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0일이라는 시간은 너무 길었다. 많은 이들이 파업 현장을 떠났다. 결혼한 사람도 7명이나 된다. 처음 파업을 시작할 때 20대 중반이던 이들은 어느덧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 사람들의 관심이 줄 만한 시간이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처음처럼 그 자리에 있었다.
햇수로 3년째 '파업의 봄'을 맞는 KTX 승무원 4명을 지난 8일 만났다. 이날은 이들 파업 800일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대수롭지 않은 농담에도 자기들끼리 까르르 웃었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어두움이 있었다.
"다시 생각하니 아득한 그 시간들이 참 답답"하기도 했고, "한창 예쁠 나이에 하늘거리는 치마와 또각거리는 하이힐 대신 운동화, 청바지, 모자를 교복처럼 입어야 했던 서러움"이 새삼스럽기도 했다. 그래도 운동화를 신고 뙤약볕 아래 앉아 있던 그 때는 지금보다는 나았다. "몸은 힘들었어도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50여 명의 승무원들이 여전히 공동생활을 하고 있는 서울 용산의 철도노조서울본부 사무실 밖의 풍경은 봄을 지나 이미 여름으로 달리고 있었지만, 승무원들은 여전히 회색빛 차가운 겨울의 한 가운데 있었다.
"어쩔 수 없어 받았던" '역무계약직' 합의 좌절, 그 후 이야기
어떤 이들은 "끝난 것 아니냐"고 말한다. 심지어 이제 가족도 "이젠 TV에도 너희 얘긴 안 나오던데, 되겠냐"고 한단다. 신고은(가명·28) 씨는 "사람에게 잊혀졌다는 것을 우리도 많이 느낀다"고 했다. "속상하다"는 고은 씨는 그러면서도 "우리 잘못도 크다"고 말했다.
"그동안은 이슈화시키려고 우리 스스로 노력을 많이 했었는데 작년 말부터는 숨죽이고 있었어요."
'작년 말'이란, 철도 노사가 잠정적으로 합의했던 '역무계약직으로의 고용'안이 끝내 무산된 이후다. (☞관련 기사 : '손 털고' 떠난 이철, '손 묶인' KTX 승무원) 그 당시를 생각하면서 승무원들은 한 동안 말이 없었다. 김희정(가명·29) 씨는 "비록 승무원은 아니지만 이제는 정말 끝나는구나 싶었는데 그 희망이 꺾이니 너무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김수진(가명·28) 씨는 "철도공사는 합의한 적 없다고 하지만, 당시 공사에서 어느 역으로 가고 싶은지 지망 순위까지 적어 냈었다"고 말했다. "심지어는 1지망으로 적어낸 지사 근처의 살 집까지 알아본 승무원도 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노사의 합의는 끝내 불발로 끝났다. 노사 합의 발표 직전 코레일 측이 "공식 입장이 아니라 실무진 차원의 논의였을 뿐"이라며 한 발 물러섰다. 수진 씨는 "처음부터 말이라도 꺼내지 않았더라면 그런 마음고생은 안 해도 됐을 텐데"라고 회고했다.
"그 때도 '그거라도 냉큼 받자'가 아니라 '우리 어쩔 수 없겠지' 하는 분위기"였단다. "그냥 받아들이자고 결정은 했지만 마음은 이상하게 너무 싫었다"고 덧붙였다. "승무원이 되고 싶었던 꿈을 버리고 역무직으로 돌아갈 거였으면 이렇게 길게 파업 안하고 다른 직장을 알아봤을 텐데 싶었다"니 왜 안 그랬을까.
파업 초기 승무원들은 한국철도공사의 직접 고용을 요구했었다. 승무 업무의 외주 위탁을 철회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승무직이 아닌 역무직으로, 그것도 비정규직으로 돌아가는 안을 전체 승무원들이 받아들이기까지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만큼 빨리 끝내고 싶었는지도 몰라요. 구호로 매일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외쳤는데, 다른 사람처럼 사회생활이 너무 하고 싶었어요. 힘들어도 직장 다니는 친구들이 부럽기도 하고."
희정 씨의 말이다. 더욱이 당시는 철도노조가 파업을 유보하면서 집행부마저 총사퇴한, 막막한 상황이었다. 정권이 바뀌었으니 사장도 바뀔 것이라는 소문도 파다했다. 양지영(가명·29) 씨는 "주변에서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공공연히 말했었다"고 덧붙였다. 그 '마지막 기회'는 결국 신기루가 됐다. 그리고 오랫동안 승무원들은 침묵했다.
"차마 내 입으로 내뱉지 못한 말, 'KTX 승무원으로는 못 가겠구나'"
"내 입으로 내뱉어서는 안 되는 말이지만, 그때 이후에 '아… 파업이 끝나더라도 KTX 승무원으로는 못 돌아가겠구나' 싶었어요. 우리가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게 아니구나…."
사실 고비는 여러 차례 있었다. 될 듯 될 듯 무너진 날들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적법 도급"이라고 판정했던 노동부가 유례없이 재조사에 나섰을 때도, "침묵으로 방관해 온 것이 부끄럽다"며 100여 명의 교수들이 거리에 섰을 때도, 철도노조가 이철 사장 퇴진 찬반투표를 했을 때도 '조금만 더 있으면'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난해 말에는 충격이 컸다. 지영 씨는 "성격이 원래 낙관적인 편이라 작년까지도 '돌아갈 수 있다'고 정말 믿었는데 지금은 솔직히 끝이 안 보인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떠나겠다는 동료들이 한 명씩 나올 때마다 "울고불고 '가지 말라'며 잡았던" 그들이 "잘 살아"라고 인사하며 떠나는 동료들을 보내준 것도 그 즈음부터였다.
"희망이 있을 때는 못 가게 잡을 수 있었죠. 그런데 이제는 내가 책임질 수 없으니까요. 그 친구들도 삶이 있는 건데 보이지 않는 희망을 들이댈 수도 없는 거니까…."
"내가 있어야 할 자리가 저 곳인데…"
그래도 어떻게든 함께 끝을 보려다 못 버티고 떠난 동료들은 안쓰러울 뿐, 서운한 마음은 없다고 했다. 하지만 파업 초기 복귀한 사람은 다른 모양이었다.
수진 씨는 "나간 사람들은 괜찮은데 복귀한 사람들을 보면 좀 어색하고 불편하다"고 했다. 생계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마음은 함께 하고 싶어도 나갈 수밖에 없었던 사람과, 처음부터 파업 대오를 떠난 사람은 다르다고 했다.
"다 같이 결정해서 시작한 파업이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복귀하면서 우리 정당성도 훼손되는 거니까요. 문제가 있다는 데 공감하고 벌인 일인데 한두 명이 반기를 들면 나머지가 바보 되는 것 같고요. 어떨 때는 우리가 더 이렇게 오래 싸울 수밖에 없는 것도 몇몇이 복귀해서 그런 게 아닌가 싶을 때도 있어요. 파업 초기에는 서로 감정이 격해서 마주치면 목소리 높여 싸우기도 했죠."
지영 씨의 말에 희정 씨가 맞장구를 쳤다. "복귀한 친구는 나를 봐도 전혀 불편해하지 않는데 나만 그렇다는 게 더 속상하다"는 것이다.
"한 번은 전단지를 나눠주다 마주쳤는데 '수고해'라면서 제 엉덩이를 툭툭 치고 당당하게 지나가는 거예요. 전혀 미안해하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더 마음이 아팠어요."
지금은 시간이 많이 지나서 괜찮다며 승무원들은 살짝 웃었다. 그래도 어쩌다 아는 얼굴을 마주칠 때면 오랜 서운함과 속상함이 다시 고개를 든다.
"고향 갈 때 기차를 타면 꼭 한 번씩은 만나요. 그 친구들이 예쁜 유니폼 입고 다니는 거 보면 '내가 저기 있어야 하는데' 싶어서 마음이 안 좋죠. 나는 참 구질구질한데 저 친구는 화사하게 화장도 하고 참 예쁘구나 싶으면 여자로서 속상하기도 하고요."
"800일? 매일 매일 늘 처음이었죠"
이곳 저곳을 둘러봐도 딱히 출구가 보이지 않을 때, 사람은 초인적인 무언가에 기대곤 한다. 종교가 될 때도 있고, 말도 안 되는 예언에서 희망을 찾기도 한다. 승무원들도 그런가 보다. 고은 씨가 "나 얼마 전에 점 봤는데"라고 말을 꺼내자 다들 눈빛이 반짝였다.
희정 씨가 기자를 보며 "답답하니까 가끔 점을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참 희한하게도 희망이 생길 때가 있어요"라고 설명해준다. 말하는 희정 씨도 고은 씨가 봤다는 그 '점집'에서 뭐라고 했을까 궁금한 눈치였다.
"두 군데서 봤는데 한 집에서는 '안 되니까 그만하라'고 그랬고, 또 한 군데서는 '6월 말이나 7월 초에 된다'고…."
'6월 말이나 7월 초….' 그때쯤이면 정말 돌아갈 수 있을까? 갑자기 지영 씨가 말했다.
"근데 처음에는 왜 그렇게 있는 힘, 없는 힘 다 쏟아 부었을까. 이렇게 오래 갈 줄 알았으면 좀 아껴둘 걸 그랬지?"
다른 승무원들은 입가에 미소만 머금을 뿐 말이 없었다. '언제 제일 힘을 다 쏟아 부었는데요?' 물었더니 파업 초기 코레일 서울지역본부 점거 농성 때 얘기를 꺼냈다.
"사수대? 그 때는 그런 것도 있었어요. 잠깐 나갔다 들어올 때도 외출증 끊어서 나갔고요. 우리 진짜 '빠릿 빠릿' 했었잖어, 그치?"
농성장에 언제 들어올지 모르는 경찰 병력을 대비하느라 그랬단다. 승무원이 되고 싶었던 20대 '아가씨'들이 '사수대'라는 말을 언제 들어봤을까.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겠다"고 말했더니, 희정 씨가 "지금도 항상 처음"이라고 답했다.
"800일이 매일 매일 처음 경험해 보는 순간들이었죠. 늘 처음 같았어요. 살면서 이런 곳에서 2년 넘게 동료들이랑 합숙하게 될 줄 알았나요?"
수진 씨도 "지금껏 살면서 몰랐던 걸 처음으로 많이 배웠다"며 "스스로 '내가 컸다'는 생각이 든다"고 덧붙였다.
"밖의 '말들'보다 안의 시선이 더 무섭다"
지난해 말 노사합의가 무산된 이후 승무원들은 별다른 대외 활동 없이 지냈다. 1인 시위를 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영어, 컴퓨터 등 학원을 다니며 공부를 하거나 철도노조 대의원대회나 수련회 등 현장 순회 활동만 했단다. 2만5000명의 철도노조 조합원들은 이들을 어떻게 생각할까?
수진 씨는 "2년 넘게 파업을 했는데도 우리 문제를 모르시는 분들이 많아서 놀랐다"고 말했다. 진작 한 명씩 만나 설명도 하고 그랬더라면 "괜한 오해도 없었을 것"이라며 수진 씨의 말끝이 흐려졌다. "밖에서 우리더러 '떼 쓴다'고 하는 건 그렇다 치고, 같은 철도노조 가족이나 마찬가지인 정규직 조합원들이 그렇게 말하면 좀 더 서운하다"고 했다.
지영 씨도 "내부의 시선이 더 무섭다"고 털어놨다.
"우리가 원해서 철도유통 소속으로 들어온 걸 아니라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아는 분들이시니까요. 솔직히 사회 초년생이 뭘 아나요. 입사할 때 당시 철도청 사람들도, 철도유통 사람들도 모두 '1년 열심히 잘 하면 정규직 된다'고 했으니 믿었죠. 설마 KTX가 국책 사업이라는데 싶었고요. 전혀 의심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정규직 조합원들 가운데서도 "다 알면서 들어와서 정규직시켜 달라고 생떼를 쓴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언제 돌아갈 수 있을까' 생각할 때보다 그런 시선과 마주칠 때면 가슴 한 구석이 왕창 무너져 내린다.
"그래도 다시 시작해보겠다"며 그녀들은 지난 9일 밤, 서울역 광장에서 '800일 문화제'를 열었다. 미국산 쇠고기 전면 개방 반대 촛불집회가 한창이던 그 시간, 조촐하게 열린 문화제였다.
오랜 침묵을 털고 준비한 그 문화제를 두고, 희정 씨는 "우리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려고"라고 말했다. 지영 씨가 덧붙였다.
"아직 유니폼을 못 버리고 있어요. 옷장 안에 그대로 있죠. 혹시 돌아가게 될까 싶어서 못 버렸는데, 지금은 마지막으로 입을 날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파업하면서도 가끔은 정복 입기도 했으니까 한 번은 더 입을 날이 있겠죠."
처음에는 그저 승무원이 되고 싶었고, 나중에는 외주 위탁된 간접고용 승무원이 아닌 '당당한' 노동자로 고객을 만나고 싶었을 뿐인 이들의 내일은 어떤 모양일까. 파업 현장, 그 자리에 서 있는 것 자체가 힘들어보였던 승무원들과의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 길, 쉽게 답을 추측해볼 수 없는 물음이 머리 속을 맴돌았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