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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와 '짝퉁'의 '낚시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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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와 '짝퉁'의 '낚시 전쟁'

[홍성태의 '세상 읽기'] 뉴타운과 '투기 정치'

역시 예상대로 18대 총선은 한나라당의 승리로 끝났다. '근혜당'과 '회창당'까지 더하면 그야말로 보수의 압승이다. 그렇기는 해도 아무튼 특징들을 찾아내고 올바로 해석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먼저 '낡은 것의 복귀'라고 할 만한 상황이 빚어졌다. 영남은 한나라당과 '근혜당'이, 충청은 '회창당'과 민주당이, 호남은 민주당이 차지해서 지역주의의 부활과 비슷한 모습을 보였다. '3김 시대'가 끝난 것도 이미 꽤 오래 되었지만 영남, 호남, 충청의 지역 구도는 아직 죽지 않았다. 상당히 약화되고 변형된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그 바탕에는 역시 종래의 지역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지역주의는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가? 독재를 위한 것인가? 민주주의를 위한 것인가? 유권자 자신을 위한 것인가? 고상한 이데올로기의 허울을 벗기고 보면, 지역주의도 역시 유권자 자신을 위한 것일 수밖에 없다. 지역주의는 자원이 한정된 상황에서 자신과 가까운 지역적 연고를 갖고 있는 사람을 선출하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할 것이라는 계산과 기대의 산물이라는 성격을 갖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역주의를 단순히 박정희의 정략적 산물로만 보는 것은 잘못이다.

독재는 지역주의를 이용해서 민주주의의 외피를 쓸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박정희 이래의 군사독재는 영남 독재이기도 했다. 영남 독재는 영남지역이나 영남지역 출신 인사들이 자원과 자리를 독과점하는 사회를 만들었다. 여기에 맞서서 다른 지역, 특히 호남이 민주주의를 내걸고 나섰다. 이것은 자원과 자리의 불평등한 배분을 강요하는 영남 독재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것이었으므로 단순히 지역주의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민주주의의 구현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민주화는 영남 독재의 약화뿐만 아니라 그것이 정당화의 기반으로 삼았던 지역주의의 약화를 뜻해야 했다. 그러나 여전히 지역주의는 막강하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민주주의보다 지역주의를 더 믿는다. 그런데 영남과 호남의 차이를 떠나서 지역주의의 바탕에는 사실 개발주의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민주화를 통해 영남 독재의 문제가 해결되자 지역주의는 사실상 개발주의의 알리바이가 되었다. 민주주의를 내걸고 지역주의를 관철하며, 지역주의를 내걸고 개발주의를 관철하는 것이다.

여기서 수도권의 변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나라당이 서울과 경기를 장악한 것은 단순히 민주당이 인기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가 아니다. 한나라당은 단순히 '원조 독재 세력'의 적자가 아니라 '원조 개발 세력'이기도 하다. 민주화와 함께 한나라당은 '원조 개발 세력'의 성격을 더욱 강화했다. 노무현의 집권 5년은 '원조 개발 세력'의 문제를 해결하는 시간이었어야 했다. 그러나 잘 알다시피 그렇게 되지 않았다. 오히려 노무현은 개발주의를 강화해서 '원조 개발 세력'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 ⓒ서울시균형발전본부

노무현은 독재 대 민주의 대립 구도가 사라진 자리에 개발주의 대 개발주의의 대립 구도가 들어서게 만들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이 대립 구도는 '원조 개발 세력' 대 '짝퉁 개발 세력'의 대립 구도이다. 개발주의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최소한 완화할 것이라고 기대했던 세력이 또 다른 개발세력이 되고 만 것이다. 노무현을 지지한 많은 사람들은 노무현이 배신했다고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점에서 노무현의 정치는 '배신의 정치'였다. 고상한 이념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개발주의의 문제에 대해서는 무지했던 것 같다.

'배신의 정치'에 당한 많은 사람들이 이제 '원조 개발 세력'을 지지해서 일신의 영달을 도모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개발주의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완화하리라고 기대했던 세력이 오히려 개발주의를 악화하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차선의 또는 차악의 합리적 선택은 '원조 개발 세력'을 지지해서 떡고물을 크게 하는 것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개발과 투기의 열기가 가장 뜨거운 서울과 경기에서 한나라당이 압승을 거둔 것은 당연할 뿐이다. 이제 한국 정치는 지역주의에서 개발주의로 확실히 옮아갔다.

'뉴타운 낚시' 때문에 정국이 혼란스럽다. 한나라당 후보들은 '뉴타운 낚시'로 많은 유권자들을 낚았다. 그들은 유권자들이 바라는 '떡밥'을 잘 던졌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사기'이고 '불법'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하고, 시민의 선택은 다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뉴타운 낚시'에서 천박하다는 말이 딱 어울릴 만큼 노골적으로 드러난 많은 시민의 상태는 결국 또 다른 개발주의 경쟁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짙다. 그리고 서울과 경기에서 활활 타오른 개발과 투기의 열기는 지방으로 번질 것이다.

이미 노무현 정부는 5년 동안 100조 원이 넘는 막대한 개발보상금을 풀어서 지방도 개발과 투기로 한몫 단단히 챙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그리고 이명박 정부는 노무현 정부보다 더 많은 것을 챙길 수 있도록 해 주겠다고 공공연히 약속하고 있다. 그러니 이 나라가 어디로 가겠는가? 개발과 투기의 열기는 더 뜨거워질 것이다. 우리의 민주화는 '투기의 정치'를 맹렬히 돌진하고 있다. 개발주의는 환경운동에서 고민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보수 세력조차 고민해야 하는 질병이다. 개발주의의 폐해는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개발과 투기의 열기가 활활 타오르는 것에 대해 '욕망의 정치'라는 설명이 제시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1990년대 초 서구 문화연구의 수입과 함께 퍼진 이 개념은 사실 모든 억압으로부터 개인의 해방을 추구하고 새로운 사회운동의 핵심이다. 이에 비해 무조건 더 많은 돈을 추구하는 '투기의 정치'는 개인의 해방과 이를 위한 사회의 개혁과 전혀 무관한 극히 폐쇄적이고 파괴적인 현상이다. 개발과 투기의 문제를 직시하고 개혁하지 않는다면, 진보가 곧 멸종할 것은 분명하지만, 보수도 아주 두통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희망이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한반도 대운하'라는 전대미문의 개발 사업을 지휘했던 이재오와 박승환의 낙선은 분명히 이 황당한 망국적 사업에 대한 심판이라는 성격을 갖는다. 투기와 개발의 열기가 갈수록 뜨거워지는 팍팍한 토건국가이기는 해도 대다수 국민의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사업을 해서는 안 된다는 상한선이 제시된 것이다. 이 상한선이 사실 아주 높은 것이어서 한참 더 내려야 한다는 것을 널리 알리고, 이로부터 진정한 개혁과 진보의 길을 열어야 한다.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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