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양평에 있는 김용철 변호사 집에는 개가 많다. 그 중 진돗개 한 마리가 새끼를 잃어버리고 나서, 집을 나가 들판을 떠돈다. 이런 이야기를 전하는 김 변호사의 표정에 그늘이 짙었다.
편안한 집을 떠나서 들개가 돼 버린 진돗개를 보며, 그는 자신을 떠올렸던 걸까. 그래서 불안해진 걸까. 연방 "집 나가면, 죽는데…"라고 중얼거리는 그에게 대뜸 물었다. "졌다고 보느냐"라고.
"삼성 특검 수사 결과, 믿는 사람 얼마나 되나?"
20일 오전, 그의 집을 찾아가 이렇게 물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의 양심고백이 계기가 돼 출범한 조준웅 특별검사팀이 결국 삼성 비리 의혹 대부분에 대해 면죄부를 줬기 때문이다.
특검 수사 결과가 나온 직후, 김 변호사는 "인생을 걸고 싸우겠다"고 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절망하고 있지 않을까. 삼성 총수 일가, 그리고 그들에게 기생하는 무리의 힘 앞에서 패배감을 느낀 것은 아닐까.
그래서 질문을 던졌고, 김 변호사는 "'탁 치니까 억 하고 죽더라'는 말을 누가 믿었나?"라고 맞받았다. 특검 수사 결과를,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고(故) 박종철의 사망원인에 대한 당시 치안 당국의 발표문에 빗댄 셈이다.
특검이 지난 17일 "삼성이 비자금 조성, 불법 로비 등을 저질렀다는 혐의를 찾지 못했다"고 발표했지만, 대부분의 국민은 이를 믿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또 1987년 당시처럼 공권력의 수사 결과와 사건의 진실은 다르다는 뜻이기도 하다.
"전직 대통령도 감옥에 보낸 나라에서 한 사람만 예외라니…"
이어 그는 "(1987년 당시, 박종철의 죽음에 관한) 진실이 밝혀지는 데 5개월이 걸렸다. 당시에도 언론은 진실을 외면했다. 그때보다는 지금 상황이 낫다고 본다"라고 덧붙였다.
'삼성 문제'를 공론화한 것, 그리고 '삼성이 휘두르는 힘'의 실체를 국민에게 보여준 것만으로도 이미 꽤 성공한 셈이라고 했다.
"끝이 나야, 졌는지 이겼는지가 판가름 날 것 아닌가. 아직 끝나려면 멀었다"라는 대답도 뒤따랐다. 삼성 비리 의혹을 규명하기 위한 싸움은 이제 시작이라는 이야기다.
그는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우리 국민이 얼마나 똑똑한데"라는 말을 여러 번 했다. "미 군정 거친 나라 중에 민주화와 경제성장을 동시에 이룬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는 이야기도 자주 곁들였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는 꼭 "그래서 우리 국민은 힘으로 다스릴 수 없다"라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전직 대통령도 잘못이 드러나니 결국 감옥에 보냈다. 4·19혁명으로 현직 대통령을 몰아내기도 했다. 또 현직 대통령의 아들까지 감옥에 갔었다. 그런데 오직 한 사람은 절대 권력을 휘두르면서도 끝내 오만하다. 이런 상태가 얼마나 가리라고 보나. 오래 못 간다. 똑똑한 우리 국민이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가 말하는 "오직 한 사람"은 당연히 이건희 삼성 회장이다. '법'을 다루며, 청·장년기를 보낸 그는 '법의 사각지대'가 공공연히 인정된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듯했다.
"세금 포탈한 게 공익 위한 일인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에게는 면책특권이 있다. 그런데 법을 배우면서, 재벌 총수에게 이런 권한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최고 기업의 총수는 법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재벌 특권', '경제 특권'이라는 게 있는 모양이다. 다들 아는 건데 나만 몰랐나. 나만 바보였던 건가.
특검은 이건희 회장 등을 구속기소하지 않는 이유가 '사적 탐욕에 의한 범죄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게 말이 되나. 세금을 포탈한 게 '사적 탐욕' 때문이 아니라는 말인가. 그렇다면 세금 떼먹으면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뜻인가. 또 법을 어겨가면서, 재벌 소유권을 장악하고 물려주려는 게 '사적 탐욕' 때문이 아니었다면, 공익 목적을 위한 일이었다는 말인가.
하긴 어떤 신문을 보니,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꽤 있는 모양이더라. 재벌의 특권을 보호하는 게 공익을 위한 일이라면, 내가 잘못한 게 맞다. 공익을 훼손했으니까. 내가 미친 짓을 한 셈이다. 그렇다면, 나를 이렇게 멀쩡히 지내도록 내버려두면 안 되는 것 아닌가. 차라리 나를 잡아 가둘 일이지."
이 대목에서 그의 표정 위로 열기가 일렁였다. '법대로'가 통하지 않는 현실에 대한 분노다.
"앞으로 생계형 범죄 처벌할 수 있겠나"
"앞으로 이 나라가 사법권을 어떻게 행사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먹고 살기가 어려워서 빵 하나 훔친 단순 절도범도 처벌해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이제 누가 법의 처분을 고분고분 따르겠나. '무전유죄, 유전무죄(無錢有罪, 有錢無罪)'라는 말이 자연스레 나오지 않겠나. '돈 있으면, 아무리 큰 죄를 저질러도 벌을 안 받는데 돈이 없으니 감옥에 간다'라는 하소연이 쏟아질 게다. 이래서 사법질서가 유지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법치주의 근간이 허물어진다.
특검이 차명계좌에 대해 관대한 태도를 보인 것도 문제다. 비자금 조성 여부를 떠나,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자산을 관리하고 거래하는 행위 자체가 이미 중대한 불법행위다. 금융실명제의 근간을 흔드는 짓이다. 그런데 특검은 '차명계좌 한두 개 없는 사람도 흔치 않지 않느냐'라고 말했다고 한다. 과연 그런가. (기자를 가리키며) 당신은 차명계좌가 있나? ('없다'고 대답하자) 내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마찬가지다. '차명계좌가 있다'는 사람은 없었다.
왜 자기 재산을 남의 이름으로 관리하나. 불안하지도 않나. 불안하다고 느끼는 게 정상이다. 그래서 금융실명제법이 있는 거다. 그런데 특검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다. 이런 황당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삼성 특검을 맡았다니, 어이가 없다."
"계속 말을 바꾼 게 누구인가?"…"삼성특검은 '대국민사기극'"
특검이 법치주의를 훼손했다는 비판은 계속 이어졌다. 이 대목에서 그는 여전히 '검사스러웠다.' 김 변호사를 만난 이들 가운데는 그를 지지하면서도, 싫어하는 사람도 제법 있다. 대개는 이처럼 '검사스러운' 태도에 질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끝내 그는 '검사 근성'을 버릴 마음이 없는 듯했다. 특검팀 소속 수사관들을 가리켜 그는 "수사의 기초도 모르는 오합지졸"이라고 꾸짖듯 비판했다.
"특검 수사는 대국민 사기극이다. 수사도 할 줄 모르는 사람들 데리고 뭘 하려고 했던 건지…. 내 진술 조서를 내가 써서 팩스로 보내라고 하더라고. 진술 조서 한 장 꾸밀 줄 모른다는 건가. (수사할 대상 가운데) 검사가 많이 있고, 학교 선배가 많이 있어서 수사 못하겠다는 거다. 정말 그렇게 이야기하더라고. 수사검사나 특검보가 '삼성 수사해서, 좋은 꼴 보겠나'라는 말도 했지. 나는 50년 인간관계 다 포기하고 나섰는데, 자기들은 그렇게 못 하겠다는 거지. 이게 '특별검사팀'의 실체다.
특검이 나보고 진술의 앞뒤가 맞지 않다고 하던데, 말의 앞뒤가 안 맞는 것은 오히려 특검 측이다. 수사 초기에 내가 특검팀을 발 벗고 나서서 도와줬다. 삼성화재가 비자금을 조성해서 구조본으로 보냈다는 내용에 대해서는 내가 직접 제보자를 만났다. 이런 내용을 접하면서 '삼성 계열사가 조성한 비자금이 구조본에 간 사례를 찾았다'며 좋아하더니,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삼성화재 내부 비리라고 했다. 계속 말을 바꾼 게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특검은 '딜'을 제안했다"
그가 이토록 특검을 불신하는 이유는 단지 특검이 그를 공개적으로 비난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특검팀으로부터 '딜(거래)'를 제안 받았다고 했다.
김 변호사는 현재 명예훼손 소송에 휘말려 있다. 삼성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의혹을 받은 이들이 김 변호사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이다. 김 변호사에 따르면, 특검팀은 이 소송에서 김 변호사가 불리하지 않도록 결론을 내려주겠다고 제안했다. "로비를 한 정황이 의심스럽지만, 증거가 없다" 정도로 결론을 내리면, 김 변호사와 로비 의혹 당사자 모두를 보호할 수 있다는 것. 특검 관계자는 검찰 역시 이런 결론을 원한다고 했다.
이런 경험이 쌓이자, 김 변호사는 "'면죄부 조사를 할 것이라면 더는 진술 안 하겠다'는 말을 반드시 조서에 남겨 달라"고 특검 측에 요구했다.
"수사기관이 돈세탁해주는 드문 기회…삼성은 '행복한 고민' 중"
"하긴, 말을 자주 바꾼 것은 특검만이 아니다. 삼성은 더 자주 바꿨다. 사태 초기에 삼성은 차명계좌의 존재 자체를 계속 부인했다. 그러다가 '이 계좌가 너희 것 맞다'라고 찾아주니까 이번에는 '상속재산'이라고 우겼다. 왜 자꾸 말을 바꾸는지, 이런 해명이 사실인지 따져보지도 않은 채, 특검은 선선히 인정했다. 결과적으로, 특검이 삼성이 숨겨놓은 돈을 깨끗이 세탁해서 돌려준 셈이 됐다. 삼성으로선 아주 잘 된 일이다.
지금쯤 삼성 내부에서는 고민께나 하고 있을 게다. 삼성이 관리하는 게 차명주식만이 아니니까. 아직 드러나지 않은 차명예금, 차명부동산 규모도 엄청나다. 어차피 한 번 창피 당한 김에, 나머지 차명자산도 공개해서 모조리 인정받을까. 규모가 너무 크면 사회가 놀랄 테니, 계속 숨겨둬야 할까. 이런 갈림길에서 무척 갈등하고 있을 게다."
특검 수사가 끝난 뒤, 삼성은 오히려 '행복한 고민'을 하게 됐다는 지적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수사 결과가 나온 뒤, 삼성과 중앙일보가 취한 태도에서도 엿볼 수 있다.
특검 수사 결과가 나온 다음날인 지난 18일, <중앙일보> 1면에는 "특검 수사 결과 김용철 씨의 주장이 거짓으로 밝혀짐에 따라 (중앙일보는) 김 씨에게 민·형사상의 책임을 묻겠다"라는 기사가 실렸다. 김 변호사와 사제단에 대한 반격 신호다. 삼성 역시 표정 관리를 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래서 삼성이 곧 내놓겠다는 '대대적인 경영 쇄신안' 역시 별 내용이 담겨 있지 않으리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이런 말을 꺼내자, "중앙일보는 어차피 몇 달 전부터 소송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말만 그렇게 하고, 정작 소송은 안 하더라고"라는 심드렁한 대답이 돌아왔다. "명예훼손 소송하면, 차라리 좋지. 사실 관계를 다시 확인할 기회가 생기는 셈이니까"라는 말도 덧붙였다.
"이학수 퇴진?…'이재용 체제 다지기'에 불과"
비록 특검으로부터 사실상 '면죄부'를 받았다해도, 삼성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넘어갈 수는 없다. 수사를 통해 드러난 사실만으로도 국민적인 공분을 사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이런 여론 때문에라도 삼성은 곧 '경영쇄신안'을 내놓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전략기획실을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계열사 자율 경영을 강화 한다'는 둥 여러 이야기가 나오겠지. 그걸 누가 믿겠나. 예전에도 삼성 그룹 조직이 삼성물산에 포함돼 있었던 적이 있다. 이번에도 전략기획실 조직을 계열사에 숨겨놓을 가능성이 있다. 삼성이 스스로를 쇄신한다? 가능성이 없다고 본다. 쇄신의 대상이 거꾸로 쇄신의 주체가 되겠다는 셈 아닌가. 이게 가능할 리 없다.
또 이학수 부회장 등 가신 그룹이 퇴진한다는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다. 역시 별 의미 없는 소리다. 이 부회장 등은 이건희 회장의 가신이다. 따라서 곧 들어설 이재용 체제에서는 물러나야 할 사람이다. 특검 수사 결과를 핑계로 이재용 후계 체제를 굳게 다지는 절차에 불과하다.
삼성은 여러 계열사로 나뉘어 있지만, 결국 하나의 회사와 마찬가지다. 전략기획실(옛 구조조정본부)이 계열사 경영에 깊숙이 관여하기 때문이다. 겉모양을 어떻게 꾸미건, 이런 체제가 바뀌지는 않을 게다. 이런 구조에서는 해당 계열사 사업에 정통한 전문경영인이 나올 수 없다. 모두 총수의 친위대 역할을 하는 전략기획실의 눈치만 보기 때문이다."
"윤종용? 어차피 얼굴마담이다…권력은 총수와의 거리에 반비례한다"
삼성 전략기획실이 계열사를 너무 심하게 통제한다는 지적은 이미 오래 전부터 나왔었다. 김 변호사가 아니어도 이런 지적을 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삼성이 윤종용, 진대제, 황창규 등 스타 경영자들을 배출한 것도 사실이다. 이들 역시 전략기획실의 눈치를 보며 지냈을까?
"윤종용? 어차피 얼굴마담이다. 이학수가 윤종용을 얼마나 우습게 알았는데"라는 대답이 나왔다. 직급도 똑같이 '부회장'이고, 연배도 비슷하지만 이건희 회장의 가신으로 분류되는 이학수와 그렇지 않은 윤종용은 결코 '동급'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개인의 능력이나 회사에 대한 기여도가 아니라, 이 회장과의 거리가 삼성 내부에서의 위치를 결정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황제 경영'만 사라지면, 삼성 주가 확 뛰어 오를텐데…"
"삼성 비리 문제가 제대로만 해결되면, 삼성 계열사 주가가 지금보다 훨씬 뛰어오를 거라고 본다. 이건희 회장 일가와 그 가신들을 정점에 둔 '황제식 경영'이 삼성에 낳은 폐해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이런 사례는 아주 흔하다. 예전에 '제일모직'이라는 회사 이름이 조금 낡은 느낌을 주니까 바꾸자는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다. 유력한 대안까지 나왔는데, 거부당했다. 이학수, 김인주 씨 때문이다. 둘 다 이른바 '일모회'다. 제일모직 출신이라는 뜻이다. 그들은 과거 삼성의 대표 기업이었던 제일모직에 대해 강한 향수를 느낀다. 이런 이유로, '제일모직'이라는 이름을 못 바꿨다. 정상적인 경영논리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삼성이 모든 분야에서 성공한 것은 아니다. 제일모직이 만든 골프복을 보라. 훨씬 규모가 작은 경쟁사에게도 밀린다. 총수 일가의 간섭이 심한 분야일수록 이런 경우가 많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삼성전자의 성공사례가 대표적이다. 삼성전자는 세계적인 기술자와 연구인력을 모으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들이 뛰어난 제품을 개발했다. 그래서 시장에서 인정받았다.
삼성이 제대로 거듭나려면, 이처럼 스스로의 강점에 집중해야 한다. 하지만 이건희 회장 일가 때문에 그게 안 된다. 그들은 자신의 취향을 계열사 경영의 세세한 부분에까지 반영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는 정상적인 경영이 이뤄질 수 없다. 마찬가지 이유로, 뛰어난 경영자 역시 나올 수 없다. 총수의 눈치를 보는 이들만 생겨날 따름이다."
"임직원 전체가 공범이 됐다"…"배신자 나올까 두려워 '임원 물갈이'도 못한다"
특검 수사가 제대로 이뤄졌다면, 삼성이 '황제식 경영'에서 벗어나 합리적인 경영체제를 갖춘 기업으로 거듭날 수 있었으리라는 아쉬움이 말끝마다 묻어났다. 김 변호사는 특검의 면죄부 수사가 길게 보면 삼성에 '독'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특검 수사 때문에 삼성전자 등 주요 계열사 경영에 차질이 생겼다고 한다. 일부는 맞는 말이다. 지난해 이뤄졌어야 할 임원 인사가 계속 미뤄졌다. 단지 인사 발령이 좀 늦어졌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특검 수사를 거치며, 삼성 임·직원이 모두 '공범'이 돼 버렸다. 그래서 도태시켜야 할 임원을 내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내쫒으면, 조직의 비밀을 누설할지 모르니까. 임원 물갈이를 할 수 없게 됐다. 이게 문제다.
"삼성전자 임원 성과급, 일종의 '내부 매수'다"
삼성전자 임원에게 지난해 지급된 성과급 액수가 한때 화제가 됐다. 엄청난 규모의 성과급을 풀었다. 그게 순수한 목적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일종의 '내부 매수'다. 돈으로 입을 다물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단기적으로는 효과가 있었다. '배신자'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정상적인 경영이 가능할까. 아니다. 경영에 큰 부담이 된다. 삼성이 내세우는 '무노조 경영' 역시 유지하려면 엄청난 비용이 든다. 노조 결성 움직임을 무마하려면 돈으로 회유해야 하니까. 그런데 '내부 매수'를 계속 하려면, 더 큰 비용이 든다.
더구나 고액 성과급이 '내부 매수'의 성격을 띠고 있다 보니, 회사의 비리에 깊이 연루된 사람일수록 성과급을 많이 받았다. 주로 재무, 인사 등 관리부서에 속한 사람들이다. 기술자들이나 연구 인력이 상대적으로 적은 보상을 받게 됐다. 기업 경쟁력에 대한 기여도와 보상 사이의 괴리가 생긴 셈이다. 이런 상태가 계속 유지될 수 있을 리 없다. 곧 부작용이 생겨날 게다."
"비자금 관리책 강부찬, 왜 안 불렀나?"
이건희 회장의 구속을 반대한 이들이 주로 내세웠던 이유가 '경제 살리기'였다. 세계적인 대기업의 경영에 차질이 빚어져서는 안 된다는 이유다. 하지만 김 변호사는 특검의 부실 수사가 오히려 삼성의 경영에 독이 됐다고 말했다.
"특검이 삼성을 제대로 수사하는 게 오히려 삼성의 경영을 정상화하는 길"이라고 주장한 이들은 김 변호사 외에도 많다. 이들이 주로 주목한 것은 비자금 의혹이다. 만약 삼성이 비자금을 조성했다면, 분식회계를 통해 이를 숨겼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인 삼성 계열사에서 분식회계가 일상화돼 있다면, 한국 경제의 건강한 미래를 기약하기 어렵다.
하지만 특검은 삼성 비자금 의혹 대부분에 대해 '무혐의'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이런 결과를 받아들이기에는, 비자금 의혹을 뒷받침하는 정황 증거가 너무 많다.
"1992년부터 1999년까지 삼성 SDI(당시 삼성전관)에서 해외비자금을 만드는 일을 했다"고 스스로 고백한 강부찬 씨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강 씨가 밝힌 내용은 김용철 변호사의 진술과도 일치했다. (☞관련 기사: 여전히 수상한 샘플비…특검은 뭐 했나?)
이쯤 되면, 현재 미국에 머물고 있는 강부찬 씨를 불러 조사하는 게 당연하다. 게다가 김 변호사는 "강부찬 씨가 비자금 장부를 빌미로 삼성을 괴롭혔다"고 말했다. 강 씨에게 비자금 조성에 연루됐다는 점 외에도 여러 혐의가 적용될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특검은 강 씨를 소환하지 않았다.
김용철 변호사는 "강부찬 씨가 미국에 있다는 게 문제가 된다면, 범죄인인도조약을 적용하면 된다. BBK 사건에 연루된 김경준 씨도 결국 불러들이지 않았는가"라고 말했다.
강부찬 씨처럼 비자금 의혹의 열쇠를 쥔 이들이 아직 조사를 받지 않았다는 점은 삼성 특검 수사의 허점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이런 허점이 있는 한, 삼성 비자금 의혹은 언제라도 다시 불거질 수 있다.
"특검, ''삼성식'으로 권력층 관리하라'는 신호 보냈다"
물론 비자금 의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재벌이 삼성만은 아닐 게다. 따라서 삼성 특검 수사 결과는 다른 재벌에게도 의미 있는 신호로 받아들여졌을 가능성이 크다. 김 변호사에게 의견을 물었다.
"삼성 특검 수사가 다른 재벌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하면, 끔찍하다. '삼성식'으로 해야 한다는 교훈을 남긴 셈이니까. '평소 정·관·법조계 인사들 잘 관리하고, 언론도 확실히 장악해 두면, 문제가 생겨도 총수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다'는 생각이 경제계 전체로 번지지 않겠는가."
그는 이번 사태를 거치며, 삼성이 언론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 새삼 놀란 듯했다.
"언론이 원하는 것은 '쇼잉'"…"부장이 쓰지 말라고 해요"
"언론이 원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쇼잉(보여주기)'이더라. 촬영할 장면만 있으면 된다는 거지. 특검 역시 그걸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차명계좌 명의자들을 하나씩 불러서 시간 보내는 짓을 반복했나 보다. 언론에 보여줄 '장면'이 필요했으니까.
양심 고백 직후, 삼성 측에게서 '언론을 확실히 장악하고 있다'는 자신감이 느껴졌다. 나중에 알게된 기자들에게 실제로 들어봐도 그랬다. 밤중에 내게 전화해서 그런다. '부장이 못 쓰게 해요', '위에서는 대세에 지장 없으면 쓰지 말라고 해요'
언론이 이처럼 삼성에 예속돼 있는 줄은 미처 몰랐었다. 이번 사태 거치며 알게된 사실이다."
"한 달쯤 지나면, 찾는 사람도 없겠지"
이제 이런 언론 역시 김 변호사에 대한 관심을 거두고 있다. 그는 "앞으로 한 달쯤 지나면, 찾는 사람도 없겠지"라며 쓰게 웃었다.
하지만 그를 찾는 사람이 하나씩 줄어가도, 그는 계속 싸울 작정이다. 그의 주위에는 순교자의 자세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을 세상에 알렸던 사제단 신부들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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