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파격이 신선했다. 하지만 이내 '토론공화국'이라는 비판이 나오기 시작했다. 정부부처와 여당은 쫓아가고 뒷수습하기 바빴다. 통제 불능의 청와대는 어느새 국정운영의 화약고처럼 비쳐졌다. 집권자의 선의를 국민들이 몰라준다는 식의 독선이 똬리를 틀었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권은 정도가 더 심해 보인다. 출범 두 달 반 만에 찾아온 위기라는 시간의 문제 때문만은 아니다. 대화는커녕 '진압'이 앞선다. '선의'로 봐줄 만한 대목도 별로 없다. 이 대통령이 전면에서 '국민과의 대결'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불도저 근성이 유난하다.
대통령의 오판
이 대통령은 8일 쇠고기 협상에 대한 비난 여론을 "한미 FTA를 반대하는 사람들 아니냐"고 일축했다. 미국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사람이 국민 열 중 여섯이라는 여론조사는 안중에 없다. 이 대통령은 "사람이 시련을 겪으면 더 강해진다"며 국정쇄신 요구에도 귀를 닫았다. 이로써 쇠고기 청문회를 분기점으로 정부의 자성과 책임 있는 후속 대책에 대한 기대는 접을 수밖에 없게 됐다.
모순의 회로에 갇힌 걸 모르는 것 같다. 이 대통령과 정부가 내놓은 궁여지책은 "미국에서 광우병이 발생하면 수입중단 조치를 취하겠다"는 것. 외교적으로는 잉크도 마르지 않은 국가 간의 협상문을 무시하겠다는 순진한 얘기다. 국내적으로는 대통령의 공언(空言)을 믿고 미국 쇠고기 수입을 눈감아달라는 먹히지 않을 하소연이다. 묘안이 될 수 없다.
애당초 묘안은 없었다. 위기에 대한 긴장이 생뚱한 방향으로 뻗어있는 마당에 납득할 만한 대책이 나올 수는 없는 일이다. 청와대와 정부는 '인터넷 괴담'이 유포된 배경에 '좌빨'들의 선동이 있다고 보는 것 같다. 이날 한승수 국무총리가 발표한 대국민 담화문의 핵심은 "허위사실 유포와 불법집회에 대한 엄정대처"에 있다. 정부는 이미 경찰을 풀어 어린 학생들까지 상대로 '괴담 수사'에 팔을 걷도록 했다.
한미정상회담 하루 전날, 느닷없이 먹는 걸로 장난친 것도 속 뒤집히는 일인데, 울분의 목소리마저 (설령 그것이 다소 과장됐거나 감정적인 측면이 있더라도) 당국의 단속 대상으로 삼겠다는 협박은 국민들 입장에선 불쾌감을 넘어선 문제로 다가온다. 통치철학의 빈곤이 아닐 수 없다.
쇠고기 파동만 넘기면 된다?
단언컨대 이런 식의 진압은 성공하지 못한다. 시간이 가면 거리의 촛불은 잦아들 것이고 '쇠고기 국면'도 넘어갈지 모르겠다. 하지만 수억 원의 혈세를 쏟아 부은 "미국소는 안전하다"는 일방적 광고의 효과는 아닐 것이다. "법에 따른 엄정 대처" 협박 때문은 더더욱 아닐 터이다.
내재화된 분노는 언제, 어떤 계기로건 국민들을 거리로 끌어 모은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돌을 들지, 치솟는 물가에 장바구니 든 주부들이 촛불을 밝힐지, 경쟁 일변도의 교육정책에 지친 중고등학생들이 소매를 걷을지 모를 일이다.
그게 무서운 거다. '강부자 내각, 강부자 청와대' 논란을 거치며 국민들은 이명박 정부가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집단'이라는 걸 간파했다. 쇠고기 협상 파문에 대처하는 정부의 태도는 '다른 사람'을 넘어 '적(敵)'인 양 간주하게끔 했다. 적대시한 쪽은 물론 정부다. 뒤져봐야 이들을 거리로 이끄는 배후세력은 없다. 청와대와 정부가 스스로를 국민들로부터 유폐시켰을 뿐이다.
일단 형성된 적대적 관계는 아주 사소한 국정운영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다. 혹자는 '민란'이라고 한다. 혹자는 '제2의 부안사태'라고 한다. 정권이 국민 대다수를 바리케이드 건너편 대상으로 규정하고 공권력을 풀었으니 과한 말이 아니다. 쇠고기 협상 후폭풍에 대처하는 이명박 정부의 불도저식 진압은 반드시 부메랑이 돼 돌아온다는 예견이다. 여당의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소 조사에서조차 이 대통령 지지율이 20%대 후반에 그친 놀라운 현실이 의미하는 바다.
비상구를 시급히 찾아야 한다. '괴담 진압'으로 뻗은 관심을 쇠고기 졸속협상의 책임을 통감하고 책임자 문책과 진정성 있는 후속 대책 마련으로 옮기는 게 우선이다. 정상적 정치적 절차를 건너뛴 '탈(脫)여의도' 실험도 어마어마한 비용을 지불했으면 이쯤해서 용도폐기 하는 게 옳다. 대통령이 직접 나선 국민과의 맞장 승부는 화를 키운다.
아울러 '뇌송송 구멍탁'이 된 국정을 쇄신하는 일도 미룰 수 없는 문제다. 이 대통령은 일축했지만 여권에선 청와대 정무, 홍보, 민정 라인 개편이 거론되고 있다. 잘못 짚었다. 여권이 포장술과 정치기술의 문제로 현 사태를 바라보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은 불도저라는 별명에 '컴퓨터 단 불도저'라고 받아치지만, 국민들은 이제 그 컴퓨터 용량을 2MB(2메가바이트)라고 조롱한다. 이제 불도저에서 하차할 때가 됐다. 이 대통령의 통치 철학이 달라지지 않는 한 국정쇄신은 요식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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