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욱이 100일은 평가를 받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다. 하지만 문제는 "갓 태어난 아기도 제 엄마와 아빠를 알아본다"는 100일이 되도록 "아주 기초적인 청사진조차 없다"는 것이다. '잃어버린 10년'을 뼈를 깎으며 기다리고 기다려 얻은 정권이 노동·사회 분야 정책에 대한 기본 철학조차 없다는 것은 몇 번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치명적인 결함이었다.
지난달 30일 경실련과 <프레시안>이 공동주최한 '이명박 정부 100일, 무엇이 문제인가' 노동부문 토론회에서는 발제자도 토론자도 한 목소리로 입을 모았다. "대체 이명박 정부의 노동 정책의 기본 방향조차 모르겠다." 학자도, 노동계도, 경영계도 마찬가지였다. 정권 출범 100일이 넘도록 없었던 철학이 뒤늦게라도 만들어질 수 있을까?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
"노동정책이 경제정책에 수렴되고 있다"
이종구 성공회대 교수는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사를 통해 본 결과, "현 정부는 노동정책을 노사 분규 대책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다시 말하면, '어떻게 하면 파업을 최소화할까, 어떻게 하면 노사분규를 줄일 수 있을까'가 이명박 정부의 노동정책의 전부라는 것이다.
취임사에서 이 대통령은 "투쟁의 시대를 끝내고 동반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 기업도 노조도 서로 양보하고 한걸음씩 다가서야 한다"고 말했었다. 노동분야 최대 현안인 비정규직 대책이나 고용 확대 유도 정책에 대한 언급은 아예 없었다.
노사분규를 '절대악'으로 보는 이 정부의 시각에 대해, 이종구 교수는 "이는 과거 1970년대의 인식"이라고 비판했다. "노동문제가 공안문제이자 곧 치안문제이던 시절의 인식을 그대로 부활시키고 있다"는 것.
현 정부의 노동정책이란 결국 '경제 살리기'를 위한 조건 만들기에 다르지 않다. 문제는 과연 노동정책의 '존재감'이 그토록 가벼워도 되는가이다. 은수미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의 말은 이렇다.
"정부의 존재 이유와 기업의 존재 이유는 다르다. 그런 면에서 노동정책의 존재 이유와 경제정책의 존재 이유도 달라야 한다. 그런데 노동정책이 경제정책과 유사해 보이면 노동정책이 없다는 표현이 나오는 것이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보호받아야 할 사람들이 존재한다. 비록 통계청은 최근 기간제 비정규직 규모가 올해 처음으로 감소했다고 발표했지만, "여전히 물에 빠진 10명 가운데 구해내지 못한 8명이 있다"는 것이 은 연구위원의 말이었다.
"경제정책에서라면 그들을 구해내는 것을 '규제'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동정책에서조차 그것을 규제라고 봐서는 안 된다. 아직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8명에 대한 대책을 내놓는 것이 노동정책이다."
꿈쩍않는 정부…"이념지향적인 노 정부 경험 때문에 비판하는 것일 뿐"
전문가들은 이렇게 충고했지만, 노동부는 꿈쩍하지 않았다. 이날 정부 측 토론자로 나온 김왕 노동부 노사협력정책과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 살리기를 통한 일자리 창출이 가장 시급한 노동정책'이라며 은 연구위원에 맞섰다.
근거는 "우리 헌법상 근로의 권리가 노동자의 단결권, 단체교섭권 등 이미 근로자가 된 사람들이 갖는 권리보다 우선적인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은 연구위원이 언급한 8명은 '단결권, 단체교섭권'조차 가지지 못한 파견·용역 등 '더 열악한 비정규직'에 대한 보호였지만, 김 국장은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노동자의 권리보다 실업자의 보호가 급한 것 아니냐는 논리로 반박하고 있었다.
더욱이 김 국장은 "이념지향적인 노무현 정부가 특이하게 노동정책이 도드라졌던 것일 뿐"이라는 주장도 내놓았다. 김 국장의 말이다.
"노동정책이 없다고들 얘기하는데, 참여정부의 경험 때문이 아닌가 싶다. 참여정부는 그 이전의 정부가 추진하던 것과는 상당히 다른 내용을 많이 내놓았다. 왜냐면 지난 정부는 이념지향성을 강하게 가진 정부였다. 그러니 당연히 이념을 분명히 드러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었다. 하지만 이 정부는 실용정부다."
김 국장은 "실용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이념 지향성이 안 드러나는 것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노사민정 협의회 통한 무파업? "파업 이만큼 뿐인 것이 더 이해하기 힘들다"
이명박 정부가 생각하는 노동부문에서의 '실용'의 내용은 새 정부가 거의 유일하게 내놓은 '지역단위 노·사·민·정 협의회'를 통해 알 수 있다. 지역단위에서 사회협약을 맺어 노사협력 분위기를 조성하겠다는 것이다. 잘 되는 곳에는 교부세 등 인센티브도 주겠다고 '유인'하고 있다.
하지만 이 역시 결국은 '무파업 선언'을 이끌어내겠다는 것이 핵심이다. 노사분규 억제책인 것이다. 당연히 노동계는 양대 노총 구분 없이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우태현 한국노총 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전시행정일 뿐이고 권위주의시대의 발상"이라고 혹평했고, 김경란 민주노총 정책국장도 "대화의 일주체인 노동계의 항복을 전제로 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특이한 것은 사용자 단체도 그리 긍정적으로 보지는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최승노 자유기업원 대외협력실장은 "노사 대표 단체들이 모여 협정 맺는다는 것은 어찌 보면 의회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행위"라고 반대 의사를 피력했다.
전문가들도 부정적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종구 교수는 "제안 자체는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면서도 "관(官) 주도의 노사협력 행사라는 인상을 줄 우려를 뛰어 넘어 실효성을 가지려면 노사가 '민'의 중립성과 공익성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민'을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더욱이 비정규직 노동자가 증가하고 노조 조직율은 날이 갈수록 줄어드는 상황 속에서 최근의 노동쟁의는 비정규직을 중심으로 장기간 이어지고 있다. 얼마 전 파업 1000일을 넘긴 기륭전자 노동자, 800일을 넘긴 KTX 승무원, 300일을 넘긴 이랜드 노동자 등 최근 장기화되는 노동쟁의는 모두 비정규직 문제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 같은 원인에 대한 분석이 없이 '양보'만을 강조하는 것은 실질적인 대책이 되지 못한다. 왜 노동쟁의가 발생하는지에 대한 냉철한 평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은수미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의 사회보장 지출 비중은 전 세계에서 멕시코 다음으로 낮다. 뒤에서 2등이다. 단체협약에 의해 적용되는 노동자 비율은 전 세계 꼴찌다. 비정규직 비율? 세계 1~2위를 다툰다. 저임금 근로자 비중은 세계에서 가장 높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사각지대가 엄청나게 많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노동쟁의 일수가 OECD 평균의 2배 밖에 안 된다. 오히려 그게 더 이해하기 힘들다."
"법과 질서, 불신 해소할 만큼 정부가 공정성 발휘해야 의미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초반부터 줄기차게 강조하고 있는 '법치주의'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재성찰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과연 정부가 공정하게 노사 모두에게 법질서를 지킬 것을 요구하고 있냐는 말이었다.
김인재 인하대 교수는 "노사관계에서 법치주의를 얘기할 때 뿌리 깊은 불신이 있다"고 말했다. "결국 사용자가 아니라 노동자에게만 법을 강요하는 것 아닌가하는 불신"에 대한 말이었다.
이종구 교수도 같은 지적을 내놓았다. "불법파견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노동부과 검찰까지 불법파견 판정을 내렸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던 기륭전자"의 예를 들었다. 이 교수는 "법치주의가 사용자보다 노동자에게 엄격하게 적용되고 있다는 의구심을 불식시킬 정도로 정부가 공공성을 발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취임 100일도 안 돼 거센 국민적 저항에 부딪히고 있는 이명박 정부는 과연 이 같은 충고를 귀담아 들을까?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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