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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잡았던 손을 기억합니다"

[추모사] 박경리 선생님 영전에 바칩니다.

2008년 5월 5일 어린이날, 오후 3시쯤 박경리 선생님께서 광활한 우주 속으로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바로 1995년 가을 <토지> 완간 기념 잔치를 위해 소설 쓰는 창훈이와 함께 일주일 동안 원주 단구동 선생님 옛집에서 야외 식당과 야외 화장실을 짓고, 화단 정리, 풀 뽑기 등 허드렛일을 했던 그때가 생각났다. 13년 전 추억을 낡은 노트를 끄집어 내 읽어보니 갑자기 아득해졌다. 마른 눈물샘은 눈 두덩이에 물크러지고 푸르른 산 위에서 둥그런 바람이 옆구리를 쓸고 지나갔다.

글 기둥 하나 잡고
내 반평생
연자매 돌리는 눈먼 말이었네

아무도 무엇으로도
고삐를 풀어주지 않았고
풀 수도 없었네

영광이라고도 하고
사명이라고도 했지만
진정 내겐 그런 건 없었고

스치고 부딪치고
아프기만 했지
그래,
글 기둥 하나 붙들고
여까지 왔네

―박경리, '눈먼 말' 전문.


바람이 건 듯 불고 구름이 빠르게 지나쳤으나 원주 가는 길은 쾌청했다. 전날까지 3박 4일 동안 주도 7급의, 이제 막 솜털딱지를 뗀 약관의 실력으로 무림의 고수들을 상대하여 들이부은 술 가죽 부대에, 고속버스는 적당한 움직임으로 단잠을 몰고 왔다. 안으로 허한 사람이 마치 술 마시는 것으로 자기의 예술관을 과장하여 나타내듯, 바로 내가 그 주인공이 아닌가. 걸귀처럼, 이건 아끼는 것도 아니고 사랑하는 것은 더더욱 아닌, 그래 천하에 개잡범이 행사할 수 있는 가장 저급한 방법의 폭력이 아닌가. 어떤 술이 있어 이 아름다운 폐인(?)의 피골상접 몸과 마음을 달래주기나 할 것인가.

그럴 것이, 이건 단순한 여행이 아니다. 대하소설 <토지> 하나만으로도 우리 문학사에 거대한 산맥을 이룬, 박경리 선생을 만나러 가는 길이 아닌가. 거두절미하고 조세희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거대한 중화학공장 몇 백 개에 보다 <토지>에 더 큰 가치를 둔다. 세금으로도 상상해 낼 수 없는 것이 예술 작품이다. <토지>가 올려 준 것은 우리 정신의 GNP이다".

버스가 호법 인터체인지를 지나 강원도 땅으로 들어선다. 정신 바짝 차리자. 감 냄새나는 주둥이를 오므려 하품하고 눈곱을 떼어냈다.

원주는, 생각보다 아름다운 도시였다. 선입관이란 하찮은 것이다. 늘 알고 있던,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더운 내륙 도시, 칙칙한 군대 막사와 휴가, 외출 나온 장병들의 후줄근한 제복들, 나른한 다방과 뽕짝조의 술집을 예상한, 전형적인 군사도시일 거라는 생각은 초반부터 보기 좋게 박살났다. 잘 정리된 건물과 가로수, 넓고 곧게 뚫린 시원한 도로, 거리에 드문드문 평화로운 사람들, 그 모든 것을 넉넉하게 감싸고도는 치악산….

박경리 선생 댁은 치악산 자락이 뚜렷하게 보이는 변두리에 있었다. 느티나무 단풍나무 밤나무 잣나무 살구나무 소나무들이 병풍을 두르고 채마밭의 배추와 무 고추와 콩과 더덕들이 떠돌이 개와 고양이들과 함께 이 외로운, 치열한 싸움의 승리자 박경리 선생과 식구를 이루어 고즈넉한 가을 햇발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선생께선 공석에서 자신의 삶이 불행하지 않았다면 글을 쓸 수 없었을 거라 말씀하셨지만, 도대체 무엇이, 어떤 피 뜨거움이 이 평범한 아낙네를 움직여 이토록 큰 작품을 낳게 했는가. 바깥으로 우리 현대사의 질곡을, 하나밖에 없는 사위 김지하가 감옥을 들락거리는 것으로 상처받고, 안으로는 치유할 수 없는 큰 병으로 가슴 한쪽을 도려내는 직접적인 아픔을 겪으면서, 적어도 겉으로 담담하게 묵묵하게, 도대체 저 평범하기 그지없어 마치 이웃집 할머니 같은 저 노인네를 움직이게 만들었단 말인가.

일찍이 어느 시인이 말한 대로 고통은 문학에 있어서 상명당인가, 아님 선생께서 직접 밝힌 생래적으로 '문학적 무당'의 신내림 때문인가. 통재, 통재라, 이제 막 문단 말석에 이름 겨우 얹어, 두 권의 시집을, 무슨 석 달 열흘 빨래하지 않은 홀아비 속곳처럼 내보인 잡놈에게는 한없이 무딘, 이놈의 붓끝으로 다 표현할 길이 없다. 더 적확하게 표현하면 26년이란 장구한 세월(역사)을 어찌 이 짧은 기록으로 다 형용할 수 있겠는가. 한 방울의 물이 바위를 뚫는다는 말도 있긴 하지만.

마음속으론, 선무당이 되지 말아야지 다짐하고 다짐했지만, 명색이 목수 3년, 망치질 하나만큼은 제대로 해야지 다잡고 다잡았지만, 멀쩡한 연장하나 준비 없이 시작한 풋일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모르는 채 감싸고도 남을 선생의 큰 마음과, 때마다 손수 들고 나오시는 음식과, 나를 이 아름다운 여행에 동참시켜 준 문학평론가 임우기 형의 도움으로 그런 대로 깔끔한 잔치 준비가 끝이 났다. 이제 잔치에 초대된 손님들이 마음껏 먹고 즐기는 일만 남았다.

말이란 말이다, 때론, 삶 앞에서 (또는 시간 앞에서) 얼마나 공허한가? 이름을 대면, 당신들도 금방 알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고, 온갖 신문 방송들이 떠들썩하게 자리를 잡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그 많은 사람들의 노래와 춤이 오래오래 선생 댁의 마당을 흘러 넘쳤지만, 선생이 혼자 견디어 왔던 외로운 시간들에 비하면 어디 비길 수가 있겠는가.

김지하는 속 썩이지 않고 열심히 살겠다고 했지만, 그분의 참을 수 없는 눈물은, 다 초대하지 못한 이름 모를 독자들은, 300명이 넘는 토지의 주인공들은, 아니, 늘 당하고만 살았던 우리 형제와 부모와 할아버지들은, 아직도 지금 여기에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토지> 완결편은 8·15 해방으로 끝났지만, 영원히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친일과 군사독재와 유신과 광주는, 후안무치, 반역의 세월은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떠나기 전날 밤, 후배와 나는, 작업(소설)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끊임없이 자신을 다잡기 위해 노동을 한 거칠고 쭈글쭈글한 그분의 손을 잡아 보았다(실제로 선생님께서는 마룻바닥이 닳을 정도로 걸레질을 하셨고 배추밭으로 콩밭으로 끊임없이 세상을 매셨다. 호미 한 자루로 온 세상을 다 매셨다). 어머니! 치고 빼앗고 파괴하고 죽이고 병들게 하는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생육하고 번성케 하는, 흙이신, 생명이신, 긴급 수혈자이신 어머니의 손.*

실제로 선생께선 우리들 손을 맞잡고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일하는 사람은 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일하는 사람은 썩지 않으니까요."

그렇다. 흙은 썩지 않는다. 내 마음 저 깊은 어떤 곳으로부터 충만한, 눈물이 솟구쳐 올랐다. 당신은 우리 모두의, 영원한 어머니이십니다. 당신은 우리 詩의 배냇신앙이십니다.

그대는 사랑의 기억도 없을 것이다.
긴 낮 긴 밤을
멀미같이 시간을 앓았을 것이다.
천형 때문에 홀로 앉아
글을 썼던 사람
육체를 거세당하고
인생을 거세당하고
엉덩이 하나 놓을 자리 의지하며
그대는 진실을 기록하려 했는가.


―박경리, '司馬遷' 전문

* 박상륭 선생의 산문 중 일부를 인용했습니다.


유용주 시인은 1991년 <창작과비평> 가을호에 시 '목수' 외 2편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잡으로 <가장 가벼운 짐> 외 다수가 있다. 그는 1995년 <토지>가 완간될 때, 박경리 선생과 함께 완간 기념 행사를 준비한 인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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