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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논의는 이제 그만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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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논의는 이제 그만 합시다"

과학과 종교의 대화 <7> 독자의 말, 말, 말

지난 4월 시작한 '과학과 종교의 대화'가 독자의 뜨거운 관심 속에서 진행 중이다. 많은 독자는 과학(장대익 교수)과 신학(신재식 교수) 사이의 날선 대립과 이 대립 속에서 새로운 쟁점을 끌어내는 제3의 입장(김윤성 교수) 간의 서신 교환을 지켜보면서 근래 보기 드문 지적 긴장과 유희를 느꼈을 것이다.

<프레시안>은 이 '과학과 종교의 대화'가 더욱더 풍성해지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독자 의견을 소개한다. 이 독자 의견은 연재에 달린 댓글과 편집자에게 보낸 기고 중에서 향후 논쟁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선택한 것이다. 앞으로 이 독자 의견을 염두에 둔 서신 교환이 계속 이어질 예정이다. <편집자>
선과 사랑

"선을 공부하는 이유가 뭔가요?" 대혜 선사 유적지 순례단을 향해 고우 스님이 달리는 버스 안에서 물음을 던졌다. 다들 고개를 쭉 내밀었다. 스님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라고 자답했다. '행복'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세속의 행복이고, 또 하나는 부처의 행복이죠."

또 두 '행복'은 향하는 곳이 서로 다르다고 했다. "세속의 행복은 밖을 향하죠. 밖에 있는 걸 충족시킬 때 비로소 행복해지는 겁니다." 반면 '부처의 행복'은 안을 향한다고 했다. "부처님은 '세속의 행복'에 만족하지 않으셨죠. 행복이 뭔가요. 운문 스님이 말한 '날마다 좋은 날'이죠. 밖을 향하는 세속의 행복은 '날마다 좋은 날'이 되질 못합니다. 밖에서 얻은 게 채워질 때만 행복한 날이니까요."

스님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세속의 행복'을 등졌다고 했다. 부도, 명예도, 왕자의 지위도 버렸다고 했다. "부처님은 매일매일 행복해질 수 있는 원리를 찾아간 겁니다. 그 원리는 지금에도 유효합니다. 중국에서도 숱한 선사들이 그런 행복의 원리를 찾아 나섰고, 또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 목숨을 걸고 수행을 했던 역대 조사들의 '자리'에 들기란 쉽지 않다. 스님도 그 험난함도 인정했다. "깨치기가 쉬운 일은 아니죠. 그러나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아요. '행복의 원리'를 이해만 해도 일상이 바뀝니다. 나를 해치는 일도, 남을 해치는 일도 하지 않게 되죠."

스님은 팔만대장경이 바로 부처님의 깨침이라고 했다. 하지만 현대인은 바쁘다. 그걸 모두 공부하긴 쉽지 않다. 그래서 팔만대장경을 압축하고, 압축하고, 압축하면 한 글자가 된다고 했다. 바로 '반야심경'에 나오는 '오온개공'의 '공(空)'자라고 했다. "불교의 '공'을 절대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공'은 아무것도 없고, 허망하고, 허무한 게 아닙니다. '공'은 우리가 보고, 듣고, 생각하는 걸 굉장히 지혜롭게 만듭니다. 그걸 '마하반야(큰 지혜)'라고 합니다. 마하반야로 살면 '날마다 좋은 날'이 되는 겁니다."

스님은 '공'을 이해하면 공동체 의식이 온 우주로 확장된다고 했다. "생명 있는 것과 생명 없는 것, 이 모든 우주가 나와 둘이 아님을 알게 되죠. 큰 공동체를 알게 되면 '매일 매일 좋은 날'이 안 될 수가 없죠. 지구상에는 하루도 전쟁이 그칠 날이 없습니다. 환경문제도 갈수록 심각해지죠. 이 모든 문제에 대한 대안이 '선(禪)'입니다." (항저우=백성호 기자, <중앙일보> 2008년 3월 13일)


신앙을 갖는 이유가 뭔가요? 세속의 행복은 밖을 향하지만, 예수의 행복은 안을 향합니다. 예수님은 세속의 행복에 등졌습니다. 부도 명예도 왕의 지위도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매일매일 행복해질 수 있는 원리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신앙을 깨치기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신앙의 원리를 이해만 해도 일상이 바뀝니다. 나를 해치는 일도, 남을 해치는 일도 하지 않게 됩니다. 성경이 바로 예수의 깨침입니다. 하지만 현대인은 바쁘고 그걸 깊이 공부하긴 쉽지 않습니다. 성경을 압축하고, 압축하고, 압축하면 한 글자가 됩니다. 바로 믿음, 소망, 사랑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허망하고 허무한 게 아닙니다. 사랑으로 살면 날마다 좋은 날이 됩니다. 사랑을 이해하면 공동체 의식이 온 우주로 확장됩니다. 생명 있는 것과 생명 없는 것, 즉 이 모든 우주가 나와 둘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큰 공동체를 알게 되면 매일 매일 좋은 날이 안 될 수가 없습니다. 지구상의 모든 문제에 대한 대안이 사랑입니다.

선은 사랑이고, 사랑은 선입니다.

2008년 5월 4일

경원대 교수(영문과) 이만식 드림. (이 시는 <시와 세계> 2008년 여름호에 게재됐습니다.)

한 무신론자가 세 분 선생님께

우선 김윤성 선생님의 말씀대로 세 분 선생님의 서신 교환이 저에게는 아주 좋은 지적 유희가 되고 있어 감사하다는 말씀부터 드립니다. 선생님들이 바다라면 저는 바닷가 조개 줍는 소년정도 될 듯합니다. 제가 아는 조개들만으로도 재밌었는데 선생님들 덕에 수많은 조개들을 새로이 접하게 되어 긴 시간동안 즐거울 것 같습니다.

세 분 선생님께서도 서신 교환에 앞서 정체(?)를 밝히셨듯이 저도 무신론자라는 정체를 밝히고 편지를 시작 하겠습니다. 세 분 선생님께서는 어떠실지 모르겠지만 일반인들의 생활에서 정치와 종교는 대화에서 금기입니다. 정치는 좀 다를 수 있겠지만 상대방의 종교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대단한 무례로 취급받습니다. 얼마 전 방송에서 종교계의 비리를 다뤘을 때에도 일반적인 사회 비리를 다뤘을 때와는 달리 술자리에서 대화가 상당히 조심스러웠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공개적으로 종교와 과학에 대한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이런 자리가 아니면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왜 일반인들 사이에서 종교에 관한 대화는 금기일까요? 제 생각에 종교는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의 문제입니다. 그 믿음은 단순히 사실을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을 인식하는 틀의 문제이기에 자신의 존재에 관한 이야기가 됩니다. 종교라는 인식 틀로 세상을 보고 있는데 그 인식 틀을 부정하면 자신의 존재도 사라지기 때문에 종교에 관해서는 비타협적으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종교에 관한 이야기는 자신의 존재에 관한 공격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따라서 대화에서는 금기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인식의 틀에 관한 것이 종교와 과학의 끝없는 논쟁의 시작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같은 무신론자 입장에서도 종교적으로 세상을 인식하는 것은 절대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나는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면 차가 나아가는 세상에 살고 있는데,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이러니 종교와 과학은 적절한 타협이 나온다고 하더라도 그 것은 일시적인 휴전이 아닌가 합니다. 서로가 세상을 인식하는 틀이 다르니 투항자는 있어도 어느 한 쪽의 승리 이전에는 결론이 나지 않을 듯합니다.

저의 이러한 견해는 문화인류학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제가 읽고 이해한 내용을 거칠게 요약해 본다면, 건물 옆에 있던 사람이 건물이 무너져 다쳤다고 했을 때 모든 인간은 왜 그랬는지를 설명하려고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합리성이라는 것이 자신의 인식의 틀 안에서 설명할 수 있을 때 합리적인 것인데 과학적으로 사고하는 사람들은 부실공사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왜 그 시간에 그 사람이 거기에 있었는지 나비이론을 이용해서라도 그 시간에 북경에서 나비가 날개 짓을 했는지까지 고민합니다. 그러다가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 있으면 아직 잘 모르겠다, 이런 결론을 내립니다. 하지만 종교적으로 사고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인식하지 못 하는 부분은 신의 뜻이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초자연적 존재를 설정하여 합리성을 완성하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신재식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종교와 과학의 대화에서 그리스도교로 쏠림 현상은 역사적 경험과 더불어 그리스도교 담론의 성격과도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습니다"는 주장은 근거가 희박하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서양 정신에서 '로고스 중심주의'는 서양이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 특성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인류의 보편적 특성으로서의 합리성이 기독교를 넘어서 이슬람교, 불교 혹은 기타 다른 종교를 설명하는데 더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인류의 보편적 특성인 합리성이 종교와 과학 간의 대립을 만들어 내고 제가 무신론자일 수밖에 없는 이유인 듯합니다. 세상을 인식하는 틀로서는 종교보다는 과학이 오류가 더 적으니까요.

도킨스의 책을 읽어 보지는 않았습니다. 주위에서 재미있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저에게는 '만들어진 신'이라는 것이 새로울 게 없는 것이어서 별다른 흥미를 끌지 못 했습니다. 오히려 더 공격적인(?) 제목을 붙인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신은 위대하지 않다>(김승욱 옮김, 알마 펴냄)를 재밌게 읽었습니다. 제 옆자리 동료가 독실한 크리스천인데 보란 듯이 책꽂이 꽂아놨습니다. 그 분도 관심을 갖길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제 동료가 요즘 저 때문에 피곤할 듯합니다. 제가 동료를 개종시키려고 많이 노력 중입니다.

이러한 제 마음이 요즘 들어 과학과 종교의 대화가 늘어난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제 경험의 작은 범위이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과학과 종교의 대화에서 우선적으로 대화를 주도한 것은 종교였습니다. 비종교인을 종교인으로 만들려는 노력이었죠. 어떻게든 종교를 대화의 소재로 삼아서 전도를 하려고 했습니다. 저 같은 무신론자들은 그 대화가 어떻게든 빨리 끝나기를 바라며 종교인들을 흔히 말하는 '도를 믿으십니까?'로 치부해 버렸습니다. 그 만큼 과학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당연시 되는 분위기였습니다. 종교란 개인적인 것이며 공적인 영역으로 나오지 않는 것이었으니까요. 나오면 무시되는 분위기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습니다. 종교인들이 공적인 영역으로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과학으로 세상을 인식하는 사람들에게는 큰 위기감이었습니다. 도킨스의 표현대로 종교가 바이러스라면 그다지 큰 피해를 주지 않을 때는 넘어가려고 했지만 이제 숙주의 생존을 위협할만한 상황이 되었기에 참을 수 없다는 표현이 적당할 듯합니다.
▲"종교가 인간의 유한성을 넘어서고자 '절대'를 설정하는 순간부터 종교는 모순에 빠집니다." ⓒ뉴시스

직장에서 저는 공공의 적입니다. 다들 피하려는 종교적 대화를 앞장서서 끌어내고 종교인을 공격합니다. 종교인들은 저를 상당히 불편해 합니다. 자신들의 논리에서 취약한 고리를 계속해서 짚어내거든요. 만약 광신도라면 저를 사탄을 보듯 하겠지만 대부분의 종교인들은 과학적 사고 안에서 생활을 하고 있으니 제 말을 전적으로 부정하지는 못 합니다. 제가 가진 인식 틀과 자신의 인식 틀이 맞는 부분이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더 큰 인식 틀을 부정해 버리니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라서 어쩌지를 못 하고 불편해하고 대화를 피하려고 합니다. 저는 계속해서 그 불편함을 자극하여 개종을 시키려고 합니다.

어떤 이들은 서로 삶의 방식이 다르니 그 사람의 삶의 방식을 존중하라고 하지만 저는 그러지를 못하겠습니다. 종교적 삶의 방식이 개인의 생활만을 규정하는 것이라면 모르겠지만 우리는 개인의 삶의 총합으로서의 사회를 구성하고 그 사회의 일부분인 개인으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식 틀은 하나만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독선적이라고 할 수 도 있겠지만 현대 사회에서 왕정이나 독재를 나름의 정치 방식이라고 인정할 수 없듯이 종교적 인식의 틀은 우리가 사회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데 방해가 되고 있습니다. 신정국가라는 비아냥거림을 듣고 있는 미국의 예를 보듯이 말입니다.

과학적 인식의 틀은 인간의 유한성을 알기에 절대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늘 끊임없이 오류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오류를 최소화 하려고 합니다. 종교가 인간의 유한성을 넘어서기 위해 절대를 설정하는 순간부터 종교는 모순에 빠진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글을 시작할 때는 세 분 선생님의 이야기에 대한 감상문 정도로 생각했는데 막상 쓰다 보니 공격적 무신론자의 종교 깨뜨리기가 되어버렸습니다. 중간 중간 글이 엉킨 부분이 많아서 부끄럽기도 하지만 세 분 선생님께 더 많은 조개를 바라는 후학의 칭얼거림이라고 너그럽게 생각해 주십시오.

2008년 5월 29일

한 독자(gunship0) 드림.

종교와 과학, 왜 서로 존중해야 하는가

오늘도 나는 러시아 시베리아에 위치한 한 도시의 공원 주변을 뛰었다. 건강 관리를 위해 1년 넘게 해 온 일이다. 격일(隔日)로 뛰는 공원의 둘레가 얼마나 긴지 알고 싶었다. 뛰는 걸음은 항상 일정하므로 한 바퀴 도는데 몇 발자국을 떼는지 알면 되었다. 처음 입으로 발걸음을 세다가 입을 다물고 속으로 셌다. 몸의 발은 뛰지만 마음은 그 발걸음을 세고 있다. 몸과 마음은 별도로 움직이지만 충돌도 그리고 대립도 없고 잘 협력했다.

갑자기 이 사실이 신기롭게 느껴졌다. 최근 <프레시안>에 연재되는 종교와 과학의 대화라는 기사를 읽고 난 후라 더 그랬다. 기사를 쓰는 학자는 과학을 옹호하며 종교의 무용론을 주장하거나 과학과 무관하게 종교의 필요성을 말하며 반박하기도 한다. 몸과 마음 사이 관계를 과학과 종교 사이 관계로 바꾸어 생각하기로 했다.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몸과 마음은 공유하며 서로 의존하지만 분명히 별도의 존재들이다. 이들은 서로 대립하지 않고 협력하며 공존한다. 몸이 없으면 마음은 자신을 표현할 방법이 없다. 그러나 마음이 없다면 몸은 물질(物質)이라는 육신(肉身)으로 끝난다. 이 둘 사이를 구태여 이분법적(二分法的) 사고로 이해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 사고가 사람들 사이 유행한다. 마음을 중요하게 보는 사람들은 물질인 몸을 핍박한다. 이들은 금욕주의자들이다. 그러나 몸을 마음보다 더 중요하게 보는 사람들은 몸의 느낌을 따라 살기를 좋아한다. 이들은 쾌락주의자들이다. 이들의 이분법적인 사고는 모두 이원론적(二元論的)인 그리스 철학이나 동양 철학의 영향 때문이다.

몸과 마음 사이 이분법적인 대립도 있지만 사실은 서로에게 의존적이다. 마음이라는 사람의 인격은 몸으로 표현되며 그렇게 표현된 사람을 겉 사람이라 부른다. 사람들은 바로 겉 사람의 도움으로 인격적으로 서로 교재 한다. 그러나 진짜 사람은 마음 즉 속 사람이다. 문제는 때때로 겉 사람과 속 사람 사이 차이가 발견된다는 것이다. 사람의 인격에 따라 겉 사람과 속 사람은 항상 같지 않다. 사람들이 겉 사람을 통해 마음의 동기를 읽고자 노력하는 이유이다.

문제가 또 발견된다. 겉 사람이 아닌 진짜 사람인 속 사람을 찾아내기 위해 몸을 해부(解剖)하지만 찾아지지 않는다. 몸은 정신을 담고 있는 물질 즉 용기(用器)에 지나지 않는다. 과학적으로 몸의 구성물이 무엇인가 알아낼 수는 있지만 그것으로 끝난다. 생명의 원천이 어디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실험실에서 청개구리를 해부하지만 실패하고 청개구리만 죽인 것과 같은 결과이다. 마찬가지로 과학적인 방법으로 인간의 마음을 찾아낼 길은 없다. 그러나 몸 안에 마음 즉 사람의 인격이 존재하는 것 또한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가하고 과학자들은 인간을 연구한다며 위의 방법을 고집한다. 학자들은 인간의 심리를 유물론적(唯物論的)인 관점에서 이해하려 한다. 인간의 사랑이라는 감정도 인간 몸 안에서 일어나는 화학적인 반응의 결과라고 이들은 이해한다. 물론 몸은 인간 마음에 영향을 미친다. 사람들이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러나 사람이 불행할 때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입에선 쓰다고 느낀다. 이 두 상반된 사실은 마음과 몸이 대립적이지 않고 유기적(有機的)인 관계 아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학자들은 자신의 학적 권위를 주장하기 위해 이런 유기적(有機的)인 관계를 무시하고 어느 한 쪽에 치우쳐 고집을 부린다. 유물론자들은 인간을 물질 관점에서, 어떤 학자는 동물적인 성본능에서, 다른 학자는 심리학적 관점에서 그리고 종교인들은 영적 관점에서 인간을 본다. 유감스럽지만 이들은 인간을 부분적으로 볼 뿐이다. 아니면 부분적인 것들을 서로 대립시키거나 이들 중 어느 하나에 치우친다.

그러나 이들 사이 유기적 관계를 고려하여 인간을 종합적으로 또는 전인적(全人的)으로 연구해야 할 것이다. 인간은 물질적(物質的)이며 동물적(動物的)인 존재이지만 이들을 초월하는 정신적(精神的)인 존재이면서 동시에 영적(靈的)이다. 위에서 이미 말한 대로 인간은 물질(物質)에 의해 좌우되지만 또한 물욕(物慾)을 극복하기도 한다. 성적(性的) 본능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인간은 고매한 사상이나 철학 덕분에 낮은 수준의 정신 작용을 또한 극복하기도 한다. 인간이 물질적인 존재만은 아니란 뜻이다.

어떻게 이것들이 가능한가? 인간은 영적(靈的) 존재이기 때문이다. 영(靈)은 이원론적인 차원에서 이미 물질적(物質的)인 현상계를 뛰어넘는 의미를 갖는다. 인간 안에 영이 존재함으로 인간은 신적(神的) 영역을 공유한다. 즉 신(神)에 버금가는 인격(人格)을 소유한다. 기독교 성경은 이것을 분명히 한다. 인간을 창조할 때 하나님은 자신의 호흡을 인간의 코를 통해 불어 넣었고 그 결과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가 되었다(창세기 2장 7절).

여기 하나님의 호흡은 물질적인 현상으로 표현된 역동적인 힘이다. 이 신적 호흡에 의해 흙이라는 물질적인 존재에 지나지 않는 사람은 인간(人間)이 되었고 그 안에 정신과 동물적인 생명도 나타났다. 이로써 인간은 영적(종교적), 정신적(사회윤리적), 동물적(성본능적) 그리고 물질적(경제적)인 존재가 되었다. 이 덕분에 인간은 신적(神的) 존재이면서도 자연적(自然的)인 존재가 되어 창조주 하나님 대신 자연 만물을 다스릴 권세를 가졌다. 이를 위해 창조주는 인간에게 은사, 즉 지혜와 능력을 주었다. 이렇게 인간에게 영이 근본적이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현상적인 몸의 활동은 사람 속에 있는 영의 존재 덕분이다. 물론 이것은 기독교 성경의 주장이다. 그러나 기독교 성경이 아니더라도 종교는 인류와 문화와 함께 고대로부터 존재한다. 이 덕분에 인류 사회는 현상계를 초월하여 신(神), 영(靈) 그리고 사후(死後)의 세계를 생각한다. 이런 사색(思索)이 현상계의 삶에 어떤 식으로든지 영향을 미친다. 그렇게 현상계에만 붙잡히지 않는 유익을 얻는다. 즉 폐쇄적인 세계를 벗어나 보다 더 넓은 개방적인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위의 주장은 종교와 과학을 분리시키거나 대립시키는 방법으로 종교와 과학 사이 대화 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이 둘을 하나로 묶자는 뜻도 아니다. 이 둘은 분명히 독자적으로 존재하지만 서로 유기적(有機的)인 관계 아래 있다. 이 관계를 파괴시킴이 없이 종교와 과학의 대화를 생각해야 한다.

기독교 성경에 의하면 종교는 삶의 의미와 목적 그리고 가치가 무엇인가 가르쳐 준다. 그리고 과학은 종교가 주는 의미와 가치를 실현시키는 수단과 방법이 된다. 이것은 인간의 정신적인 존재인 마음이 물질에 지나지 않는 몸을 통해 표현됨과 같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한 후 자신을 대신하여 자연 만물을 다스릴 것을 명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1장 28절) 이 명령은 신학자들은'문화 명령'이라고 명명한다. 문화 명령은 내용상 둘로 나누어진다.

첫 명령에 의해 인류 사회는 이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해야 한다. 그리고 둘째 명령에 의해 인류 사회는 자연 만물을 잘 다스려야 한다. 첫째와 둘째 명령은 한 명령에 속한다. 왜 그런가? 인류 사회의 생육과 번성 그리고 땅에 충만은 자연 만물의 성공적인 통치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흙에서 기원했다. 인류는 이 지구를 떠나 생존할 수 없다. 흙에서 나는 것으로 의식주(衣食住)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 두 명령은 과학 분야와 연결된다. 첫째 명령은 오늘날 인문사회과학 분야에 속한다면 둘째 명령은 자연과학 분야에 속한다. 기독교 성경의 창조주는 인류 사회가 과학의 발전에 힘써야 한다고 명령했다. 그것은 인류 사회의 공동 번영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과학은 과학 자체로 끝나지 않는다. 과학에도 목적이 있다.

하나님이 명한 문화 명령에 의하면 그 목적은 인류 사회의 공동 번영이다. 그렇다면 인문사회과학이든지 자연과학이든지 모든 과학은 반드시 윤리적이어야 한다고 기독교 성경은 주장한다. 그리고 윤리의 핵심 정신은 바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여 이웃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인류 사회는 인문사화 과학과 자연과학의 발전을 열심히 도모하여야 한다.

기독교 성경에 의하면 종교와 과학 사이 대화는 참으로 멋지다. 지금까지 우리가 잘못 이해했듯이 종교와 과학 사이 어떤 대립이나 충돌 또는 갈등도 발견되지 않는다. 기독교 성경에 의하면 종교 즉 기독교가 왕성할수록 과학도 자연스럽게 발전해야 한다. 기독교 교회사가 이를 잘 증명한다. 기독교 복음이 왕성한 시대 교육과 과학이 발전하며 사회와 나라도 모든 면에서 왕성하게 발전하고 성장했다. 이것은 기독교를 일찍 받아들인 서구 유럽과 미국이 잘 증명한다. 민주주의 제도는 이들 나라에서 발전했고 지금도 이들 나라들이 세계사를 좌지우지한다. 물론 오늘날 이들 나라들이 흔들리고 있지만….

그렇다면 오늘날 종교와 과학의 대화 문제가 왜 나오는가? 이들을 대하는 학자가 이원론적(二元論的)인 이분법적 사고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아니면 종교나 과학을 둘 중 어느 하나로 통합시키려는 일원론적(一元論的) 사고 때문이다. 종교를 무시하는 학자는 과학을 높이 평가하지만 사실 과학이란 가치중립적이다. 그래서 위험하다.

칼이 살인용이나 수술용, 둘 중 어느 하나로 사용될 수 있듯이 과학도 그렇다. 무신론자의 손에서 과학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무기로 사용되었다. 과거 공산주의와 이의 추종자들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탐욕스런 자에게 과학이 넘어가도 결과는 같다. 다이너마이트나 총기처럼…. 반면 종교가 과학을 지배한다면 중세 유럽처럼 인류 사회는 또 다시 암흑기에 처하게 될 것이다.

종교와 과학, 모두 각자 자신의 영역에서 활동하도록 내버려 두고 그리고 서로 존중하게 하라! 그러나 과학은 현상계를 취급하므로 자신의 한계를 알고 종교에서 의미와 가치를 얻도록 해야 한다. 과학은 몸을 물질 차원에서 연구할 뿐이다. 과학은 인간의 마음과 영을 알아낼 수 없다. 이성(理性)의 이런 한계를 인식한 임마누엘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신의 존재, 인간의 영 그리고 사후 세계의 문제는 인간의 이성(理性)으로 알기 불가능하므로 실천 이성 즉 윤리를 더 중요시하자고 제안했다.

과학의 급속한 발전 덕분에 입증된 과학적인 주장도 그 유효 기간이 10년도 채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과학이 가치와 의미 분야까지 주장하려 한다면 새로운 과학이론이 나올 때마다 인간의 윤리 또한 달라져야 할 것이다. 이런 급속하고도 자주 일어나는 변화들은 인류 사회를 더 혼란시킬 뿐이다. 그리고 완전한 방법으로 입증되지 않는 다양한 과학 이론들 또한 인류 사회아는 공동체를 더욱 분열시킬 뿐이다.

그리고 모든 사회 현상과 자연 현상은 유기적인 구조 아래 서로 연결되어 발생한다. 과학이 어느 한 분야를 잘 안다고 그 유기적 구조를 다 이해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부분적인 과학 지식에 의존하여 의미와 가치를 함부로 바꾼다면 그 결과 나타난 파괴력과 피해는 지나칠 정도로 클 것이다. 물리학은 이미 이 위기를 깨닫고 통합적인 방법으로 과학 하려고 한다.

그러나 설사 이것이 가능해도 과학은 여전히 불완전함에 노출된다. 인간 인식의 불완전함 때문이며 그 결과 나온 불완전한 지식이 앞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을 인간은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까지 가능할 때 인간은 과학에 의존하여 살 수 있을 것이다.

과거 종교가 절대적인 위치에 오름으로 인류 사회 발전을 저해했다. 마찬가지로 과학이 그 자리를 노리는 것 또한 지극히 위험하다. 종교와 과학은 서로 겸손하게 서로를 존중하며 어떻게 하면 인류 사회의 공동 번영에 기여할 것인가 하는 공동 목표 달성을 위해 협력할 줄 알아야 한다. 이를 위해 어느 때는 서로 견제하며 다른 때는 서로 협력하는 그런 관계를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몸과 마음 사이 관계에 근거하여 종교와 과학의 대화에 대한 소견을 올렸다. 이런 유추가 결론을 내리는데 도움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읽는 독자들의 평안을 빈다!

2008년 6월 3일

러시아 시베리아에서 선교사 장창수 드림.

공허한 담론의 과잉 넘침

왜 종교와 과학 얘기를 <프레시안>에서 시작했는지 모르나 이 논의에 참여하는 분들은 '공연하게 너무' 많은 말을 한다는 인상이지만 그렇다고 '핵심'을 찔러 들어가지도 못하다는 인상입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는 안 그러했는지 모르지만 전통적으로 '우주'가 어떻게 생겼고 하는 얘기를 '자신의 담론'속에 담아왔기 때문에 늘 '과학'과 충돌해왔습니다. 너무도 뻔한 얘기죠. 갈릴레이가 교황을 친구로 두었기에 과감하게 지구는 돈다고 말했지만, 당대의 기독교는 '지구는 돈다'는 세계관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요컨대 종교적 목적에 의해서, '세계'를 스스로 창조해 놓고 거기 어긋나는 얘기들에 '불온'의 딱지를 씌워 탄압했죠.

그래서 고전 그리스 시대의 자유 또는 합리성에도 못 미치는 수준으로 떨어졌었던 것입니다. 이런 기독교 전통은 1800년대 다윈의 '진화론'을 둘러싼 논쟁으로 이어지며 심지어 1940년대 독일의 주교들은 '인종론'을 받아들여 유태인 말살에 찬성하는 데까지 이르는데 이것은 '기독교'의 문제라기보다 '기독교'가 '종교'의 본래 정신을 잃고 세속에서 살아가는 하나의 '방편'으로 되면서 빚어진 사태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이런 것은 '종교 현상'이라고 말해야 맞습니다.

내 짧은 견해로, 기독교는 '문제 설정'을 초기에 잘못했기에 과학과 '영역 겹침'이 발생했고 따라서 과학이 하나하나 '증거'에 입각하여 사실을 밝혀갈 때마다 '거부' 또는 '수용'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했는데 역사는 늘 '거부'했음을 보여줍니다.

가령 1700년대 말에서 1800대 초까지 석탄 채굴이 엄청나게 늘고 다량의 화석이 발견되면서, '생물'이 점점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진화함이 '눈으로 확인'될 정도가 되었지만 당대의 기독교는 가령 '창조 후 지구의 역사는 약 4000년 경과했다'는 얘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과학자들이 100여 년에 걸친 여러 가지 연구를 통해서 45억 년으로 바꿔놓았지만, 45억 년이 '과학적 결과'라고 해서 4000년이라는 종교적 해석보다 더 뛰어나다거나 이런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하여튼 '문헌'에 의지하는 기독교 해석보다 실제 사람이면 누구나 가진 감각기관에 의존한 관찰과 추리 논증을 통해서 얻어진 과학적 해석이 더 사실에 가까웠던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애초 종교에서 이런 영역에서 '논쟁'을 하게 되는 이유는 '진리' 해석의 독점 때문이기도 하죠.

왜 영국 국교의 주교가 '진화론' 논쟁에 나서서 "사람이 원숭이에게서 진화해 나왔을 리가 없다"라는 것을 설파해야 합니까? '사람이 원숭이보다 못할 리 없다'고 하면서도 맬더스-내 기억에 아마 기독교 성직자였는데-같이 빈민은 구제할 가치가 없다 이런 세계관을 함께 가졌으니 문제설정이 양쪽으로 잘못됐던 것입니다.

애초에 '성스러움'을 설정해 놓은 틀 자체가 잘못인데다가 '진리의 독점적 해석'까지 가지려했으니 더 잘못된 것입니다. 성스러움의 틀 속에도 모든 인간을 다 넣는 것도 아니었으니 두 말할 나위 없습니다.

처음 문제설정이 기독교와 다른 종교가 불교입니다. 종교의 우위를 따질 이유는 없습니다. 단지 인류 사회에 존재해온 문화 현상일 따름인데 그 차이가 있다는 얘기일 뿐입니다. 불교는 '과학'과 충돌할 일이 없었습니다. 초기부터 부처님께서 이미 '말륜카'라는 '과학적 의문'을 가진 비구에게 독화살의 비유로 말씀을 다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이 비구는 '우주는 어떻게 생겼는가? 우주의 시초는 어떻게 발생했는가'와 같은 과학적 의문에서부터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부처님이 입멸하시면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의식은 남는가 사라지는가"와 같이 종교적이면서도 과학적이기도 한 듯한 이런 의문을 가졌습니다.
지금도 이런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있으며 말륜카는 특이해서 과학적 의문과 종교적 의문을 다 가진 비구였습니다.

실제로 '우주의 시초는 무엇인가'라는 의문만을 가진 사람들은 결코 '종교'에 들어오지 않았고 그 사람들의 전통이 가령 갈릴레이나 다윈과 같이 보다 사실에 입각하여 '진실'에 가까운 얘기를 하는 전통에 닿은 것이죠. 말륜카가 만일 '죽은 후에 의식이 존재하는가 아닌가'와 같은 의문을 보다 존재론적으로 추구했고 부처님 설법을 알아듣지 못했다면 환속해서 '과학자'의 길을 걸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과학자의 지향과 종교인의 지향을 모두 가진 비구였던 것이고 부처님 가르침 덕분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륜카 비구에게 말씀하신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독화살 맞은 사람이 있을 때 화살을 골똘히 보면서 어디서 날라 왔나? 화살대 나무 재질은? 독의 종류는?" 이러는 동안 그 사람 죽는다. 지금 당장 할 일은 독화살을 뽑는 것이야. 말륜카 비구여, 나는 사람을 살리는 가르침을 전할 뿐이다. 고통이 무엇이고 어떻게 발생하고 어떻게 소멸되며 벗어날 수 있는지만을 '가르칠' 뿐이다"

이것으로 논쟁이 끝난 것입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건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건 불교의 '체계'에서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지나칠 정도로 현대 물리학의 발견이 불교와 일치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무리하게 하는 경우는 있습니다. 하지만 입자물리학이 공 사상과 일치한다 아니다 이런 것은 불교의 체계에서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입니다. 지금 당장 고를 덜고 해탈을 얻어 행복하게 사는 것이 중요한 문제 설정이기 때문이죠.

단, 줄기세포와 관련해 한국 불교에서 보여준 태도는 사실상 금강경의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대한 가르침을 저버린 채 이른바 '민족상'에 집착한 결과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뭐 틀린 생각이라도 상관없고. 그것도 물론 일부의 문제이지만. 이번에는 대운하를 반대하니 조금 나아진 것일까요?

그래서 이와 같은 글은 이제 그만 썼으면 합니다. 차라리 개신교가 왜 비틀거리는 제국 미국에 매달리는지 사회학적 분석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2008년 5월 31일

한 독자(사띠현정)의 의견

종교와 과학이라는 두 가지 미신

제가 '생각'하기엔 '진리'에 대한 가장 정직한 태도는 아무래도 '불가지론'이 아닐까 합니다.

세계에는 과학의 '분명한' 지식으로 해결될 수 없는 '분명하지 않은' 어떤 것들이 '분명히' 있으며, 종교적 계시로 인한 '분명한' 설명으로 그 '분명하지 않은' 어떤 것들이 해결되었다고 볼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종교에 대해선 제가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이 비판을 하고 있으니 공연히 추가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생략하고 과학에 대해서만 몇 가지 지적하고자 합니다.

철학이나 물리학도 아닌 진화생물학에서 '통섭'을 말하고 '밈'이론으로 종교를 설명하려는 태도는 일단 난센스이며 하나의 직업병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이런 태도는 자신이 아는 분야로 전체를 해석하려는 '일반화의 오류'가 아닐 수 없으며 학문의 지나친 분화로 인한 어떤 부작용으로 보입니다.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행위가 과학이 아니라 일종의 종교 활동에 속한다는 사실도 잘 모르고 있는 듯 하구요.

분별력 있는 과학자라면 '과학적 진리'가 '과학자들의 합의'에 의한 임시적이고 개연적인 진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포퍼와 쿤의 과학철학 논쟁에서 보여주고 있듯이 말이죠. 그런데 왜 그렇게 무리한 주장을 하는 것일까요? 과학자가 유신론자일 수도 있고 무신론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구분은 필요합니다. 유신론자들이 자신의 과학 이론을 종교를 합리화 하는데 갖다 쓰는 것이 난센스이듯이 무신론도 이에 대해서는 동등한 대접을 받아야 공평한 태도일 것입니다.

뉴턴과 라이프니츠의 영향을 받아 '합리론'의 관점을 견지했던 '칸트'가 데이비드 흄의 인성론을 읽고 했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나는 오랜 기간의 독단의 선잠에서 깨어났다.

과학과 종교의 형이상학적 전제는 둘 다 '독단의 선잠'에 들어 있는 것이며 아직까지도 깨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우리의 삶에 그 영향력을 크게 미치고 있는 이유는 (제가 보기엔) 그 진리성 때문이 아니라 실용적 가치 때문이라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군요.

과학이 우선 할 일은 자신의 환원론적 이론을 전체에 들이미는 '통섭'을 주장할 것이 아니라 '자본과 기술'의 우위에서 진리를 추구해야 할 과학이 오히려 지금까지 '자본과 기술'의 시녀 노릇을 해 왔다는 반성을 먼저 해야 하는 것이 순서일 듯합니다.

2008년 6월 5일

한 독자(오디세우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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