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낮은 투표율을 보인 곳은 34%에 그친 경기도 시흥을이다. 여기서 당선된 조정식 후보는 유효투표수 가운데 51%를 얻었다. 수학적으로 따져보면 조 후보는 전체 지역주민 17% 가량의 지지만을 얻어 당선됐다는 계산이 나온다. 뒤집으면 지역 유권자 중 무려 83%가 조 후보를 선택하지 않은 셈이다. 이 정도면 '대표성'에 심각한 하자를 드러냈다고 보는 게 맞다. 게다가 시흥을처럼 투표율이 30%대인 선거구는 전국적으로 무려 20 곳에 달한다.
<후마니타스> 박상훈 대표가 "만약 투표율이 매우 낮고 보수 세력이 200석이 된다면 이 선거를 민주적 결과로 인정할 수 있겠는가 하는 고민에 봉착할 것 같다"고 했던 난감함은 그대로 현실이 돼버렸다. 대표성에 결함을 가진 의원들로 구성된 국회 전반이 사회적 이념 분포와도 큰 괴리를 갖게 됐으니 이 현상을 목도한 정치학자로서 대단히 곤혹스러울 것이다.
왜 절반이 넘는 유권자들은 투표장 가기를 극구 거부했을까? 날씨 탓이었을까? 누적된 이유가 어딘가에는 분명히 존재할 터이다. 다만 이번 총선에 국한해 보면 정당정치를 망가뜨린 정치권의 패악질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유권자들로 하여금 등을 돌리게 한 혐의는 일차적으로 정치권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겠다.
4.9 총선 돌아보니…
선거 과정을 복기해보면 '최악의 선거'라는 표현이 좀 더 명징해진다. 각 당의 공천이 늦어진 탓에 정책은 선거 며칠 전에야 쏟아져 나왔다. 정책을 보고 지지정당과 사람을 뽑을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공천도 형편없었다. 한나라당과 통합민주당은 상향식 공천의 부작용을 개선하려는 노력 대신 제도 자체를 부정하는 손쉬운 방법을 택했다. 당내 민주주의가 종적을 감추면서 공천 갈등이 예년에 비해 크게 증폭될 수밖에 없었다. 불복의 여지가 큰 공천이었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공천 심사 초기 거물 11명을 잘라내며 하향식이나마 공천 개혁에 성공하는 듯 했으나 끝내는 계파별 자기사람 심기로 마감됐다. 한나라당은 집안싸움이 아예 폭발해 버렸다. 형식적으로 공천심사위원회를 꾸렸으나 실상은 대선 공신들에 대한 논공행상이었다. 대통령의 친형은 공천된 반면 다른 계파의 중진들은 줄줄이 나가떨어졌다.
이재오, 이방호 의원 등을 통해 이 대통령의 의중이 반영됐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명박 사당(私黨)화'의 주범으로 박근혜계는 이들을 지목해 때렸다.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며 쏘아붙인 박 전 대표의 한마디 속엔 '정권 동반자' 약속, 지분배려에 대한 암묵적 규율을 지키지 않은 이 대통령에 대한 분노가 응축돼 있었다.
박 전 대표의 분노가 아니어도 이명박 대통령의 측근들이 벌인 자아도취형 권력놀음은 선거를 집권세력 내부의 권력쟁투에 가두는 효과를 냈다. 한나라당의 '엉터리 공천'이 쟁점 아닌 쟁점으로 선거판을 점령하면서 이후 선거 과정에선 오로지 '이명박에 대한 박근혜의 투쟁'만 나부끼게 됐다는 것이다.
선거 결과를 놓고 보면 대구에서 꼼짝도 않고 선거판을 움직인 '선거의 여인' 박근혜 전 대표는 단연 주인공이다. 하지만 '응징'에는 대성공을 거뒀을지 몰라도 그가 '선한 역'을 수행했다고 평가하긴 어렵다. 피해의식으로 똘똘 뭉친 모습만 보인 그는 이번 선거를 거치며 한 계파의 수장으로밖에는 달리 보기 힘들었다.
박 전 대표도 그렇거니와 '박파사(박근혜 이름을 파는 사람들)'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친박 진영의 코미디도 대단했다. '친박연대'라는 진귀한 이름을 가진 당이 생겼고, 대구에서 모 후보 운동원들은 "기호 7번 박근혜입니다"라고 인사하고 다니는 해프닝이 목격되기도 했다.
어쨌든 이들은 정당정치를 희화화한 주범이면서도 당선자 규모만 보면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 정치를, 선거를 '정치 동물'들의 경쟁으로만 본다면 최대의 승자인 박 전 대표와 박근혜계에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는 당연하겠다. 하지만 행위자 중심의 근육질 경쟁이 정당정치의 피폐화와 최악의 투표율을 잉태한 씨앗이라고 보면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가 '가지고 논' 4.9 총선은 정도가 심해도 한참 심했다. 이제부터 두 사람의 '진검승부'라니 더 할 말이 없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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