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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지금 통상법을 새로 쓰고 있다"

[송기호 칼럼] 국민이 원하면 재협상 가능해

본질은 농림부 장관 고시를 바꾸는 것이다. 국민의 요구는 광우병 위험에 국민을 노출시키는 독소 고시 조항을 고치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이를 한사코 거부하고 있다. 미국과 합의한 대로 고시하겠다는 것이다.

정부는 국민 여론 때문에 과학에 근거한 고시에 손을 댈 수 없다고 주장한다. 공중의 의견이 부정적이라는 이유로, 과학의 영역인 고시 내용을 고치자고 미국에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과연 정말 그럴까? 국제 검역법에서 공중 의견은 과학의 꽁무니를 따라 다녀야 하는 것일까?

곧장 국제법 영역에 들어가기 전에, 한국과 미국의 쇠고기 광우병 검역 합의를 먼저 보자. 두 나라는 지난 4월 18일 광우병 검역 조건에 합의하면서 합의문 요록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여론 수렴 조항이 들어 있다.
한국은 2008년 4월 22일까지는, 농림부가 수입 위생 조건에 대한 국민 의견을 수렴하기 위하여 이를 공시할 것이라고 하였다. (Korea stated that no later than April 22, 2008, the Ministry for Food, Agriculture, Forestry and Fisheries will publish for public comment the import heath requirements…)

이처럼 한미 간의 합의 자체에 이미 여론 수렴 단계가 예정되어 있다. 어떤 이는 여기서의 국민의 의견이란 과학적인 의견이어야만 하므로, 단순한 국민 의견 일반을 반영하기 위한 재협상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공중에게 언제나 과학 전문가이어야 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 공중은 그 사회 안에서 살아가고 생활하고 그리고 죽는 존재인 것만으로 충분히 공중으로서 위생 검역 기준의 결정에 참여할("take part in") 국제법적 권한이 있다. (유엔 시민적 정치적 기본권에 관한 협약 25조)

그리고 위 합의문에서의 공중 의견 제출(public comment)을 전문가 의견(expert opinion)으로 좁혀서 해석해야 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 그러므로 여론을 이유로 재협상하는 것은 애초의 한미 간 합의에 의해서도 가능하다. 대다수의 국민들이 위험을 제기한 이상, 그 핵심적 내용을 반영하는 새로운 검역 기준을 만들기 위한 재협상은 가능하다.

그리고 이는 국제법적으로도 가능하다. 정부가 그토록 신봉하는 국제수역사무국(OIE)의 규정도 광우병과 같은 위험의 평가 첫 단계에서부터, 그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한 투명성과 공중과의 커뮤니케이션을 규정하고 있다(육상동물건강규약 1.3.2조).

세계무역기구(WTO)의 위생검역협정(SPS)을 보면, 각 나라가 자주적으로 정할 수 있는 적정 수준(appropriate level)의 검역 기준에 대해 이를 수용 가능한(acceptable) 위험 수준으로 통칭된다고 주석을 달아 놓았다.부속서 1 정의조항). 이 정의는 검역 기준의 설정에 공중이 참여함을 전제하고 있다. 사회가 어떤 위험 수준이 수용가능한지를 결정함에 있어 그 위험에 직접 노출되는 공중의 의견을 배제할 수는 없다.

1998년의 세계무역기구 판례가 말하는 대로, 검역 기준이 대응해야 할 위험이란 공중이 살아가고 노동하고 그리고 죽는 현실 세계에서, 인간 건강을 위협하는 잠재성을 의미한다(유럽연합-호르몬 사건 항소심 판례 181항).

더욱이 위 위생검역협정(SPS)도 검역 기준의 설정에서 오로지 과학만을 요구하고 있지 않다. 협정은 적정 수준의 검역 기준을 정할 때, 문제의 위험 유입으로 인한 생산량과 판매량 손실 등 경제적 요소(economic factors)도 함께 고려하도록 하고 있다(5.3조).
▲한국의 국민이 현재의 미국산 쇠고기 검역 기준을 크게 걱정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재협상을 해야 할 중요한 근거가 된다. ⓒ프레시안

이를 한국에 적용한다면, 한국 소비자들이 이토록 광범위하고도 지속적으로 보여주는 미국산 쇠고기 검역 기준에 대한 강한 우려를 고려할 때, 만일 이대로 미국산 쇠고기가 수입될 경우 소비자들은 아예 쇠고기 구입 자체를 크게 줄이려 할 것이다. 지금 일부 지역에서 나타나고 있는 한우 뼈 사재기가 보기이다. 결국 한국 쇠고기 산업의 생산량과 판매량 손실은 예상보다 더 심각할 것이다. 한국 정부는 당연히 이를 고려하여 다시 검역 기준을 설정할 수 있다. 재협상을 요구할 수 있다.

또 협정은 검역 기준의 설정에서 건강상 위험의 예외적 특성을 포함한 모든 관련 요소(all relevant factors including exceptional character of human health risk)를 고려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5.5조). 한국은 한국인의 독특한 식습관과 유전자를 고려한 검역 기준을 설정할 수 있다.

강조하지만, 한국 정부가 마치 광우병 검역 기준 설정이 오로지 과학의 영역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며 일반 공중은 입을 다문 채 그 꽁무니를 따라 다녀야 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국제법적으로도 정당하지 않다. 심지어 이러한 체제는 정당하지도 효율적이지도 않다.

이 점에서 뉴질랜드 오클랜드 법대의 포스터(Foster) 교수가 <국제경제법저널> 최근호에 기고한 '여론과 WTO 위생 검역 협정'이라는 논문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 논문의 핵심 주장은 과학적 불확실성이라는 맥락에서, 세계무역기구 회원국은 자국민이 단지 문제의 위험을 무릅쓰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에 근거해서 검역 조치를 펼 수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The central argument in the article is that, in a context of scientific uncertainty, a WTO Member should be able to defend sanitary or phyto-sanitary measures on the basis that its population simply does not want to run a given risk.) <국제경제법저널> 11(2), 432쪽

포스터 교수가 제기하는 접근법은 과학의 역할을 부인하거나 세계무역기구 체제를 종식시키려는 것은 아니다. 그의 관심은 검역 기준 설정에서, 과학과 여론의 최선의 결합에 있다. 그는 국민 절대 다수가 수용하지 않으려는 위험에 대해선 이를 진정한 공포(genuine fear)라고 평가한다. 그리고 이에 근거한 검역 조치는 위장된 보호주의가 아니라고 본다. 그는 세계무역기구 체제의 정당성과 효율성을 위해서라도 공중의 의견을 검역 기준 설정에서 더 적극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국제통상법은 결코 허공에 혼자 존재하지 않는다. 인권과 환경을 위한 여러 국제법의 맥락과 서로 조화롭게 파악되어야 한다. 개방경제를 통해서 새로운 위험이 인간 건강을 위협하는 지금이야말로 공중의 여론과 참여를 어떻게 보다 적극적으로 수렴하여 더 안전하고 의미있는 통상 규범을 정립할 것인지 고민할 때이다.

이 점에서 한국 정부는 한국민의 여론에 근거해서 쇠고기 재협상을 해야 하며, 이는 국제통상규범을 선진화하는 큰 의미가 있다. 지금 한국인들은 지금 통상법의 새 역사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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