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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건너 배우고 배운다"

[기고] 기륭전자 찾은 호주 노동자들은 무엇을 보았을까?

지난 6일 오전 11시, 서울 구로공단의 한 회사 정문 앞에서는 파란 눈의 백인 3명이 한국인 노동자들 앞에서 영어로 씌어진 글을 큰 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우리 호주 전기노조 한국 방문단은 기륭전자 사측의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태도를 비판합니다. 그들은 비정규직 노동자를 고용해서 더 싼 임금과 더 악화된 노동조건에서 정규직 노동자들과 동일한 일을 하게 함으로써 고의적으로 한국의 노동법을 훼손시키고 있습니다.

한국정부는 즉각 해고된 노동자들의 복직을 위해 나서야 합니다. 동시에 그들에게 지워진 손해배상과 벌금도 무효화해야 합니다. 또 한국정부는 기륭전자 사측이 노동조합을 인정하고 노동자들이 당연히 누려야 할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도록 해야 합니다.

기륭전자 노동자들은 당연한 그들의 권리를 요구하고 있을 뿐입니다. 또한 그들 스스로 뿐만이 아니라 모든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위한 투쟁의 과정에서 그들의 위대한 용기와 힘, 그리고 헌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륭전자 노동자들의 투쟁은 우리를 고무시키는 투쟁입니다. 모든 노동자들과 노동운동은 그들의 투쟁을 찬미해야 합니다."


도대체 기륭전자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왜 이 파란 눈의 사람들은 "그들을 찬미해야 한다"고 하는 것일까?

호주 노동자들이 '찬미한' 기륭전자에서는 무슨 일이?
▲위성라디오, GPS, 네비게이션을 만드는 회사인 기륭전자에서 벌어진 여성 노동자들의 파업이 1000일을 앞두고 있다. ⓒ프레시안

위성라디오, GPS, 네비게이션을 만드는 회사인 기륭전자에서 벌어진 여성 노동자들의 파업이 1000일을 앞두고 있다. 파업이 처음 시작되던 2005년 당시 기륭전자는 한해 순이익 210억 원의 '잘 나가는' 중소기업이었다. 이 '잘 나가는' 기업의 생산직 300여 명 가운데 정규직은 몇 명이었을까? 고작 15명뿐이었다. 나머지 노동자 가운데 계약직이 40여 명, 불법파견으로 고용된 비정규직이 250여 명이었다.

'잘 나가는' 중소기업, 기륭전자의 불법파견 노동자들이 받은 월급은 얼마였을까? 당시 최저임금보다 딱 10원 많은 64만1850원. 상여금은 꿈도 꾸지 못했다.

2005년 7월 5일 정규직, 계약직, 파견직 노동자들이 함께 노동조합을 결성했지만, 기륭전자의 대답은 '계약해지'였다. 정규직 남성들로 구사대를 꾸리고, 현장 곳곳에 CCTV 30여 대를 설치했다. 백지 노조 탈퇴서를 조합원들에게 들이밀었다.

그 해 8월, 노동부는 불법파견 판정을 내렸지만 회사는 오히려 계약해지로 맞섰다. 200여 명이 하루 아침에 잘렸다. 디지털단지답게 해고도 휴대폰 문자메시지로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시오"라는 통보를 보내는 것이 끝이었다. 사유는 다양했다. '잡담', '말대꾸', '뻣뻣하다', '잔업 몇 번 안했다', '관리자에게 밉보였다', 심지어 과로로 작업현장에서 쓰러지는 것도 해고사유가 됐다.

그래서 노동자들이 시작한 투쟁이 어느새 980일이 넘었다. 지난 3년간 이들은 해보지 않은 투쟁이 없었다. 55일간 현장점거 파업농성을 벌이다가 구사대와 용역깡패의 폭력에 시달렸고, 공권력에 의해 농성 천막이 뜯기기도 했다. 수도 없이 재판을 받았고 수 십 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도 당했다. 철창에 갇히기 일쑤였고, 가정의 생계는 파탄난지 오래였다. 30일간의 단식 투쟁으로 (시늉뿐이나마) 문제해결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합의문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런데도 그 투쟁의 세월이 햇수로 4년째에 접어들었다. 그동안 최대 주주가 3번 바뀌고, 대표 이사가 4번 바뀌었다. 회사의 새 대표자는 조합원들에게 '명분보다 실리'를 찾으라고 권유한다. 그러나 이들은 지난 3년의 싸움을 물거품으로 돌릴 수 없단다. "정규직으로 직접 고용되어 떳떳이 현장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이들의 희생과 흘러간 세월을 보상해주는 것이란다. 이들은 "손해배상 철회 및 고소고발 상호 취하", "용역경비 철수 및 구사대 해체", "생산라인 도급화 중단 및 직접운영 복원", "기륭전자 직접운영을 통한 직접고용 정규직화 실시"를 요구하고 있다.

이들의 오랜 파업이 '의미 있는' 결과를 얻어낼까? 얼핏 보면 현실은 그와 정반대로 치달을 것 같다. '질긴 사람이 승리한다'는 구호는 원래 노동의 것이었지만 '기업하기 좋은 나라'나 '비즈니스 프랜들리 사회'에서는 자본의 것이 되기 마련이다. '불법 파견'조차 단호하게 몰아내지 못하는 한국 노동운동의 현실에서는 '1000일'이 당장에는 절망의 숫자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1000일은 자본이 얼마나 '망쪼(亡兆)'인지도 여지없이 드러냈다. 노동자들을 쫓아내고 중국에 공장을 새로 세웠다는 회사는 200억 흑자에서 500억 적자로 추락했다. 자본은 수지타산을 위해 '해고'에만 열 올리더니 결국은 공장 터의 땅값이 올라가기만을 바라는, 생산과는 동떨어진 투기꾼 처지로 전락했다.

호주 노동자들은 무엇을 얻어 갔을까?

사실 기륭전자뿐이 아니다. 곳곳에서 중소영세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장기파업을 벌이고 있다.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 위주로 조직된 민주노총으로서는 이들의 현안 문제를 받아 안아 해결할 조직의 힘도 변변하지 못하고 그럴 의지도 확고하지 못하다. 민주노총은 심지어 이랜드 뉴코아 노동자들의 파업마저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이들의 내일이 밝기 어렵다. 수상쩍은 '실리(!)'를 좇아 싸움을 접거나, 아니면 이기든 지든 끝까지 싸우는 길 뿐이다.

앞서 소개한 호주 전기노조(ETU) 방문단의 '지지 성명서 발표'가 기륭 노동자들에게 얼마나 보탬(응원)이 됐을까? 기륭 노동자들에게 다소의 격려는 됐겠으나 기륭 자본을 움찔하게 만들 무슨 국제적인 압력으로 통할 리는 없다.

그렇다면 거꾸로, 기륭의 싸움은 호주 노동자들에게 얼마나 힘을 줬을까? 작은 노조가, 그것도 회사의 탄압을 견디다 못해 상당수 조합원들이 떠나간 노조가 비정규 차별이 당연시된 나라에서 자기만의 힘으로 이 차별 구도를 깨뜨린다는 것은 사실 까마득한 일이다. 가까운 노동자들이 연대의 손길을 뻗쳐준다 해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바다 건너 먼데서 온 노동자들이 당장은 승리의 전망을 보여주지 못하는 싸움에서 선뜻 힘을 얻기는 쉽지 않으리라.

물론 호주의 노동운동도 한국 못지않게 무기력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 집권했던 호주 보수당이 노동법을 크게 개악해 사실상 단체행동권이 묶인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래서 호주 노동당을 그리 신뢰하지 않는 노동자들도 정치적 타개책을 모색하려고 노동당 선거운동을 열심히 거들었지만 새로 집권한 노동당 정부가 과연 노동법을 원래대로 돌려놓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호주 전체의 절반 남짓의 주(州)에서 전기가 사유화됐다. 전기노조가 호주의 '전기 사유화(privatization)' 공세를 변변히 막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유화된 뒤로 전기 값이 뛰고 전기 고장율이 높아지는 등 폐해가 곧바로 드러났지만 한번 엎질러진 우유는 주워 담기 어렵다.

그런 호주 노동자들에게 기륭전자 여성 노동자들이 보여준 것은 사실 오랜 싸움을 견디는 '투지'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알고 갔을까? 한국의 노동운동에서도 이 '투지'는 점점 도태(?)돼 가는 '(사회적) 유전인자'라는 사실을? 그들은 과연 깨닫고 갔을까? 이 '투지' 속에 들어있는 어떤 잠재력을?

기륭 노동자들이 집안 살림 거덜나는 것까지 무릅쓰고 그렇게 몸을 던져 싸웠던 이유는 단지 불건전한 제도를 개선하자는 단순한 뜻만은 아니었다. '1회용 소모품'으로 취급받지 않겠다는 절절한 '인간 선언'이 그 투지의 원동력이었다. 사람이 상품으로, 한낱 소모품으로 취급되는 자본주의 현실을 앞장서서 바꾸겠다는 그 '결의'야말로 한국과 호주의 노동운동에 지금 가장 긴요하게 요구되는 덕목이 아닐까.

기륭의 여성 분회장이 다시 머리를 깎았다. 1000일을 넘겨 싸움을 이어가겠다는 결의다. 저마다 자기 단체나 정파의 앞가림에 골몰하여 아무리 중요한 싸움이라도 '적당히' 시늉만 하고 끝내는 일이 태반인 한국 노동운동이 과격한 투쟁이라고는 해본 적 없는 호주 노동자들에게 배워야 할 것은 바로 그 '배우려는 태도'가 아닐까? 기륭 노동자들이 자기들의 '인간 선언'을 끝내 지켜가도록 돕는 일이야말로 한국 노동운동의 향배가 걸린 일임을 우리는 다시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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