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가 선두에서 추가파병 막아내자!"
요즘 파병반대집회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구호다. 특히 해당 집회에 노동자가 많이 참여할수록 이 구호는 더욱 세진다. 집회장에서는 일상적인 이 구호에 대해 일각에서는 '파병과 같은 정치적 문제에 노동자가 왜 나서냐', '고용안정, 인금인상을 위한 파업이면 됐지, 왠 파병철회냐, 실정법 위반아니냐'며 곱지 않은 시선을 던지기도 한다.
***민주노총, 파병반대 철야 노숙 결의**
이같은 따가운 시선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이 다시 한 번 파병철회를 위한 실천투쟁을 벌였다. 민주노총 소속 조합원 80여명이 14,5일 양일간 노숙철야농성을 결의한 것.
14일 오후 내내 햇빛 한 점 보기 힘든 흐린 날씨와 간헐적으로 내린 비는 이날 오후 6시부터 시작될 노숙농성투쟁이 과연 성사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을 자아냈다. 하지만 노숙장소인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건너편 열린시민공원(주한 미 대사관 옆이기도 하다)에는 오후 6시부터 50여명의 민주노총 소속 조합원들과 이들과 연대하는 '이라크파병반대비상국민행동' 소속 단체 회원들 그리고 대학생들 50여명이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다만 본행사가 시작하지 않았던 터라 저녁식사를 하러 가는 무리들이 간혹 보였다
노숙을 하기에는 땅이 너무 젖어 있었다. 최근 하루도 맑은 햇빛을 받지 않았던 터라 시민공원 보도블럭은 습기를 가득 머금은 채 눅눅함 그 자체였다. 노숙대오는 이 위에 은색 돗자리를 깔고 다시 그 위에 몸을 부릴 태세다.
이내 열린시민공원 절반은 은색 돗자리로 뒤덮였다.
***"부시의 독선과 독단이 세계를 불안하게 하고 있다"**
예정된 집회시간인 오후 6시에서 30분쯤 지나 본 대회가 열렸다. 이미 2백여명의 대오가 자리를 잡았다. 그들이 들고온 깃발을 보니 각 자의 소속을 알 수 있다. 민주노총 소속 민주택시연맹, 금속노조, 금속연맹과 단위노조 소속 조합원들이 대부분이다. 이와 함게 파병반대국니행동 소속 단체 간부들도 보였고, 민주노동당 학생당원들, 파병반대국민행동 대학생실천단 그리고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학생들도 다수 참여했다.
마침내 우려했던 비가 내렸다. 우산을 가져온 사람들은 우산을 펴고, 단체로 비옷을 준비한 사람들은 비옷을 꺼내입었다. 학생들은 얼마전에 끝난 '농촌연대봉사활동'에 사용했는 듯 'OOO농활대'라고 적힌 비옷을 입었다. 은색 돗자리는 비에 젖었다.
이날 대회의 첫 연사는 이선희 민주노총 부위원장이었다. 이 부위원장은 조지W.부시 미 대통령의 '우리는 이라크 전쟁을 벌임으로써 세계는 보다 안전해졌다'는 발언을 주로 비판했다. 이 부위원장은 "부시의 독선과 독단이야말로 세계를 더욱 불안하게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공연이 이어졌다. 풍물패 '삶터'의 비나리 한마당이다. 예의 풍물패가 그러하듯 상쇠잡이가 익살로 박수를 유도한다. 보통빠르기 굿거리장단에서 질풍같은 휘모리로 넘어갈 땐 풍물꾼만큼 공연을 지켜보는 집회 참가자들도 쇠, 징, 북, 장구 소리에 몰입되어 갔다. 상쇠는 월령체 노래를 통해 조지W.부시 미 대통령을 조롱하고, 파병을 강행하는 한국 정부를 비판했다.
***"이라크 전쟁과 파병은 자본가의 이윤을 보장하기 위해서다"**
공연에 이어 민주노총 산하 곽태원 사무금융위원장이 발언했다. 곽 위원장은 이라크 전쟁의 계급적 성격을 강조했다. 곽 위원장은 "미국은 석유 자본들의 이윤을 확대하기 위해 이라크 전쟁을 일으켰고, 한국은 국익을 참칭하면서 국내 자본을 보호하고 이익을 보전하기 위해 파병한다"고 주장했다.
오종렬 파병반대국민행동 공동대표는 "우리 국민의 가슴은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자국의 이익을 위해 다른 나라를 파탄내는 파병은 슈퍼 테러"라고 주장했다.
***이정미 민노당 최고위원, "한 단계 높은 강력한 실천투쟁이 필요"**
이정미 민주노동당 최고위원도 연단에 올랐다. 요즘 민주노동당은 원내외에서 파병철회를 관철하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이 위원은 "거대한 정보력을 자랑하는 미국도 9.11테러를 당했다. 스페인도 지하철 테러를 당했다"며 "(추가 파병을 결정한) 우리도 테러의 사정권안에 들어있다. 국가적 신뢰를 지키려다 국제적 망신을 당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위원은 이어 보다 강도 높은 제안을 했다. 이 위원은 "파병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보다 강력한 실천투쟁이 필요하다. 노동자들의 결단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연설 뒤 기자와 만난 이 위원은 개인의견임을 전제로 "자이툰 부대가 파병되는 8월, 민주노총이 광범위한 파업투쟁을 벌여야 한다. 정치파업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위원의 '개인차원'의 의견이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에 어떤 식으로 반영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필리핀 노동자, "친미 아로요 대통령은 강력한 철군여론에 굴복했다"**
한편 카사마코 필리핀 이주노동자 공동체에서 활동하고 있는 '파리마'씨도 이날 발언에 참여했다.
발언 직후 기자와 만난 파리마씨는 친미성향 필리핀 아로요 정권이 즉각적인 철군결정을 내린 것에 대해 "필리핀 민중의 광범위한 철군 여론이 친미 아로요 대통령을 굴복시켰다"고 진단했다. 그는 "한국도 추가파병을 막는 방법은 오로지 대중적인 파병반대여론을 형성하는 것이고, 정권도 필리핀 처럼 강력한 국민 여론 앞에서는 더 이상 한미동맹을 거론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노무현 정권이 과연 광범위한 파병반대여론이 형성되었을 때 추가파병을 철회할 지는 미지수지만, 필리핀 활동가 파리마씨는 "당신이 파병을 반대한다면, 파병반대여론이 좀더 거세지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가극단 '미래' 상황극, '자이툰 부대 결국 전쟁에 휘말릴 수밖에 없다'**
발언에 이어 가극단 '미래'의 공연이 시연됐다. '누구를 위해 왔는가, 자이툰 부대'란 제목의 이날 상황극은 자이툰 부대가 이라크 현지에 도착한 이후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을 가상으로 꾸며진 내용이었다. 평화-재건이라는 당초 임무와 달리 파병이 장기화되면서 자이툰 부대는 결국 총을 쏘게 되고, 이라크 저항세력의 표적이 되다가 결국 이라크 민간인과 함게 처참하게 목숨을 잃는다는 다소 극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전문 연극배우의 사실감 넘치는 연기와 적절한 배경음악과 노래는 집회 참가자들을 한 순간에 휘어잡았다. 공연을 지켜보던 한 노동자는 "공연을 보다보니 보다 자이툰 부대의 앞날이 선명해진다"며 "우리 젊은이들의 희생이 명확히 보이는 일을 정부만 모르는 것 같다"고 말했다. 가극단 '미래'의 강문주 대표는 "이라크에 총을 들고가는 자이툰 부대가 할 일은 없다"고 단언했다.
지난 9일부터 부산8부두에는 자이툰 부대가 사용할 군수물자가 선적되고 있다. 이 곳에서 군수물자 선적 규탄 운동에 참여하는 부산지역 시민활동가도 이 자리에 함께 했다. 박영미 부산여성회 대표는 "미국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우리에게 이렇게 고통을 주는가"라며 말문을 열었다. 박 대표는 부산을 배경으로 한 영화 <친구>를 언급하면서 "미국과 한국이 친구라면 친구가 나쁜일을 하면 말려야 하는데, 오히려 미국과 한국의 관계는 친구가 나쁜일을 하도록 요구하고, 요구받은 친구는 제 목소리 한 번 못내는 관계"라며 "한국은 미국의 친구가 아니라 '시다바리'다"고 말했다.
연설과 공연이 반복됐다. 시간이 흘러 어둠이 짙게 깔리자 농성대오도 조금씩 흐트러졌다. 이때마다 한총련, 파병반대국민행동 대학생 실천단 등이 나와 율동과 노래를 선보여 농성장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노숙 농성은 한밤 폭우에도 불구하고 새벽 4시까지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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