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이랜드 파업을 돌아보는 지금 이영주 한국예술종합대학교 예술연구소 책임연구원은 <프레시안>에 보내 온 기고에서 "우파 정치와 국가 권력은 이랜드 파업을 지금까지의 300일이 아닌 3년, 30년 더 연장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돈도, 사회적 영향력도, 네크워크도 가지지 못한 하극 집단 앞에 놓인 '잔인한' 삶"을 바로 이랜드 파업이 예고하고 있다는 것.
이영주 연구원은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살아가야 하느냐고"고 묻는다. 바로 이랜드 파업 300일이 우리에게 던지는 물음이다. <편집자>
총선에서 패배한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 인물 중 하나인 김근태 의원과 진보 정치의 혁신을 내건 노회찬, 심상정 의원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이야기들이 인터넷 공간을 조금은 숙연하게 만들고 있나 봅니다. 참으로 이상한 인물들도 당선되는 마당에 이들의 낙선은 아무리 냉정하게 생각하려 해도 참으로 안타깝고 힘 빠지는 일입니다.
반면에 범우파 진영은 무척이나 신이 났습니다. 이들은 200석이 넘는 국회 의자에 앉아 '오른 편으로 기울어 앉기' 시합을 하면서 한참동안 한국을 소란스럽게 할 것 같습니다. 어디 200석 뿐이겠습니까? 범우파에 속하는 민주당의 대다수 의석까지 합하면 이 땅의 정치는 우와 좌, 보수와 진보가 9:1 또는 8:2의 참으로 비정상적인 비율 속에서 움직이겠죠. 지난 지방선거, 2007년 대선과 이번 총선으로 이어지는 보다 견고해진 우파 정치와 국가권력이 어디로 향해 갈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우파 정치와 국가 권력은 이랜드 파업을 지금까지의 300일이 아닌 3년, 30년 더 연장시킬 것입니다. 여기서 '이랜드 파업'은 지금 파업 중에 있는 이랜드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닙니다. 너무나 자주 들어서 오히려 무감각해져 버린 단어 중 하나인 '양극화' 또한 보다 잔인하게 심화되겠죠. 경제적인 양극화가 결국 하극 집단의 정치적, 문화적 권능의 축소와 박탈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우리는 '잔인'하다는 말을 쓸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제도 정치를 통해 하극 집단의 정치적 대표 메커니즘을 형성하고 실현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임을 깨닫고 있습니다. 청와대, 국회, 국가기관과 지자체, 사법 체계가 하극 집단을 대표할 수 없음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세계에 진입하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한 현실이니까요.
얼마나 많은 돈과 영향력, 사회적인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어야 이 세계에 진입할 수 있는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3조 원 자산가 정도 되면 선거 며칠을 앞두고 지역구를 옮기고 개발 공약 터트려 가면서 국회의원에 당선될 수 있겠죠. 아니면 몇 백, 몇 천 억 정도 가지면 비례대표 자리 하나 거래할 수 있겠죠. 주가 조작, 사기 공갈 전과도 상관없습니다. 돈이나 조직이 있으면 되고 크고 강한 후원자의 지원에 힘입어 국회 들어가는 것이 더 쉽습니다.
또 이들에겐 강력한 협조자가 있으니 한편으로는 범우파 교수, 지식인, 연구소들과 다른 한편으로는 신문과 방송, 인터넷 미디어가 있습니다. 이들은 서로가 필요로 하는 정보와 지식을 주고받으며 우파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일상적으로, 그리고 세밀하게 생산, 확대합니다. 물론 우리는 또 하나 빠트릴 수 없는 우파 종교 집단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의 우파 국가를 너무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우파 국가의 촘촘한 네트워크와 체계를 쉽게 거부하거나 이에 맞설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이 힘은 더욱 축소되고 있습니다. 백골단과 경찰력, 감찰과 감시 등 폭력적인 국가기구를 강화하며 정치를 치안으로 축소하고, 자신들이 제시해 놓은 길을 지지할지 아니면 그냥 맞거나 죽을지를 선택하라는 그들의 폭력 앞에서 하극 집단의 무력감은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생산자이자 세금 납부자이며 법의 준수자이지만 침묵하라는 명령 앞에서 한 숨만 나올 뿐입니다.
비생산자이자 세금의 탈루자이며 법을 뭉개는 것에 익숙한 이들은 청와대에서, 국회에서, 학교와 대학에서, 기업과 거리에서 그리고 미디어에서 참으로 소란스럽게 떠들어댑니다. 이들은 조금이나마 더 큰 발화의 쾌락을 누리고 싶어 끊임없이 신문, 방송, 잡지, 보고서, 강연과 강의 그리고 책을 만들어서 전시하거나 판매합니다.
표현과 언론, 출판과 집회결사의 자유는 모든 이들 특히 하극 집단에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표현과 언론, 출판과 집회결사의 자유는 이러한 자유를 행사할 수 있는 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이나 협력업체(학계, 연구소, 미디어)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말입니다.
상극 집단은 언제든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물적 토대와 권력을 활용해 엄청난 '알바'를 고용하고 인터넷 여론을 주도할 수 있으며, 여론조사나 사회조사 기관을 직접 운영하거나 지원함으로써 여론의 방향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다양한 수치와 통계, 사회 해석을 늘어놓을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 하극 집단은 언제든지 자신들의 시각적 쾌락과 편안함을 위해 '정리'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노동자와 농민, 비정규직과 이주 노동자, 노숙자들은 언제든지 강제 이주나 정리 대상이 되고 맙니다.
"이제는 각자 알아서 살자. 이것저것 요구하지 말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살고, 살 수 없는 사람은 소리 없이 그냥 죽어라." 이것이 우파 정치와 국가가 사람들에게 제시하는 최상의 정책이 아닐까요?
그래서 우리는 고민스럽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생존을 위한 기초적인 수단들을 마련한 사람들이야 그리 큰 고민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또 지난 20여 년간 한국 사회를 수놓았던 중산층 신화의 여파를 고려한다면, 정말 '산다는 것' 자체가 이토록 고민스러울 수밖에 없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중산층이 급속하게 해체되고 있으며, 중산층과 하층의 총체적인 하류화(경제적인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정치, 언론, 문화, 교육, 의료, 심리 등 모든 측면에서 하층화되는 것)가 가속화되고 있다는 현실입니다.
이 현실 속에서 우리는 어떤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요? 맞벌이 하는 부모가 출근하고, 학원 갈 돈도 없어 우산도 없이, 마중 나온 사람도 없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고개 숙인 채 거리를 걷고 있는 어린 아이의 삶 앞에서 우리는 어떤 미래를 그려볼 수 있을까요? 하루 종일 일하고 80만 원에도 못 미치는 월급을 받으면서도 갑작스런 해고에 대한 불안 때문에 눈치 볼 필요 없는 사람 앞에서도 눈치 보며 살아가는 우리 옆에 있는 그 아주머니와 아저씨의 하루 앞에서 우리는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할까요? 마음이 무겁고 답답하며 화가 나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든 것이 막막하게만 느껴집니다.
그래도 희망을 가질 수밖에 없겠지요. 자기는 해고당한 노동자지만 민주노동당에 특별 당비로 1억 원을 기탁한 노동자가 존재하는 한, 300일이 넘어 서고 있지만 더욱 더 견고하고 친밀한 연대의 가족을 만들어가고 있는 이랜드 노동자들이 있는 한, 내가 노동하고 살아가고 있는 현장으로부터 지금과는 다른 삶의 모양들을 발견해 가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한 우리는 묘한 희망을 느끼고 있습니다. 아주 소수이기는 하지만 바로 이러한 사람들의 삶과 미래를 전달하고 지지하고자 하는 언론인과 미디어쟁이, 예술가가 있어 좋습니다.
아무리 대학이 권력과 자본의 협력업체가 되었다 하더라도, 우리 사회의 생산자와 소수자의 당파성을 포기하지 않는 지식인들이 있어 위안이 됩니다. 이들에게는 공통된 그 무엇이 있는 것 같습니다. 바로 우리가 '공통된 그 무엇'이 무엇이고, 어떤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을지 상상하고 토론하면서 이를 우리 삶의 기초로 만들어 놓는 실천들을 하나씩 하나씩 해나간다면, 우파 정치와 국가가 참으로 허술한 과거의 역사였음을 증명해 보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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