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부산 국제영화제와 올해 안시 국제애니메이션 페스티벌 초청작인 이 영화는 동성애, 시각장애인, 육아문제, '남성다움'에 대한 강요, 다문화 가정 등 여섯 개 이야기를 소재로 했다. 이 영화에 대한 소개글을 <십시일반> <사이시옷> 등을 펴낸 만화가 유승하 씨가 보내왔다. <편집자>
이름 그대로 다양한 형식과 이야기를 가진 여섯 개의 옴니버스 장편 애니메이션이 우리를 찾아왔다. 최근 개봉한 <별별이야기2- 여섯빛깔무지개>(제작 국가인권위원회)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만나는 사람마다 '별별이야기2'를 보라는 말을 하게 된다. 국내 창작 애니메이션이 일년에 한편 극장에 걸리기 힘든 상황이라는 점 때문에, 만화를 업으로 하는 나로선 의무감 비슷한 마음으로 극장에 간 것 같다. 그런데, 아, 이건 정말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평소 글 쓰는 게 제일 자신 없지만 이 리뷰를 쓰게 되었다.
명선은 앞이 보이지 않는 소녀이다.
어느 날, "소원실행위원회"의 요정이 나타나면서 첫번째 이야기 <세번째 소원>(류정우, 안동희 감독)이 시작된다. 요정은 세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한다. 그런데 이미 있는 장애는 없애줄 수 없다는 것. 퇴근시간이 늦어진다며 소원을 빨리 빌라고 서두르는 '공무원풍'요정에게 "앞이 보이는 게 안 된다면 세가지 소원 따윈 필요 없다"며 명선이 나가버린다. 얼떨결에 명선의 출근길에 동행하게 된 요정. 거리로 나선 명선에게 일어나는 에피소드로 줄거리가 이어진다.
지하철을 타러 간 명선에게 친절한 공익요원이 데려다 준 곳은 승강장이 아닌 나가는 출구다. 장애인을 위하는 목소리는 많아졌지만 내 입장에서의 친절은 아닌지 돌아보게 만드는 대목이다.
명선의 처지를 이해하게 된 요정이 시장 거리를 설명해주는 장면이 나온다. 시각장애인은 어떻게 볼까? 생선과 야채 가게를 지나며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치는 명선의 마음을 애니메이션이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영화에서 명선의 세번째 소원은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명선의 대사로 끝을 맺는다. "전 꿈 속에서도 앞이 보이지 않아요. 그런데 꿈 속에서는 내 맘대로 걸어도 부딪히지 않아요. 심지어 뛰어다니기도 해요."
초등학교 고학년 준이의 포경수술을 소재로 다룬 <아주까리>(홍덕표 감독)가 두번째 이야기다.
19금 영화도 아닌데 포경수술을 어떻게 표현을 할 것인지 난처한 마음으로 보았다. 이럴 때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가 참 유용하다. 포경 수술을 받은 사람의 것은 깎은 과일로, 그렇지 않은 사람의 것은 깎지 않은 과일로 그리는 센스. 보는 내내 웃음과 탄성이 절로 나온다.
포경수술을 해야 진짜 남자가 된다며 강요하는 아빠. 그 아빠를 짓누르는 말 못하는 고민이 화면 가득 심각하게 펼쳐지는데 도리어 관객을 내내 웃게 만든다.
양성평등은 여성의 권리를 높이는 것 만큼이나 또 다른 성의 문제도 있다는 것. "사내대장부가..."로 시작되는 남성들을 알게 모르게 억누르는 사내대장부 콤플렉스도 함께 녹여보자는 취지일 것이다.
출연한 가족들이 모두 내복을 입고 있는 것도 그런 거 아닐까? 서로 편하게 이야기하자고 말이다.
그런데 왜 '아주까리'라는 제목을 썼을까? 식물사전을 뒤적거린다. 이런, 나중에 이유를 알고 뒤집어지는 줄 알았다. 말 그대로다. '아주까리?'
세 번째 이야기는 주변에 너무나 흔한 임신출산육아를 소재로 한 <아기가 생겼어요>(이홍수, 이홍민 감독)다. 임신한 직장여성 은수가 출산을 앞두고 육아를 고민하며 벌어지는 에피소드다.
아이를 낳으면 누가 돌보나...국가도 부모님도 결혼하면 아이를 낳으라고 하지만 사랑과 정성으로 돌봐야 할 아이는 봐줄 사람이 없다.
예전처럼 조부모에게 맡기는 것도 해답이 아니다. 은수 시어머니에게 '착한 척 하지 말고 자신을 돌보라'는 시어머니 친구들의 충고를 통해 노인 인권도 살짝 건드린다.
직장 다니는 엄마는 직장 안에서 갈등이 적지 않다.
넘치는 인력을 마다하고 퇴근시간 "땡" 치면 아이 때문에 "칼"퇴근하고, 혹시라도 애가 아프면 안절부절하는 애 엄마를 회사에서 어디다 칭찬 받자고 데리고 있을까.
이렇게 흔하고 뻔한 이야기를 한 번 더 하면 지겹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신선한 구성과 대사, 연출, 뭣보다 괴상해서 귀여운 그림체와 뒤틀어지고 음울한 색채로 신선함이 가득하다.
영화 보면서 이 작가의 팬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 빠져들었는데, 더욱 놀라고 말았다. 당연히 감독이 여성이리라고 생각했는데 남성작가, 그것도 미혼 남성 둘이 만들었단다. 공 들인 취재의 힘, 열린 감수성이 느껴진다.
그래서 결국 애는 누가 보냐고? 엄마 아빠가 반반씩. 현실 가능하냐를 떠나 그게 정답이니까.
<샤방샤방 샤랄라>(권미정 감독)는 점차 늘어나는 다문화 가정에 대한 이야기다.
친구들이 놀리는 곱슬머리를 가진 은진이, 똑똑하지만 엄마가 필리핀 사람이라 겪게 되는 일상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풀어냈다.
극 중에 나오는 은진이 엄마의 목소리는 실제 필리핀 이주 여성인 펠라씨가 목소리 연기를 했다는데 그래서인지 더욱 현실처럼 와 닿는다. 발음에 대한 차별도 존재하는데 많이 들어서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
'살색'으로만 단일민족의 피부색을 내세우는 우리 사회에 점차 늘어나는 결혼이주여성들과 그 2세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은 우리의 좁은 시각 탓이다. 이제 '살색'은 연주황색에 이어 살구색으로 이름을 바꿨다. 다양한 피부색이 존재하는데도 특정 색을 살색이라고 명명한 지독한 편견은 크레파스 색에서 사라졌듯 우리의 마음에서도 사라져야 할 것이다.
여섯 편중에 특히 어린이들에게 추천하고픈 영화다. 은진이를 주인공으로 한 TV시리즈를 만들면 어떨까. 당당한 은진이와 은진이 엄마의 캐릭터가 '뜰'것 같다.
위 4편이 2D 애니메이션풍이라면 <메리 골라스마스>(정민영 감독)는 클레이 애니메이션이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요즘 아이들이 좋아하는 선물을 마련하고자 백화점 산타 채용에 응시한 진짜 산타들이 입사시험에서 떨어진다. 왜냐면 응시한 진짜 산타들이 여성이거나 장애인이거나 비백인이었기 때문. 그렇지. 산타는 백인이고, 남자이며, 비장애인이어야만 하냐? 산타를 내세웠지만 사실 우리사회 입사채용 장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입체, 산타라는 소재, 배경음악으로 작품 내내 깔려있는 캐럴송이 여섯 작품 중 가장 대중적이고 남녀노소 편하게 즐길 만하다. 대사가 없어 이해하는데 약간 시간이 걸리지만 풍부한 질감과 어디 내놔도 손색없는 클레이애니메이션이다.
<거짓말>(박용제 감독)은 이 영화의 마지막 작품이다. 결혼하라는 부모의 성화에 못 이겨 남성 동성애자가 여성 동성애자와 계약결혼을 감행한다는 에피소드다.
다른 이야기에 비해 러닝타임이 긴 편인데도 조금도 길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질 높은 회화적 분위기가 가득한 절지 애니메이션이며 끝까지 긴장감이 흐르고 순정 만화를 연상하게 하는 미남미녀를 캐스팅한 점 때문이다.
노 개런티로 미인을 쓸 수 있다는 것이 애니메이션의 장점 아니겠는가.
이렇게 수준 높은 애니메이션을 극장에서 볼 수 있다는 행복. 끝날 때 더 보고 싶다는 아쉬움이 가득하다.
한가지 흠을 잡으라면 성적 소수자라도 잘 생기고 경제력이 있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의 차별이 큰데 등장인물이 헷갈릴 정도로 모두 다 너무 멋지다.
그냥 책상머리에서 나온 이야기가 아니라 발로 뛰고 취재를 하여 어렵게 대사를 쓴 정성이 놀랍다.
동성애를 다룬다는 거 자체가 힘든데 계약 결혼이라는 참신한 아이디어까지 가르쳐준다.
그동안 인권영화를 볼 때 내가 이해하려고 애써야 할 것 같고, 뭘 반성해야 할 것 같은 강박이 은연중에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영화는 보는 내내 그저 즐기고 웃고 감탄하기만 했다. 편하게 의자에 몸을 맡기고 말이다.
애들 손잡고 가족 나들이로 다녀오면 좋을 것 같다. 그럴 만큼 '괜찮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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