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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환자들을 웃으며 만날 그날을 기다려"

[인권오름] 불운의 스타, 글리벡 <5>

"환자들이 약이 없어서가 아니라 돈이 없어서 죽는다"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하지만 약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약이 전달되지 않는 이유를 알기란 쉽지 않다.

마침 인권운동사랑방이 발행하는 <인권오름>이 의약품의 연구, 개발, 생산, 공급의 전 과정을 보여주는 기획 기사를 마련했다. 이번 기획에서 주로 다룬 소재는 한국에서 의약품접근권 운동의 출발점이 된 의약품 '글리벡'이다.

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와 진보네트워크 센터에서 각각 활동하는 강아라 씨와 홍지 씨는 까다로운 내용을 부드럽게 전하기 위해 글리벡을 의인화(擬人化)하여 글을 썼다. '글리벡'이 스스로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이다. 이 글을 쓴 두 활동가는 글리벡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이 의약품에 대한 시민의 권리가 어디에서 가로막혀 있는지 살펴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전했다. 이번 기획은 총 4회에 걸쳐 진행될 예정이었으나, 미처 담지 못한 내용이 많아서 한 회 더 연장하게 됐다. 다음은 이번 기획의 마지막 기사다. <편집자>

첫 번째 기사 보기 (글리벡의 등장)
두 번째 기사 보기 (몸 사냥꾼)
세 번째 기사 보기 ('종신고리대 계약'에 갇힌 나)
네 번째 기사 보기 (감금 상태의 나를 풀어줄 열쇠)

2003년 1월. 노바티스가 빗장을 풀어주더니 나오라고 하더군. 나는 무려 1년여의 시간 동안 감금되어 있다가 드디어 세상 빛을 보게 된 거다. 나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 지쳐서 돌아가신 분들도 계셨어. 목이 메어 미안하다는 말조차 나오지 않았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지금부터라도 환자들을 열심히 만나러 다니는 것뿐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세상에 나오니 그토록 내가 보고 싶어 했던, 나를 보고 싶어 했던 환자들이 선뜻 내 곁으로 오지 않는 거야. 노바티스가 순순히 나를 풀어준 것도 찜찜했던 차라, 무슨 영문인가 싶었지.

알고 봤더니 한국 정부와 노바티스가 내 가격을 2만 3035원으로 결정했더군. 845원 들여 만들어진 내게 이런 가격을 매기다니 도대체 이 억울함과 원통함을 누구한테 호소해야 하나? 내가 한국을 처음 알게 된 이후 2년의 시간 동안 한국 정부가 한 일은 2만 5005원과 2만 3045원 사이에서 낚싯줄 드리운 것뿐이었다.

'전 세계 동일 약가 정책'

정부의 무능함과 제약회사의 탐욕에 환자들은 거세게 항의했다고 하더라고. 그러자 노바티스는 환자 본인부담금 10%를 자신들이 지원하겠다고 했대.

2003년 당시 환자들의 본인부담금은 약값의 30%였다. 나머지 70%는 건강보험에서 부담하는 거지. 그런데 2003년 1월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가 나의 약값을 2만 3035원으로 결정하면서 백혈병과 같은 중증질환자의 본인부담금을 20%로 낮추겠다고 발표한다. 그러니까 이 20% 중의 절반을 노바티스가 지원하겠다는 이야기야. 환자본인부담금 10%를 지원하면서 노바티스는 또 이 말을 했다. "노바티스는 인류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인류의 생명을 연장하고, 인류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바로 여기 있습니다." 내가 지난번에 이야기 했지? 녀석이 이 말을 하는 순간이 바로 사기 칠 때라고.

약값의 10%를 지원해 주면서 녀석은 왜 약값 자체의 인하는 절대 안 된다고 하는 걸까? 처음부터 2만 5005원에서 10% 깎은 2만 2500원을 부를 수도 있을 텐데 말이야. 이게 바로 '전 세계 동일 약가 정책'이다. 이 말은 즉, 미국에서든 아프리카에서든 세상 어디에서도 약의 가격은 똑같아야 한다는 거다. 한 달에 천만 원 버는 사람과 천 원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 약값은 분명 다른데도, 그런 셈법 따위는 귀찮다 이거다. 얼마를 부르든 필요한 사람들은 사먹겠거니 배짱을 부리는 거지. 나라 별 경제력과 보건의료제도와는 상관없이 기업의 정책이 관철되는 요지경 같은 세상. 그 속에서 생명이 머무를 곳은 어디 있을까?

쌍둥이 동생의 앞길도 막혀

내 가격이 결국 2만 3035원으로 결정되면서 환자들은 "생명은 스스로 지켜야지 남들이 지켜주는 것이 아니다"라고 생각하게 되었나봐. 약, 나아가 건강을 사회가 책임지기에는, 정부는 무능하고, 제약회사의 탐욕은 끝도 없으니 말이야. 2003년 당시 보험 혜택을 받지 못해 2만 3035원이라는 내 가격을 고스란히 부담해야 했던 위장관기저종양(GIST), 급성골수성백혈병 환자들 몇몇은 결국 저 멀리 인도에서 약을 수입하게 되었어.

우리 약들은 특허가 없는 나라에서, 또는 특허가 만료되거나, 강제실시가 되면 쌍둥이 자매들이 생기거든. 똑같은 화합물로 똑같은 효과를 지니고 태어난 쌍둥이 자매들을 보통 '제네릭(generic)'이라 불러. 2003년 1월 인도에서 태어난 내 쌍둥이 동생의 이름은 '비낫(Veenat)'이야. 인도는 2003년 당시 의약품의 물질특허를 인정하지 않아서 여러 회사에서 약을 저렴하게 생산할 수 있었어. 그래서 비낫의 가격은 한 알에 2달러, 즉 2000원 정도의 가격이야. 놀랍지!
▲ 왼쪽 네 알은 비낫(약 8800원), 오른쪽 네 알은 글리벡(약 10만 원). [출처 : 민중언론 참세상]

가짜 약 아니냐고? 절대 아니야. 내 쌍둥이 동생이라니까. 비낫의 어렸을 적 이름도 나와 똑같은 이마티닙(imatinib)인 걸. 오히려 가격을 보면 내가 비낫에게 '언니'라고 불러야 할 판이지. 게다가 나의 생산 원가는 845원인데 2만 3035원에 팔리니, 차력 쇼 벌이는 약장수들이 팔았을 법한 가짜 약은 오히려 내 쪽 아니겠어. 환자 입장에서 비싸서 먹지도 못하는 약이 약 같기나 하겠냐고.

여하튼 인도에 나의 쌍둥이 동생인 비낫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환자들은 비낫을 개인적으로 수입해서 먹었다. 한국 정부는 이때도 우리 소속사 눈치 보느라 뒷짐 지고 가만히 서 있더군. "비낫을 직수입 하려면 노바티스와 상의해 봐라"라고 했다나. 정부랑 말하면 입만 아프지.

그리고 내 소속사인 노바티스는 비낫에게도 가서 협박을 해대지 뭐야. 인도 정부가 비낫 판매를 중지하지 않으면 시장 철수를 하겠다나. 노바티스의 끈질기고 집요한 괴롭힘 때문에 결국 인도에서 비낫을 생산하는 회사는 '나코(Natco)'만이 남게 되었다. 나머지 5~6개 회사들은 비낫을 생산할 수 없게 되었어. 동생 앞길 막는 언니는 되고 싶지 않았는데, 소속사 잘못 만난 탓에 비낫까지 괴롭게 만들었어.

도대체 저 녀석은 나랑 무슨 원수가 졌다고 내가 하는 모든 일에 이렇게까지 훼방을 놓는지 모르겠어. 녀석은 나한테 들인 돈이 9600억 원에 달하니 본전을 뽑으려면 한참 남았다고 해. 글쎄, 네가 나한테 해 준 게 9600억 원이나 되는지도 의심스럽지만, 그걸 인정해도 네가 나를 세상에 선보이고 1년 반 만에 거둬들인 돈이 1조 500억 원이란 말이다!

'스프라이셀' 보기는 하늘의 금 따기?

도적 같은 소속사 만난 지 올해로 17년이 되었다. 1991년에 맺은 그 종신고리대 계약서 한 장 때문에 나는 지금 외톨이고 한국의 환자들에게는 악몽 같은 경험을 남겨주었다. 요즘은 하루하루 날짜만 세고 있어. 3년 후면 드디어 그 지긋지긋한 계약도 끝이거든. 3년 후에 노바티스 녀석이 무슨 해괴망측한 짓을 벌여 계약기간을 연장할까 걱정이 되긴 해. 그래서 "제발 불쌍한 제 친구 프로작 꼴은 나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매일 기도를 하지.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 끊은 지도 오래다. 생명보다는 털이 중요하고, 특허가 중요하고, 돈이 중요한 세상 너무 끔찍해서 바라볼 엄두가 나지 않아. 그런데 요즘 내 귀를 번쩍 뜨이게 하는 이야기가 들려오더군.
▲ 스프라이셀 약가조정위원회가 열리는 회의실을 점거해 항의하는 환자들 [출처 : 민중언론 참세상]

'스프라이셀(Sprycel)'이라고 나에게 내성이 생긴 환자들이 먹는 약이 새로 개발되었대! 정말 반가웠어. 안 그래도 요즘, 나를 먹어도 계속 아픈 사람들이 한두 명씩 늘어나는 것을 보면서 조마조마했거든. 그런데 곧이어 들리는 소식에 나는 그만 뒷목 부여잡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 친구의 소속사인 미국의 다국적 제약회사 BMS(Bristol-Myers Squibb)가 한국에서 한 알에 6만 9135원이 아니면 이 친구를 보여주지 않겠다는 거야! 웃음밖에 안 나오더라니까. 녀석의 생산원가는 1890원이야. 제약회사가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대는 연구‧개발비가 보통 원가의 10배 정도 된다고 해도 스프라이셀의 판매가는 2만 원이 넘지 않지.

스프라이셀은 하루에 두 알을 먹어야 하니, 이 친구 에게 지불하는 하루 약값만 14만 원이고, 1년이면 5000만 원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요즘 순금 한 돈 가격이 12만 8000원인데, 말 그대로 금보다 비싼 약이 나온 거다. 이제 환자들은 강제실시가 아니라 금모으기 운동을 해야 하나?

5년이 지나도 여전한 한국 정부

5년 전 일이 불현듯 생각나더군. 5년이 지난 지금 그 때와 똑같은 일이 나와 똑같은 백혈병 치료제에게 생긴 거잖아? 내가 2만 3035원이라는 가격표를 목에 달고 나왔을 때 절망했던 환자들은 지금 어떤 심정일까. 게다가 한국 정부는 여전히 우리들의 가격에 대한 아무런 합리적 근거도 갖지 못한 채, BMS가 부른 값을 10% 깎을까, 20% 깎을까 궁리 중이래. 가격 협상이 결렬되어 스프라이셀이 나처럼 감금당할 경우의 대안도 여전히 없대. 그래서 환자들이 기준도 없고 대안도 없이 협상하냐고 따졌더니 정부가 한다는 말 참 가관이었지. "적정한 약가는 오직 신만이 알고 계신다." 난 2001년 이후 이 바닥이 노름판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봤더니 굿판이었던 거야. 환자들의 소원을 이루려면, 이제 용한 무당이 필요한 것일까?

한국 정부는 자신이 져야 할 책임의 무게를 5년이 지난 지금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거다. 얼마 전에는 환자들에게 최대 4000만 원까지 깎아보겠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했다더군. 그게 싸다고 생각됐나? 만약 BMS가 스프라이셀을 한 알에 10만 원에 팔겠다고 했으면, 한국 정부는 6000만 원으로 깎아보겠다고 호언장담했겠지!

회고록을 마치며

자, 내 회고록은 여기까지야.

조용히 달력만 보면서 골방에 틀어박혀 있을 수도 있었어. 내 친구들이 겪는 일이, 이런저런 질병을 가진 환자들이 당하는 일들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더 이상 저 무섭고 잔인한 제약회사들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내 계약은 곧 끝나기도 하고, 사실 많이 지쳤어.

하지만 5년 전 그 가혹했던 시간에 누군가 나에게 해준 이야기가 있어. 그 사람의 말을 곱씹으며, 나는 지금 용기 내어 회고록을 쓰게 된 거야. 우리들의 소속사인 제약회사가 너무나도 밉고 싫지만, 녀석들을 스스로의 전횡으로부터 구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야. 질병과 약이 언제까지 환자들만의 고통이자 싸움으로 머무르지 않기를 바라면서, 제약회사가 저지르고 다니는 온갖 폭력은 외면한 채 "제약회사여, 돈만 알아도 좋으니, 약을 만들어 주시오!"라는 순진한 이야기가 더 이상 나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5년 전 수잔 손탁이 나에게 들려 준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이 회고록을 끝마칠까 해.

"이 세상에 온갖 악행이 존재하고 있다는 데 매번 놀라는 사람, 인간이 얼마나 섬뜩한 방식으로 타인에게 잔인한 해코지를 손수 저지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증거를 볼 때마다 끊임없이 환멸을 느끼는 사람은 도덕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아직 성숙하지 못한 인물이다. 나이가 얼마나 됐든지 간에, 무릇 사람이라면 이럴 정도로 무지할 뿐만 아니라 세상만사를 망각할 만큼 순수하고 천박해질 수 있는 권리가 전혀 없다." (수잔 손탁, <타인의 고통>)

그녀의 말처럼 외면이 아닌 '고발', 이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이다. 하지만 고발만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을 거야. 다른 무언가가 있을 거고, 그건 이 글을 보는 여러분들의 몫이다. 내 생명이 제약회사의 노름판, 정부의 굿판에 놓이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말이지.

(이 글은 주간 인권신문 <인권오름>에도 실렸습니다. <인권오름> 기사들은 정보공유라이선스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정보공유라이선스에 대해 알려면, http://www.freeuse.or.kr 을 찾아가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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