여러 형태로 나타나는데, 玄자는 윗부분 장식이 남아 있는 것이고 關·聯의 발음 부분은 아랫부분 장식이 남아 있는 모습이다. 玄은 옛 모습에서 幺(요)나 糸(멱) 등과 구분이 어려우며, <그림 2>의 聯자에 絲 형태가 들어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이 玆은 慈(자)·磁(자)의 발음기호인 茲(자)와 헛갈린다. 茲는 艸(초)를 의미 요소로 해서 '풀이 무성하다'의 뜻이며 玆은 '검다'인 玄을 겹친 글자로 역시 '검다'의 의미다. 다산 정약용의 형인 정약전이 黑山島(흑산도)에 유배돼 정리한 魚類(어류) 백과 이름은 <茲山魚譜(자산어보)>가 아니라 <玆山魚譜(현산어보)>다. 玆山은 '검은 산'이라는 뜻인 黑山島의 별칭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자전에서조차도 '자'와 '현'이 뒤죽박죽이지만, 글자의 구성 요소와 발음을 보면 간단하게 바로잡을 수 있는 오류일 뿐이다.
玆이 絲로 변한 것은 聯에서뿐만이 아니다. 變(변)·戀(련)·蠻(만)·鸞(란) 등은 윗부분 䜌(련)이 발음기호인데, 그것은 다시 言(언)과 絲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글자에 대해 관악기(言 부분)에 실을 매단 모습이라는 등의 설명을 하지만 황당한 얘기다. 파생자들의 발음이 '련'을 중심으로 해서 약간씩 변한 것이라고 보면 여기서의 絲 역시 玆의 변형이다. 그렇다면 䜌은 絲=玆이 발음, 言이 의미 요소인 형성자다. '말이 이어지다'라는 뜻이라고 하니 얼추 들어맞는다.
여기서 끄집어낼 글자가 辯(변)이다. '말을 잘하다'의 뜻이니 言이 의미 요소고 나머지 부분 辡(변)이 발음이겠다. 이 辡에 대해서 두 죄인이 서로 다투는 모습이라는 식으로 이해해 역시 의미 요소로 갖다 붙이는 게 보통인데, 전에 다뤘듯이 辛(신)자를 '죄'와 관련짓는 것은 근거가 없다. '말을 잘하다'는 '말이 (끝없이) 이어지다'와 동일한 개념이라고 볼 수 있는데, 䜌의 絲가 玆의 변형이었듯이 辯의 辡이 玆의 변형일 가능성을 제시하는 대목이다.
辯과 비슷한 구조의 글자에 辨(변)·辦(판)이 있다. 그렇다면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자. 班(반)·斑(반)은 이들 글자와 발음이 매우 비슷하다. 글자의 모양도 가운데 어떤 글자를 두고 양쪽에 같은 요소가 들어 있어 흡사하다.
이쯤 되면 대강 눈치를 채셨을 것이다. 班·斑의 王 부분도 辛=玄의 변형으로 몰고 가자는 건데, 모양 차이가 너무 심하지 않나? 그렇다면 <그림 4>를 보자. 바로 斑의 소전체다. 두 개의 王 부분이 분명 두 개의 辛으로 돼 있다. 班·斑의 王은 辛이 아주 간략해진 것이고, 그 원형이 玄이라면 그것이 王 형태로 변했다고 보는 데 그리 큰 무리는 없다.
辨과 班의 의미가 '나누다'로 일치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王 부분이 辛=玄의 변형이어서 두 글자는 같은 글자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班이 玉(옥)을 두 쪽으로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며 信標(신표) 운운하는 얘기는 난센스다. 이 글자에는 애초에 玉이 없는 것이다. <설문해자>에서 소전체가 <그림 4>와 같은 모습으로 정리된 斑은 辡이 발음이고 班은 珏(각)의 의미를 따랐다고, 비슷한 구조의 글자를 전혀 다르게, 보이는 대로 설명한 것을 답습해 생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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