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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동인간, 바로 여기 있다"

하리하라의 '육아 일기' <12>

2006년 8월 5일

안녕, 별아. 엄마는 지난주에 과배란 주사 부작용으로 인한 난소 과자극 증후군으로 별이를 만나는 시도를 중지하고 말았어. 의사에게서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엄마는 참 많이 울었단다. 길고 힘든 시간을 지나, 정말 별이를 만날 날이 다가왔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멈춰야 한다니. 생각 같아서는 엄마가 좀 힘들더라도 계속 시도하고 싶었지만, 의사 선생님의 태도는 완강했어. 너무 위험해서 절대로 시술할 수 없다는 거였어.

그런데 며칠 지나 생각해보니, 별이를 만날 수 없어서 엄마도 아쉬웠지만, 엄마를 만날 날만 기다리며 인큐베이터 안에서 무럭무럭 자라준 별이도 참 많이 실망스러웠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구나. 엄마의 건강이 좋지 않았던 탓에 별이는 따뜻한 엄마 품에 안기는 대신 차디찬 액체 질소 속으로 들어가야 할 테니 말이야.

오늘 엄마는 병원에서 전화를 받았어. 인큐베이터에서 엄마를 만날 날을 기다리며 무럭무럭 자라고 있던 별이와 형제들을 모두 냉동시켜 보존해두었다고 말이야. 총 18개의 배아가 엄마와 만날 날을 기다리며 차가운 잠에 빠져들었다고 해. 그래도 그 말을 들으니 엄마는 갑자기 18명의 아가들을 만난 듯 마음이 든든해졌어.

오늘은 엄마가 갑자기 차가운 곳에 들어가 놀란 별이에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설명해주려고 해. 그리고 조금만 더 참으면 곧 엄마를 만날 수 있을 거란 약속도 할 겸 말이야.
▲냉동인간은 영화 속에만 등장하는 게 아니다. 알코어생명재단에서는 실제로 지원자들을 냉동시켜 탱크에 보관하고 해동시킬 때를 기다린다고 한다. ⓒalcor.org

SF 영화나 소설에서는 종종 '냉동인간'이 등장하지. 냉동인간이란 인간의 신체를 극저온 상태로 냉동시켜 생명활동을 정지시킨 상태를 말해. 영화에서는 주로 난치병에 걸려 현재의 의술로는 치료 방법이 없을 때나 길고 긴 우주여행을 하는 도중 신체적 노화 현상을 정지시키기 위해 냉동인간을 만들어. 냉동인간은 차디찬 탱크 안에서 오랜 시간을 늙지도 죽지도 않은 채 존재하다가 시간이 흐른 후 다시 해동되어 생명 활동을 시작하게 되지. 인간의 상상력 속에서 냉동인간이 만들어진 것은 오래전 일이었지만, 아직까지 냉동인간은 현실화되지 못했어. 아니, 실제 다시 살아날 것을 믿고 스스로 냉동 탱크에 들어간 사람은 몇 있지만 아직 해동되어 되살아난 사람은 없기 때문에 완벽한 의미의 냉동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단다.

현재의 기술로는 사람처럼 크고 복잡한 개체를 냉동시켰다가 다시 살려내는 건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있어. 하지만 세포의 수준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해. 엄마도 실험실에서 일할 때 실험하다 남은 세포를 얼려서 보관했다가 필요할 때 다시 녹여서 쓰는 일을 수없이 많이 했었거든. 따라서 사람 자체를 냉동시키는 건 힘들지만, 장차 사람이 될 가능성이 있는 것들, 즉 난자와 정자 같은 생식세포나 수정란, 초기 배아도 냉동 보관이 가능해.

생식에 관련된 냉동보관 기술이 가장 먼저 적용된 것은 정자야. 정자가 냉동 가능할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18세기에 스팔란차니라는 사람이 차가운 눈 속에서도 사람의 정자가 살아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면서 시작되었어. 하지만 실제 냉동 정자가 생식 의학에 적용된 것은 20세기 들어서면서부터야. 살아 있는 세포를 생명력을 그대로 유지시키면서 냉동시키기 위해서는 세포에 특수한 처리를 해야 했기 때문이지.

모든 세포를 그대로 냉동시키면 세포들은 죽어 버려. 세포들이 죽는 가장 큰 이유는 '물' 때문이야. 우리 몸의 70%가 물로 이루어져 있듯이 살아있는 세포를 구성하는 성분 중 가장 많은 것이 물이야. 세포는 이처럼 매우 많은 물을 가지고 있는데, 물은 온도가 내려가면 얼어서 결정이 생겨. 이 얼음결정은 매우 날카로워서 세포막과 세포소기관들을 파괴하기 때문에, 세포는 죽게 돼.

이 현상은 우리가 실생활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는데, 고기를 냉동실에 얼렸다가 그릇에 꺼내어 녹이면, 어디서 나왔는지 고기 주변에는 물이 흥건하게 괴는데 정작 고기는 수분을 잃어서 퍽퍽해지지. 그게 바로 고기가 어는 과정에서 고기 세포 안의 물이 날카로운 얼음결정이 되어 세포막을 손상시켰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야. 그래서 얼렸다 녹인 고기는 아무래도 수분을 잃고 마르기 때문에 생고기에 비해 맛이 떨어진다고 하는 거지.

그래서 세포의 냉동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이 '어떻게 하면 얼음 결정이 생기지 않게 하느냐'였어. 이 문제를 해결해 준 것이 '동결 억제제(CPA, cryoprotective agent)'의 개발이야. 동결억제제로는 글리세롤, DMSO(demethyl sulfoxide), EG(ethylene glycerol) 등의 물질이 많이 쓰이는데, 그러고 보니 엄마도 실험실에서 세포를 얼릴 때 DMSO를 사용했던 기억이 나는구나.
▲세포를 오래 보존하기 위해서 동결억제제로 처리된 세포를 -197℃의 액체 질소에 담가 보관한다. ⓒ프레시안

세포에 동결 억제제를 처리하면 삼투압의 차이로 인해 세포질 내의 물이 세포 밖으로 유출돼. 반대로 동결 억제제는 세포 안으로 침투해서 물이 빠져나간 자리를 메운단다. 동결 억제제들은 매우 낮은 온도에서도 얼지 않고 젤 상태를 유지하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세포가 얼음 결정으로 인한 상해를 받지 않도록 보호하지. 이렇게 동결 억제제로 처리된 세포는 극저온에도 깨지거나 변형되지 않는 특수 플라스틱으로 만든 크라이오튜브(cryotube)에 담겨 -197℃의 온도를 자랑하는 액체 질소 속에 보관된단다.

모든 세포는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보관돼. 최근에는 생식세포나 배아 뿐 아니라, 아기의 제대혈을 보관해주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들도 많아졌는데 대상이 제대혈에서 추출한 조혈모세포라는 차이점이 있을 뿐, 냉동시키는 방법은 거의 비슷해. 제대혈 보관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자.

이처럼 동결 억제제는 저온으로 인한 세포내외 환경 변화로부터 세포를 지켜주지만, 동결 억제제 자체가 세포에게는 해로운 물질이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사용되어야 하고, 세포의 해동 시에는 제거되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세포를 파괴하는 역할을 하니까 말이야.

현재 생식의학 분야에서 동결 억제제를 이용한 세포 냉동법은 정자와 난자, 그리고 배아에까지 적용되고 있어. 그 중에서 가장 먼저 적용된 것은 정자인데, 정자는 다른 세포에 비해 냉동으로 인한 상해를 적게 입기 때문이야.

정자가 냉동에 강한 것은 난자에게 유전 물질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정자의 몸속에는 꼭 필요한 물질만 들어 있기 때문이지. 즉, 정자의 머리 부분은 거의 핵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세포질과 수분이 적어서 냉동으로 인한 피해를 덜 받는 거지. 가지고 있는 것이 적을수록 냉해를 덜 입을 수 있거든. 이로 인해 이미 1950년대에 냉동 정자를 이용한 인공 수정이 성공한 기록이 있고, 정자를 기증받아 냉동한 뒤, 아이를 원하는 사람에게 제공하는 정자은행도 성업 중이지. 이는 모두 정자가 저온에 강한 특성과 수 년 이상 냉동 보관을 해도 생명력과 생식력을 유지시킬 수 있는 특성 때문이란다.
기적의 아기(miracle baby)
▲22년간 냉동한 정자에서 태어한 아기. ⓒCTV

정자의 냉동 보존 기간은 생각보다 길다. 지난 2008년 2월 21일, 캐나다의 CTV는 한 아기에 대한 이야기를 보도했다(☞바로 가기).

'기적의 아기(miracle baby)'라는 별명을 가진 이 아기는 아빠가 무려 22년 전에 냉동시켜 두었던 정자에서 태어난 아기였다. 당시 18살이었던 아기의 아빠는 암 치료를 받기 전, 의사의 권유로 정자를 냉동시켜 보관했었다.

이 정자는 정확히 22년 2개월 2주 동안이나 냉동되어 있었으나, 인공수정을 통해 건강한 아이를 탄생시키는데 아무런 부족함이 없었던 것이다.


정자가 이처럼 냉동 보관이 용이한 것과는 달리 난자의 냉동 보관은 쉽지 않아. 정자가 세포내 소기관이 적어서 냉해를 적게 입는 것과 반대로, 난자는 육안으로도 보일 정도(0.12~0.15㎜)로 큰 데다 장차 아기로 자라나기 위해 필요한 다양한 세포내 소기관과 많은 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냉동시 생존율이 매우 낮았어. 그래서 1986년 난자 냉동이 처음으로 성공한 이후에도 냉동 난자를 이용해 태어난 아기의 수는 수십 명 수준에 불과하지.

난자에 비해 오히려 난자와 정자가 수정되어 만들어진 수정란이나 배아는 냉동에 좀더 잘 견디는 특성을 지니고 있어서, 현재는 난자 그 자체를 냉동하기보다는 배아를 만들어 냉동하는 방법이 더 많이 쓰이고 있어. 냉동된 배아의 해동시 생존율은 약 60-80%에 달하고, 이식시 성공률 역시 얼리지 않은 배아와 큰 차이가 없다고 알려져 있거든.

별이도 다른 형제들과 함께 동결억제제에 둘러싸인 채 액체 질소 속에서 잠들어 있을 테지. 엄마와 만날 그 날까지 부디 무사히 버텨주렴.

참고 문헌

하태원, '정자은행을 찾는 사람들', <신동아>, 2000년 4월.

이동률, '정자, 난자, 배아 얼려 임신 조절한다', <과학동아>,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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