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집회에 여러 번 나오다보니, 이제 익숙한 얼굴이 생겼어요."
"낯선 사람들이지만, 모두 오래 사귄 친구 같아요."
30일 저녁 7시께, 서울 지하철 시청역 계단을 걸어 나오는 대학생들이 들려준 이야기다. 광우병의 비극과 권력의 독선으로부터 우리 모두의 건강한 미래를 지키겠다는 뜻으로 모인 3만여 명의 시민들 사이에서 흐르는 것은 분명 따뜻한 정이었다.
주머니를 털어 생수와 김밥을 나눠주는 시민들
이날 한 택시 기사는 자비를 털어 김밥 500줄과 생수 300병을 23번째 촛불 문화제가 열린 서울광장에 전했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자발적으로 구성된 모임에서 마련한 생수 5000여 병과 초코바 1800여개도 이날 서울광장에 모인 시민들에게 전달됐다. 또 한 온라인 재테크 동호회 회원은 박카스를 박스째 사서 나눠주는 일을 계속 했다. 그는 기자가 다가가자 "사람들이 목마를까봐서요"라며 웃기만 했다.
하루 전과 마찬가지로 예비군복을 입고 나온 한 시민은 "아이들이 많이 참석한 집회라서 다치는 사람이 생길까 두려워 오늘도 나왔다. 촛불을 든 시민 한명 한명이 다 남 같지가 않다. 부지런히 뛰면서 시민들을 보호 하겠다"라고 말했다.
연단에 선 사회자가 최근 이명박 정부 퇴진을 요구하며 자신의 몸에 불을 지른 이병렬 씨에 대해 이야기하자, 광장은 숙연해졌다. 흔들리는 촛불만이 안타까움으로 두근대는 3만여 개의 심장 소리를 전했다. 서울 한강성심병원에서 피부 이식수술을 받은 이병렬 씨는 현재 인공호흡기에 의존하고 있는 상태다.
"장로를 잘못 뽑은 교회도 반성해야"…"이명박 회개 위한 철야 기도하겠다"
광장에 흐르는 정이 두터울수록 이명박 정권에 대한 분노는 단단해졌다.
경북 고령에서 온 농민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한 농민은 연단에 올라 이날 청와대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 연행된 농민 20여 명의 석방을 호소했다. "무조건 퍼주기만 한 게 어떻게 협상이냐"라고 칼칼하게 외치는 그의 목에서 날선 분노가 함께 튀어나왔다.
목사도 연단에 올랐다. 최근 시위 도중 연행돼 48시간 동안 구금됐던 최재봉 목사다. 최 목사는 "이명박 대통령의 회개를 기원하며 철야 기도를 하겠다"라고 외쳤다. 이어 그는 "장로를 잘못 뽑은 교회도 반성해야 한다"라고 말해 시민들의 웃음을 끌어냈다. 소망교회 장로인 이명박 대통령을 가리킨 말이다.
"월드컵 예선 경기장에서 '이명박 탄핵' 외치자"
영등포에 산다고 밝힌 신 모 씨는 연단에 올라 시민의 분노를 쏟아내는 다양한 방법을 소개해서 관심을 끌었다.
"'이명박 OUT' 등의 구호가 적힌 유인물을 양 면으로 접어 평소에도 들고 다니자. 그걸 햇빛 가리개나 부채로 쓰자. 버스 차창에 붙여서 더 많은 시민이 볼 수 있게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본다. 또 월드컵 예선 아시아지역 시합이 펼쳐지는 경기장에서 관중이 함께 '이명박 탄핵'을 외친다면, 더욱 즐겁게 대통령을 압박할 수 있다."
"장관 고시, 관보 게재를 철회하라"
강기갑 의원은 이날도 '스타'였다. 두루마기를 입고 마이크를 잡은 그는 "통합민주당, 민주노동당, 자유선진당이 국회에서 정부를 규탄하는 행동을 벌였다"라며 "정치권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누구 때문이냐"라고 물었다. 대답은 누구나 알고 있다. 촛불을 든 국민이다.
"국민이 바꿨다"라고 힘주어 외친 강 의원은 "이제 이명박 대통령의 마지막 결단이 남았다"라고 말했다. "장관고시가 관보에 게재되기 전까지는 국제법 효력이 없다. 따라서 쇠고기 협상은 아직 효력이 없다. 이명박 대통령이 관보 게재를 철회하고 국민의 뜻을 따르면 된다"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강 의원이 발언하는 내내 연단에서 눈길을 거두지 않았던 대학생 이윤정 씨는 "이명박 대통령이 도착할 공항 입구에 대형 스크린을 설치해서 집회 상황을 중계하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이날 밤 중국에서 귀국하는 이 대통령을 겨냥한 이야기다.
"한밤의 꿈은 아니리. 오랜 고통 다한 후에.…그날이 오면"
"광우병 위험 쇠고기 수입 반대", "한반도 대운하 건설 반대", "수돗물 민영화 반대", "우열반 가르는 교육정책 반대", "의료 시장화 정책 반대"….
이날 광장에서 만난 시민들은 한두 가지 정책 실수에 대해서만 반대 목소리를 내는 게 아니었다. "이명박 정부의 정책 기조 자체가 틀렸다"라고 입을 모았다.
시민의 분노가 딱딱하게 익어갈 무렵, 가수 윤선애가 무대에 올랐다.
"한밤의 꿈은 아니리. 오랜 고통 다한 후에. 내 형제 그리운 얼굴들. 뜨거운 눈물들. 한 줄기 강물로 흘러…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이 광장에 울려 퍼지는 동안, 이 노래가 익숙한 이들은 나직이 따라 부르며 생각에 잠겼다. 이 노래가 어색한 이들은 가사를 한 줄씩 새기며, 귀를 기울였다.
"과연 '그날'이 올까요?" "6월에도, 7월에도 계속 이렇게 모인다면, 결국 오겠죠."
"주말엔 10만 개의 촛불, 6월엔 100만 개의 촛불을 들자"
30대 직장인 윤성호 씨가 대학 후배와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무렵, 광우병 대책회의 박원석 상황실장이 연단에 섰다. 그가 '그날'을 앞당기는 방법을 이야기했다.
"내일 오후 4시 반 마로니에 공원에서 다시 만나자. 10만 개의 촛불을 들자. 내일은 혼자 오지 말고 친구와 가족들을 다 데리고 나와서 10만개의 촛불을 켜자. 국민의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지 잘 보여주자. 6월 3일·5일·7일은 이 곳에서 촛불을 들고, 6·10항쟁 21주년에는 전국에서 100만 개의 촛불을 들자."
'5월의 마지막 날, 10만 개의 촛불' '6월 10일, 100만 개의 촛불'을 다짐한 시민들은 광장을 빠져나가 명동 방향으로 행진을 시작했다.
"협정 무효, 고시 철회!" "이명박은 물러나라!" 등 구호를 외치는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인파도 불어났다. 주최 측은 거리 행진에 참가한 인원이 4만 명 이상이라고 밝혔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