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으로는 사과를 하면서도 곧바로 미 쇠고기에 관한 '인터넷 괴담' 때문에 곤혹스러웠다거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위해서 쇠고기 개방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등 뻣뻣한 자세는 볼 수 없었다. 이 때문인지 일부 국민은 '저토록 몸을 낮추는데 한번 믿어봐야 하는 것 아니냐'는 동정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변화는 딱 여기까지였다. 즉 최대한 몸을 낮추고 반성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지만 졸속 쇠고기 협상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기존의 입장에서 달라진 것은 거의 없다. "엄청난 후유증이 있을 것을 뻔히 알면서 쇠고기 재협상을 할 수는 없다"고 밝힌 대목이 이를 잘 말해 준다. '재협상 불가'라는 기존 정책 내용은 그대로 고수한 채 접근 방식만을 바꾸었을 뿐이다.
이날 이 대통령이 발표한 대국민 사과문을 살펴보면 그가 여전히 당초 '소신'을 고집하고 있으며, 현재 상황을 얼마나 왜곡해서 파악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첫 번째 착각 : 미 쇠고기 수입하면 한미 FTA 비준된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계속 거부하면 한미 FTA가 연내에 처리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았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미국산 쇠고기를 서둘러 수입한 이유를 한미 FTA 비준에서 찾았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물론 임기가 수 개월 남은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맥스 보커스 상원의원 같은 이른바 '쇠고기 벨트(beef belt)' 정치인에게 미국산 쇠고기 수입은 큰 선물이다. 그러나 딱 그뿐이다.
한국이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한다고 해서 미국 의회가 연내 한미 FTA를 비준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우선 상·하원을 장악한 민주당의 대선 후보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이 수 차례 "현재의 한미 FTA는 반대한다"는 부정적 의견을 밝혔다. 현재 오바마 상원의원은 오는 미국 대선에서 당선할 가능성이 크다.
오바마 상원의원 뿐만이 아니다. 민주당 출신의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도 "한미 FTA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미국산 자동차의 한국 시장 진입이 더 자유로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대통령이 미국산 쇠고기에 이어, 미국산 자동차, 더 나아가서는 미국산 쌀의 관세를 없애주지 않는 한 미국은 한미 FTA를 비준하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 착각 : 쇠고기 수입하지 않으면 통상 마찰?
"미국과의 통상 마찰도 예상됐습니다. 싫든 좋든 쇠고기 협상은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통상 마찰"도 거론했다. 미국산 쇠고기를 통상 문제로 파악하고 있는 것. 그러나 이런 통상 마찰이 현실이 될 가능성은 아주 낮다. 미국산 쇠고기는 2003년 12월 수입이 중단되었다. 그 후 미국은 집요하게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요구했지만, 2006년 1월에야 현재의 수입 위생 조건이 합의되었다. 2년간 쇠고기가 원인이 된 통상 마찰은 없었다.
2006년 3월 현재의 수입 위생 조건이 고시된 후에도 미국산 쇠고기는 2년 가까이 제대로 유통되지 못했다. 미국이 양국이 합의한 "뼈 없는 살코기"라는 현재의 수입 위생 조건도 제대로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계속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 유보되는 데도 통상 마찰은 없었다.
김성훈 전 농림부 장관은 지난 17일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은 통상 문제가 아니라 검역 문제"라고 지적했다. 미국도 바로 이 점을 알기 때문에 바로 검역 조건을 완화하는 '협의(Consultation)'을 집요하게 요구한 것이다.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지 않으면 통상 마찰이 생길 것이라는 이 대통령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 이명박 대통령도 이 점을 알고 있다. 이 대통령은 사과문을 발표한 뒤, 기자들과의 일문일답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쇠고기와 FTA와는 차이가 있다. 쇠고기는 미국 쇠고기를 한국에 수출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다." 그렇다. 이 대통령의 말대로 아쉬운 쪽은 우리가 아니라 미국이다.
세 번째 착각 : 한미 FTA로 10년간 6% 성장?
"한미 FTA가 체결되는 34만 개의 좋은 일자리가 새로 생기고, GDP(국내총생산)도 10년간 6% 이상 늘어날 것으로 예측됩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한미 FTA의 효과를 늘어놓으면서 이런 예상 수치를 인용했다. 이것은 이 대통령만큼 한미 FTA 추진에 적극적이었던 노무현 정부 시절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이 내놓은 예상 수치이다. 그러나 이 예상 수치는 이미 수차례의 검증으로 "거짓"으로 확인된 것이다.
이 기관은 애초 2006년 1월 "한미 FTA가 발효되면 GDP가 1.99% 늘어날 것"이라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같은 해 3월 갑자기 성장률 추정치를 7.75%(금액 기준 6.65%) 로 끌어올렸다. 이 수치가 조작된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되자 이 기관은 뒤늦게 "7.75%로 GDP가 늘어나는 데는 '10년'이 걸린다"고 해명했다. 바로 이 수치를 이명박 대통령이 인용한 것.
그러나 이런 '엉터리' 예상 수치는 곧 '조작'임이 드러났다. 한국방송(KBS)의 한 프로그램이 이 기관에 연구를 직접 수행한 당사자를 묻자 모두 "그런 연구를 한 적이 없다"고 답한 것. 아무도 연구를 한 적이 없는 연구 결과를 노무현 대통령에 이어서 이명박 대통령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관련 기사 : "장밋빛 FTA 자료는 정부가 조작·왜곡한 것")
네 번째 착각 : 미국과의 관계, 그동안 나빴다?
"안보의 측면에서도 미국과의 관계 회복은 더 늦출 수 없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사과문에서 "미국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서" 쇠고기 수입은 불가피함을 강조했다. 이 대통령은 노무현 정부 때 미국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고 인식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 역시 사실이 아니다. 노무현 정부 때 미국과의 관계가 얼마나 좋았는지는 몇 가지 예만 보면 알 수 있다.
후보 시절 '반미' 발언으로 구설수에 올랐던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전혀 다른 행보를 취했다. 2004년 노무현 정부는 지지자의 이탈을 감수하고 미국의 요구대로 이라크에 전격적인 파병을 감행했다. 노무현 정부는 미군 기지 이전 비용을 한국 정부가 전부 부담하기로 해 미국 정부가 "대만족"을 표시하기도 했다.
주도적으로 미국과의 FTA를 추진한 것도 노무현 정부다. 노무현 정부는 한국의 경제, 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줄 이 FTA를 불과 9개월 만에 타결했다. 통상 규모가 한미 FTA의 200분의 1밖에 안 되는 한-칠레 FTA와 비교하면 '일사천리'였다. 이처럼, 노무현 정부 때 한국과 미국과의 관계는 절대로 나쁘지 않았다.
다섯 번째 착각 : 쇠고기 재협상, 과연 필요한가?
"정부는 지금 모든 외교력을 동원해서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국제 표준과 충돌되지 않고 통상 마찰을 일으키지 않으면서도 식품 안전에 관한 국민들의 염려를 해소하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미국 부시 대통령에게 우리의 요구 사항을 구체적으로 분명히 밝혔습니다. 이를 계기로 지금 이 시각에도 양국 대표들이 모여 협상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인식은 과연 옳은가? 김성훈 전 농림부 장관의 지적을 들어보자. 김 전 장관은 "이번에 논란이 된 미국산 쇠고기 수입 위생 조건은 '협정(Agreement)'이나 '협약(Convention)'이 아닌 양국 간 '협의(Consultation)'에 불과하다"며 "'재협상', '추가 협상' 운운할 필요도 없다"고 지적했다.
김 전 장관은 "이번에 합의한 미국산 쇠고기 수입 위생 조건의 '합의 요록'을 보면 분명히 일반 국민의 여론을 수렴해 확정한다고 돼 있다"며 "이명박 정부는 이 합의를 근거로 '일반 국민의 90% 가까이 반대하기 때문에 확정할 수 없다'고 미국 측에 통보하면 된다"고 지적했다.
김 전 장관은 "미국 정부가 재협의를 요청하면 우리는 2003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 중단된 후 해왔던 것처럼 재협의에 충실히 임하면 된다"고 덧붙였다. 그는 "쇠고기 수입 위생 조건은 검역과 관련된 사안이기 때문에 통상 문제와 연결해서는 안 된다"며 "미국 측도 이런 사실을 알기 때문에 무역 보복과 같은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전 장관의 말대로라면 이명박 대통령은 해법을 잘못 찾았다. 그냥 '국민 여론을 근거로' 미국에 "No"라고 선언하면 된다. 만약 나중에 미국이 재협의를 요청해 오면 그 때 충실히 재협의에 임하면 된다. 아니 이 대통령이 나설 필요도 없다. 정운천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이 "No"라고 선언하는 것으로 족하다. (☞관련 기사 : "'추가 협상'? 김종훈이 대통령과 국민을 속이고 있다")
여섯 번째 착각 : 이러다 '마늘 파동' 꼴 난다?
"국민 여러분께서는 2000년에 벌어진 마늘 파동을 기억하실 겁니다. 중국산 마늘이 대거 들어오면서 국산 마늘 값이 폭락하자 정부는 여론무마용으로 긴급관세를 부과했습니다. 그러자 중국은 한국 휴대폰 수입을 중단시켰습니다. 결국 이 문제는 한국이 일방적으로 양보하는 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미국에 재협상을 요구하면 "엄청난 후유증이 있을 것"이라며 2000년 '마늘 파동'을 예로 들었다. 그러나 이런 이 대통령의 발언을 접한 대다수 전문가는 "사실과 다르다"고 입을 모았다. 2000년 '마늘 파동'은 최근의 '쇠고기 파동'과 같은 범주에 놓고 비교할 성질이 못 된다는 것.
우선 당시 중국은 세계무역기구(WTO) 회원국이 아니었다. WTO 틀 안에서는 한 국가가 긴급관세를 부과하면, 상대 국가는 WTO에 제소하거나 상응하는 긴급관세를 부과하는 것으로 대응한다. 송기호 변호사는 "WTO 틀 안에서는 '동등성의 원칙'을 염두에 두고 상응하는 액수의 품목에 긴급관세를 부과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2000년 WTO 회원국이 아닌 중국은 말 그대로 '마구잡이로' 대응했다. 약 3억 달러의 피해가 예상되는 수출 마늘에 긴급관세를 부과하자, 50억 달러의 피해가 예상되는 한국 휴대전화기 수입을 중단한 것. 익명을 요구한 한 전문가는 "지금처럼 중국이 WTO 회원국이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송기호 변호사는 "더구나 '마늘 파동'이 통상 문제라면 '쇠고기 파동'은 검역 문제"라며 "이 두 가지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다른 전문가도 "이명박 대통령에게 '마늘 파동'을 주입한 비서가 누구인지 궁금하다"며 "검역 문제를 통상 문제로 보는 이명박 대통령과 그 주변 인사의 시각이 고스란히 드러났다"고 꼬집었다.
일곱 번째 착각 : 국민의 뜻은 30개월 이상 美 쇠고기 금지다?
"국민들이 원하지 않는 한 30개월 이상의 미국산 쇠고기가 우리 식탁에 오르는 일이 결코 없도록 할 것입니다. 미국 정부의 확고한 보장을 받아내겠습니다. (…) 국민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30개월 이상의 미국산 쇠고기가 우리 식탁에 오르는 일은 결코 없도록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런데 국민은 한 번도 "30개월 이하의 미국산 쇠고기를 원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 19일 한 여론 조사 결과를 보면 '미국 정부가 보증하는 30개월 미만 쇠고기 수입 조건'에 만족하는 사람은 응답자의 8.9%에 불과했다.
이럴 만하다. 실제로 핵심은 광우병 특정 위험 물질(SRM)이기 때문이다. 국민건강을위한수의사연대 박상표 정책국장은 "정부는 마치 30개월 이상 쇠고기만 수입 금지하면 안전한 것처럼 눈속임을 하고 있지만, 진짜 문제는 SRM"이라며 "유럽, 중국 등 대부분의 나라는 수입 위생 조건을 통해 모든 연령의 SRM을 수입 금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럼, 해법은 무엇인가? "국민의 뜻을 받들겠다"는 대통령의 공언대로 국민의 뜻을 따르면 된다. 김성훈 전 장관의 지적처럼, 지난 4월 19일 협의한 수입 위생 조건을 거부하고, 미국이 재협의를 요청해 오면 그 때 다시 국민의 뜻에 따라 새로운 수입 위생 조건을 협의하면 된다.
대단한 실천도 아니다. 이미 이명박 대통령은 "미국 정부의 보장 없이는 30개월 이상의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했다. 사실상 이번에 협의한 수입 위생 조건을 거부한 것이다. 상황이 이런데, 왜 이명박 대통령은 국민 대다수가 반대하는 이번 협의를 거부하지 못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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