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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타'의 추억…"애들 좀 그만 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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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타'의 추억…"애들 좀 그만 잡자"

[기자의 눈] '야자' 마지막 세대를 자청하며

1.

1996년 대학 신입생 때였다. 연일 이어지던 신입생 환영회 술자리에서 한국으로 유학 온 재미교포 동기가 뜬금없이 "한국 애들은 어떻게 이렇게 밤늦게 까지 술을 잘 마셔? 난 10시만 넘으면 졸려 죽겠던데"라고 물었다. 난 간단명료하게 답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야자(야간자율학습)로 단련돼서 그래. 새벽 1~2시 이전에 자 본 친구들 거의 없을 걸."

나의 이 레퍼토리는 나중에 '한국 사람들이 야근을 잘 하는 이유'로 발전됐다.

2.

가족 모임 자리에서 형이 고등학교 다니는 조카에게 '학교 생활'을 물어봤더니 조카는 이번 시험은 어떻고 숙제는 어떻고 불평불만을 한바탕 늘어놓았다. 그런 조카에게 형은 "그래도 나중에 돌아보면 그 때가 좋았느니라"고 핀잔을 줬다. 그리고 내게 동의를 구하듯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그런 형에게도 간단명료하게 답했다.

"죽었다 깨어나도 '고딩'(고등학생) 시절과 '군바리'(군인) 시절로는 안 가."

'세월이 약'이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은 자기방어에 뛰어난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을 괴롭힐 수 있는 나쁜 기억을 알아서 지우는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돌이켜 보건대 내겐 고등학교 시절의 추억이 없다. 별로 의미 없거나 나쁜 기억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졸업한 지 13년이 지난 지금 다 지워버렸기 때문으로 사료된다.
▲ 70~80년대 초중반 하이틴 영화는 '얄개 시리즈'나 '돌아이'와 같이 개구장이나 남성 영웅이 등장하는 것이 주류였으나, 80년대 후반~90년대 에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사진), <그래 가끔은 하늘을 보자>, <여고괴담>과 같이 학업과 학교에 억압된 청소년의 고민이 주요 소재로 떠오르며 인기를 끌었다. ⓒ프레시안

3.

그런데 최근 뉴스들이 고등학교 시절의 나쁜 기억들을 다시 끄집어내고 있다. '0교시', '야자', '우열반'….

고3 때 0교시가 8시에 시작했는데 학교에는 7시20분까지 가야 했다. 40분동안 청소와 조회가 이뤄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난 거의 매일 같이 지각을 했었다. 심지어 아침 밥상 앞에 앉아 있으면 어머니가 "지각인데 꼭 아침을 다 먹고 가야겠니"라고 걱정할 정도였다. 그래도 난 꾸역꾸역 아침을 다 먹고 학교에 갔다. '잠을 줄이라'는 충고도 있었지만, 학교에서 밤 12시까지 야자를 하고 독서실에 들렀다 집에 오면 2시인데 더 줄일 시간은 없었다.

'지각 불구 아침 사수' 신조 덕에 0교시 끝나고 도시락을 까먹지 않는 사람은 나를 비롯해 반에 3~4명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점심 때 저녁 도시락을 까먹거나 잠을 잤고, 저녁에는 매점에서 컵라면을 사먹거나 군것질로 끼니를 때웠다.

4.

6세 때 국어를 깨친 이후 10여년 만에 가장 처음 '이런 말도 안 되는 단어가 어디 있나'라는 느낌을 들게 한 단어가 '야자'다. 야간에 '자율적'으로 남아 학교에서 공부하는 친구를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그나마 앉아서 공부를 하면 다행. 귀신같이 이어폰을 숨겨 끼고 라디오를 듣거나, 가장 면적이 넓은 책을 표지 삼아 만화책을 보거나, 대걸레 자루에 머리에 '땜빵' 생길 거 각오하고 퍼져 자거나가 대부분이었다. 나도 그 시절 <슬램덩크> 등 섭력한 만화책만 수 천 권이 될 듯하다.

국어사전에서 '야자'를 찾아보면 '야자나무'의 야자(椰子)와 '촌티'를 뜻하는 야자(野姿) 두 가지가 있다. 야간자율학습의 야자는 '야자'가 아니라 '야타'(야간타율학습)로 국어사전에 올려야 한다.

참, 모두가 '야타'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과외나 학원수업을 듣는 몇몇 친구들은 담임 허락 하에 '야타' 시간에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7막7장>의 홍정욱을 동경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완전 자율학습'을 하고 있었으니까. 나도 '유학'이나 '야자'를 해보고자 과외를 해볼까 했으나, 집안 형편이 허락하지 않았다.

5.

야타시간 우열반의 추억도 빼놓을 수 없다. 당시 담임은 내게 "너는 서울대학교 국민윤리교육과에 가야 할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난 놈"이라며 A반에 집어넣었다. A반은 서울대, 연·고대를 목표로 하는 상위권 학생들을 위한 반이었다. 이미 '이 놈은 서울대 갈 놈, 저 놈은 그냥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갈 놈, 나머지는 서울에 있지 않은 대학에 갈 놈'으로 나눴는데, 서울에 있지 않은 대학에 갈 놈을 위한 우열반은 없었다.

솔직히 난 그 정도의 실력이 되지 못 했다. 특히 당시 수능시험과 함께 대학별 본고사가 부활한 때여서 교재는 온통 일본 도쿄대 수학 문제나 와세다대 영어문제집이 주류였다. 도저히 풀 능력이 안 됐다.

그런데 그런 문제들을 척척 풀어내는 친구들을 보면서(사실 배워서 푼다기보다는 원래부터 풀 줄 아는 녀석들 같았다) 좌절감은 늘어만 갔고, 급기야 보통 빈자리를 보고 출석 여부를 확인하는 선생님들을 속이기 위해 책상을 들고 담장을 넘는 '땡땡이'를 치기 시작했다.

참, 학교에서 과외 수업까지 시켜주니 공교육의 정상화가 아니냐고? 천만의 말씀. 공짜는 없다. 1교시부터 6교시 외의 0교시, 야자는 전부 별도로 돈을 내야 했다. 그리고 '야자'를 하던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과외파는 이마저도 유유히 제끼고 제 살 길을 찾아 갔다.
▲ 학교 자율화 반대 시위를 알리는 청소년 단체들의 포스터. ⓒ프레시안

6.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 '야자 세대'는 내가 마지막이었다. 1학년 때는 10시, 3학년 때는 12시까지 야자를 했는데, 바로 아래 학년부터는 야자가 금지돼 없어졌다.

2학년 때는 저녁마다 불 꺼진 채 텅 빈 1학년 교실을 바라보며 상념에 젖었고, 3학년 때는 불 꺼진 1,2학년 교실을 바라보며 "야자가 없는 저녁에는 무엇을 할까?"라는 생각을 했더랬다. '도대체 누구 보라는거야'라고 생각했던 저녁 7~8시 사이의 청소년 드라마를 그들은 볼 수 있었겠지라고 생각했다. 물론 불안한 마음에 단과학원에 다녔을 가능성이 매우 높지만.

그런데 나 이후에 '야자'라는 것이 완전히 사라진 줄 알았는데, '학부모 동의'라는 편법으로 공공연히 다들 해왔나 보다. 그런데 그것도 강남 같은 곳에서는 과외나 학원수강 하는 학생들이 많아 별로 안 했다고 한다. 협찬사의 압력인지 모르지만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고등학생 주인공들은 하교하며 "학원에서 봐"라고 자연스럽게 말한다. 그런 세상이다.

7.

어린 시절 그림도 그리고 싶고, 기타도 치고 싶고, 운동부에도 들고 싶고, 연극 동아리도 하고 싶었던 시절이 있다. 이런 꿈에 대해 어른들은 항상 "대학에 가서 하라"고 말했다. 지금은 그런 것 같지도 않지만 대학 시절에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었지만, 내 선택에 의해 하지 않았다. 다른 할 것이 많았기 때문에. 사실 대학에 가서 하려면 돈도 많이 든다.

지금 돌이켜 보면 대학 시절 추억은 가득하다. 그런데 고등학교 시절 추억은 거의 없다. 책상 들고 땡땡이치던 기억 외에는. 내가 머리가 나쁜 탓만은 아닐 것이다.

'기러기 아빠'들 욕할 것 하나 없다고 생각한다. 나도 결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그 시절에 내 아이를 보내고 싶은 사람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그 시절이 다시 돌아오고 있다. 아니, 순식간에 와 버렸다.

국회 화장실 문에 오늘은 공교롭게도 이런 시가 붙어 있었다.

내가 학교에서 배운 것
-유하

인생의 일할을
나는 학교에서 배웠지
아마 그랬을 거야
매 맞고 침묵하는 법과
시기와 질투를 키우는 법
그리고 타인과 나를 끊임없이 비교하는 법과
경멸하는 자를
짐짓 존경하는 법
그 중에서 내가 살아가는 데
가장 도움을 준 것은
그런 많은 법들 앞에 내 상상력을
최대한 굴복시키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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