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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곰'이 될 수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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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곰'이 될 수 있는데…"

[기자의 눈] 과세 당국, '이전가격 조작' 관련 규정 강화해야

"뭐야, 이 회사. '빛 좋은 개살구'였잖아."

오랫동안 중국 관리들을 배 아프게 했던 회사가 있다. 이 회사는 외국에 본사를 둔 다국적 기업의 중국 현지 법인이다. 1990년대 중국에 진출한 이 회사는 순식간에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1위의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그래서 많은 중국 기업들이 이 회사와의 경쟁에서 밀려 도태됐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는 중국 관리들의 속이 타들어 갔다. 그래서 억지로 자신을 위로했다. '어차피 이 회사가 벌어들이는 돈 가운데 상당 금액은 중국 정부가 세금으로 돌려받게 돼 있어.'

제대로 위로받고 싶었던 한 관리가 이 회사의 납세액을 확인했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어라, 이 회사 봐라. 납세실적이 형편없잖아.'

중국 진출 외국 기업, 이익이 적은 이유는?

이익이 있는 곳에는 늘 세금이 따른다. 동서고금의 모든 정부가 기를 쓰고 적용했던 원칙이다. 그런데 1위 기업이 왜 세금을 적게 냈을까. 중국 관리들이 무능해서? 그래서 이 회사의 회계 자료를 살폈다. 막상 들여다보니, 높은 시장점유율에도 이익이 거의 없었다. 이유는 너무 높은 원가. 과연 이 회사는 외견만 요란하고 실속은 없는 '빛 좋은 개살구'였던 걸까?

1980년대 중국이 개방 노선을 천명하고 나서, 많은 서구 기업들이 뛰어난 기술과 자본을 갖고 중국 땅을 밟았다. 중국 정부는 이들을 적극적으로 환대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되돌아보니, 앞서와 같은 '빛 좋은 개살구'들이 참 많았다. 이런 회사들은 아무리 많아 봤자, 중국 정부는 건질 게 없다. 그래서 중국 정부는 '외국 기업이면 무조건 환영'이라던 종래의 방침에서 꽤 물러섰다.

여기서 궁금증. 왜 유독 중국에 진출한 다국적 기업 중에 '빛 좋은 개살구'이 많았던 걸까. 외국 기업들이 무능한 사원들만 골라 중국에 보낸 걸까.

이런 '빛 좋은 개살구'들의 공통점은 '높은 원가'다. 최근 상황이 많이 변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중국의 인건비와 재료비는 아주 싼 편이었다. 그런데 원가가 왜 높지?

'이전가격 조작'으로 이익을 외국에 빼돌렸다

답은 '이전가격 조작'이다. 이전가격(Transfer Price)은 특수 관계에 있는 그룹 내 해외 법인 간 또는 모회사와 현지 법인 간에 원재료, 제품, 용역 등을 이전할 때 적용되는 가격을 뜻한다. 그리고 다국적 기업이 이전가격을 통상적인 시장 거래 가격(정상가격)과 다르게 설정해 조세를 피하거나 비자금을 조성하는 일은 종종 있었다. 이를테면, 앞서 언급한 중국의 '빛 좋은 개살구'들은 본사로부터 원재료를 정상가격보다 훨씬 비싼 값에 사들였다. 이런 상태에서 중국 현지 법인이 상품을 많이 팔 경우, 외국에 있는 본사가 이익을 챙기게 된다.

중국에 있는 '빛 좋은 개살구'들은, 사실 높은 이익을 거둬 왔던 것이다. 다만 본사로부터 공급받은 원재료 가격을 높게 책정해서, 이익을 해외로 넘겼을 뿐이다.

이런 사례가 늘어나자, 중국 정부는 이전가격 조작에 대해 엄격한 과세 규정을 만들었다. 1991년 중국 국무원이 제정한 '외자기업소득세법실시세칙' 52~58조가 시초였다. 이후 10여 년 동안, 중국 국무원은 이전가격 조작에 대한 법규를 계속 제정·보완해 왔다.

이런 노력의 결정판이 지난 2004년 9월 제정된 '관련기업간업무왕래예약정가실시규칙'이다. 총 8개 장 33조로 구성된 이 규칙에는 정상가격 산출방법 사전승인제(APA, Advanced Pricing Arrangement)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다.

"조세 회피, 비자금 조성 위한 일" vs "기업의 경영전략에 따른 판단일 뿐"

이전가격 조작을 둘러싼 논란의 핵심은 "'정상가격'을 어떻게 정할 것이냐"라는 문제다. 현지법인이 해외 본사로부터 공급받은 제품·원재료·용역 등의 가격이 과연 비정상적으로 높거나 낮은지를 따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상가격을 산정하는 문제는 매우 까다롭다. 해외 본사로부터 원재료·제품·용역 등을 이상하리마치 높은 가격으로 구입한 현지법인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물건 사면서, 돈 많이 낸 것도 죄가 되느냐"라고 항변한다.

또 세율이 낮은 나라 혹은 회계 감시가 불투명해서 비자금을 조성하기 좋은 나라에 있는 현지법인에 원재료·제품·용역 등을 싼 가격으로 넘긴 본사는 "회사 고유의 해외 마케팅 전략에 따른 결정이다. 시장 점유율이 낮은 국가에서 판매를 촉진하기 위한 결정이었다"라고 항변할 수 있다.

요컨대 정상가격에 대한 기준이 없을 경우, 기업들의 이런 항변에 제대로 반박할 수 없다는 뜻이다.

주한 미 상공회의소 회원들의 민원 사항
▲ 허용석 관세청장이 주한 미국상공회의소 관계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외국인 투자자들의 건의 사항을 듣는 자리였다. ⓒ연합뉴스

이런 문제는 중국만 겪고 있는 게 아니다. 한국에도 다국적 기업이 많이 진출해 있다. 국내 대기업 역시 세계 곳곳에서 현지법인을 운영하고 있다. 한국도 이전가격 조작 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쏟아야 한다는 뜻이다.

마침 허용석 관세청장이 이 문제를 언급했다. 지난 29일 서울 삼성동 인터콘티넨탈호텔에서 주한 미국상공회의소(AMCHAM, The American Chamber of Commerce in Korea) 회원들과 만난 자리에서다. 관세당국이 외국인 투자자들의 건의 사항을 접수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다.

허 청장은 이날 '외국인투자기업 지원을 위한 관세행정 운영 방향'을 설명하며, "외국인투자기업들이 개선을 건의하고 있는 관세청과 국세청의 이전가격 중복조사 및 심사 문제를 해결하겠다"라고 밝혔다. 이를 위해 관세청은 △기획재정부·국세청 등 유관기관과 공식 협의채널 구축 △이윤 및 일반경비비율 산출절차 전산화 추진 △이전가격의 독립거래 인정범위 확대 검토 △수출국 세관당국의 '수출국의 통상이윤' 확인제도 도입 △납세자를 위한 이전가격 관세평가 매뉴얼 제작 등의 방안을 제시했다.

관세청 관계자는 "외국인투자기업들의 편의를 돕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대부분 검토 중인 내용이라서 확정된 것은 없지만, 대체로 '정상가격'의 인정 범위를 넓히는 쪽에 가깝다. 이전가격을 높거나 낮게 책정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외국인투자기업들이 이런 민원을 제기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하지만 "비즈니스 프렌들리" 기조에 맞춰 한국의 과세 당국이 외국인투자기업의 민원을 무턱대고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해 보인다.

"'이전가격 조작' 못 막은 채 경제 개방하면, 이익은 외국으로"

2004년 기준으로, 중국에 있는 외자 기업들이 중국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50%를 넘는다. 하지만 이들 기업들이 낸 세금이 같은 해 총 세수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3.6%에 불과했다. 중국 과세당국은 이들 기업이 본사로부터 들여오는 원재료·제품·용역의 가격은 높게 책정하고, 중국에서 생산하여 해외 법인에 넘기는 제품 가격은 낮게 책정하는 방식으로 이익을 해외로 빼돌렸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외자 기업에 싼 노동력을 공급했던 중국은 결국 '남 좋은 일'만 실컷 했던 셈이다.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왕서방이 챙긴다"라는 속담을 떠올리게 된다. 중국이 '곰'에 해당하고, 외자 기업들이 '왕서방'에 해당하는 셈이다. 뒤늦게서야 중국 정부는 '이전가격 조작'을 막기 위한 조치를 강화하고 있다. "개방만이 살 길"이라고 외치며, 외자 기업에 대한 감시를 소홀히 했던 과거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셈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최근 미국을 방문해 "한국을 세계에서 가장 개방적인 나라가 되도록 하겠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한국 정부 역시 '곰'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주한 미국상공회의소 회원들'의 민원에 귀 기울이기에 앞서, 한국의 과세 행정에 빈 틈이 없는지 점검할 때다.

게다가 지난 반 년 동안, 한국 사회는 재벌의 비자금 및 탈세 의혹으로 몸살을 앓았다. 그리고 이런 의혹은 아직 말끔히 규명되지 않았다. 과세 당국은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정말 모르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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