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그의 손에는 촛불이 없었다. 촛불을 켤 수가 없다고 했다. 그는 촛불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했다. 노동조합 가입 한달 만에 파업을 시작해 어느덧 1년을 맞은 한 조합원이 털어놓은 얘기 때문이었다.
"전기가 끊겨 아이들이 촛불을 켜놓고 공부한다고 했다. 엄마한테 외려 그 아이들이 '엄마, 텔레비전도 안 나오고 컴퓨터도 안 되니까 집중이 잘 돼'라고 했다고…. 촛불만 보면 그 얘기가 떠오른다. 그래서 촛불을 차마 못 켜겠다."
그는 비정규직 대량해고와 외주화에 맞서 '아줌마 부대'를 이끌고 이랜드 그룹과 싸워 온 이랜드일반노조 김경욱 위원장이었다. 그리고 이날 그들의 파업이 어느덧 1년이 됐다.
촛불 볼 때마다 떠오르던 기억…"한 번도 촛불을 켤 수 없었다"
최근 50여 일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촛불집회에 그도 셀 수 없이 많이 참석했었다. 하지만 그 조합원의 얘기 때문에 그는 "단 한 번도 촛불을 켤 수 없었다"고 털어놨다.
그리고 덧붙였다.
"파업 1년, 그 하루하루가 너무 어렵고 힘들었지만 최근에는 촛불 집회 때문에 참 힘들었다. 숨이 막혀 죽는 줄 알았다."
1년이 지나도록 묵묵부답인 이랜드 그룹 때문이 아니라 촛불 집회 때문에 숨이 막혔다? 대체 왜? 그는 답했다.
"우리는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촛불은 거대했지만 이슈는 잠식당했다."
쇠고기 외의 어떤 이슈도 관심을 받기 어려웠던 정국에 대한 답답함이었다. 소외됐다고 생각했을까? 수도 없이 모인 인파 한 가운데서 오히려 쓸쓸했을까?
"아니, 절망감이었다."
소외감? 쓸쓸함? "아니, 절망이었다"
사람들은 나와 내 아이들의 식탁을 위협하는 정부의 무책임한 협상 태도에 분노했다.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거짓말과 무자비한 폭력에 촛불은 더 거세게 타올랐다. 김경욱 위원장은 그 촛불을 보며 "사람들이 스스로에게 손해가 끼친다면 결집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봤다"고 말했다.
하지만 "촛불이 새로운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보여줬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에 대한 분노는 이명박 대통령이 형식적 민주주의를 훼손한 것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었지만, 실질적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을 아직 자기 문제로 느끼지는 못하는 것 같다."
언젠가 먼 훗날에 내 아이의 건강한 생명을 위협할지 모르는 광우병 쇠고기에 대해서는 분노하면서 당장 내 아이의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비정규직 문제는 '남의 일'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에 대한 절망이기도 했다. 김 위원장은 그래서 "쇠고기는 안전한 투쟁"이라고 말했다.
"쇠고기는 생존권 투쟁이 아니다. 하지만 비정규직 문제는 생존권 싸움이다. 순간 순간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투쟁이다. 당장 생활비가 없어 내 아이가 전기와 수도가 끊긴 집에서 생활해야 할지도 모르는, 그런 문제다. 자식들의 먼 미래가 아니라 오늘 먹고 살 길을 걱정해야 하는 문제다."
파업 1년, 얻은 것과 잃은 것
청와대를 향해 꺼질 줄 모르고 타오르는 촛불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면서 김 위원장이 매번 떠올렸다는 그 조합원은 여전히 파업 중이다. 김 위원장이 "홈에버 월드컵점만 점거하면 다 해결된다고 뻥을 쳐" 시작했다던 그 파업은 아직도 끝이 쉬이 보이질 않는다.
1년은 짧은 시간이 아니다. 많은 조합원이 복귀하기도 했지만, 그 1년 동안 25명이 구속됐고, 250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이 걸려 있다. '고용 안정'을 위해 시작한 파업이 좀처럼 해법을 찾지 못하고 부질없이 시간만 흐르던 그 시간, 그들이 얻은 것과 잃은 것은 무엇일까?
김 위원장은 "부당하게 해고된 조합원은 반드시 복직시킨다는 것을 얻었다"고 말했다. 까르푸 시절부터 체결돼 여전히 유효했던 홈에버 노사의 단체협약에는 18개월 이상의 고용 보장이 명시돼 있었다. 하지만 홈에버 측은 18개월 이상 근무자까지 모두 계약해지했다가 노조의 파업이 시작되고 사회적 이슈로 주목을 받으면서 비로소 지난해 말 이들을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했다.
"회사의 외주화도 결국 막아냈다. 비조합원의 고용도 보장한 것이다. 그리고 기업이 비정규 노동자를 악의적으로 대량해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사회적으로 보냈다."
비록 뉴코아까지 포함해 50명 넘는 징계해고자가 발생하긴 했지만 얻은 것도 있기는 있는 셈이었다.
잃은 것은? 많았다. 조합원이 줄었다. 김 위원장은 "지난해 이맘 때 파업을 시작할 때 1100여 명이던 조합원이 지금은 파악조차 안될만큼 줄었다"고 했다. 숫자가 줄은 것은 그나마 낫다. 몇 안 되는 조합원들끼리 상처가 참 많이도 남았다.
"파업 전술을 놓고 서로 많이들 싸웠다. 어떤 사람은 '위원장이 또 구속돼야 한다'고도 했고, 또 어떤 사람은 '위원장은 빼야 한다'고도 했고. 그런 갈등으로 서로 상처를 참 많이 받았다."
"영혼이라도 팔고 싶은 마음은 변함없다"
지난 총선에서 이남신 수석부위원장이 진보신당 비례대표로 출마했던 것도 그런 '상처'와 '마음고생'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 방침을 가지고 있는 민주노총도 발칵 뒤집어졌었다. 조합원들도 서로 다른 생각으로 인해 갈등을 겪었다.
그러나 김 위원장은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같은 결정을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민노당이든 진보신당이든 우리 문제를 해결해 줄 테니 우리 후보로 출마하라고 한다면 또 한다."
그는 홈에버 점거농성으로 구속됐다가 풀려난 뒤에 "영혼이라도 팔고 싶은 마음이었다"고 털어놨다.
"이랜드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라면, 조합원들을 현장으로 돌려보낼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못 할게 없다"고 생각했던 그 마음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는 말이었다. 이남신 수석부위원장의 진보신당 비례대표 출마는 그 연장선이었을 뿐이었다.
"우리 조합원들은 '비정규 투쟁의 상징, 이랜드'란 말을 제일 싫어한다"
그런 김 위원장에게 '이랜드 파업의 대한민국 사회에서의 의미가 무엇인 것 같냐'고 물었다. 김 위원장은 "잘 모르겠다"고 했다. "중심에 들어와 있으면 오히려 의미 같은 건 잘 모른다"면서.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우리 조합원들은 '비정규 투쟁의 상징'이라는 말을 제일 싫어한다. 상징은 중요한 게 아니다. 당장 전기세, 수도세 낼, 버스 탈 돈이 필요한데…."
밖에서 바라보는 사람과, 안에서 겪는 사람의 시선 차를 드러낸 말이었다. 또 파업도 개개인의 '사람'이 하는 것임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설명이었다. 그리고 이 말은 파업 1년으로 잃은 것을 묻는 질문에 "내가 잃은 것? 가족, 신용, 친구"라고 얘기했던 그의 대답과도 맥이 닿아 있었다.
파업 1년을 보내면서 그 역시 신용불량자가 됐다고 했다. 친구도 잃었다고 했다. 만날 시간도 없지만 마음의 여유도 경제적 능력도 없다. 며칠 전에는 육군사관학교 동기인 친구에게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살아 있기는 하냐?"
친구의 말이었다. 그는 답했다.
"야, 서울대는 과 동기가 이런 거 하다 구속되고 그러면 생활비라도 모아준다던데, 평생 죽을 때까지 전우 운운하던 너희들은 뭐냐."
"그 친구는 '말을 하지'라고 답 하더라"며 그는 웃었다.
"이랜드? 기업의 탈을 쓴 마피아…삼성테스코의 상식 믿는다"
그는 이랜드 그룹 얘기를 하면서는 거친 표현도 서슴치 않았다. "기업의 탈을 쓴 마피아"라고까지 말했다.
"시카고 갱의 대표적인 수입원이 불법 주류 판매였다. 이랜드도 그랬다. 마피아의 특징이 세금 포탈이다. 이랜드는 우리 국민의 주식인 쌀을 가지고도 그런 장난을 쳤다. 그 뿐인가? 최근에는 납품업체가 미국산 쇠고기를 호주산으로 속여 팔았는데도 뻔뻔하게 '몰랐다'고만 하지 않나. 21세기형 마피아다."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그는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아니, 마피아가 아니라 양아치"라는 것이었다.
"마피아는 최소한 자기 '패밀리'는 챙긴다. 하지만 이랜드는 '패밀리'조차 무자비하게 해고시켰다."
네 번의 계절을 지나 어느덧 다시 여름을 맞은 이랜드 여성 노동자들의 파업, 그 끝은 어디쯤 있을까? 더욱이 최근 이랜드 그룹이 홈에버를 삼성테스코에 매각하겠다고 발표하면서 해고자들의 문제는 더 꼬여 버렸다.
매각 발표 당시 삼성테스코 측은 홈에버의 전 직원과 노조까지도 계승하겠다고만 했을 뿐, 여전히 노조와 공식적인 대화를 거부하고 있다. 하지만 김 위원장은 "삼성테스코의 상식을 믿는다"고 말했다.
"기업을 인수하려면 경영권만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인사와 노무도 같이 가져가는 것이다. 홈에버 측의 얘기만 듣지 말고 노조를 만나 우리 얘기도 들어달라는 것일 뿐이다. 삼성테스코가 성실히 대화에 응한다면 해결의 날이 있지 않을까."
1년을 맞은 그의 바람이었고, 이날 모처럼 뉴코아 강남점 앞에 모인 수 백 명의 여성 비정규 노동자들의 바람이었다. 2008년 대한민국은 과연 '상식'이 통하는 사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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