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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겁함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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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겁함에 대하여

[최광희의 휘뚜루마뚜루 리뷰]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대한 소고

코언 형제의 걸작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냉혹한 청부살인업자 시거(하비에르 바르뎀)가 주유소 주인 노인과 황망한 대화를 나누는 대목이다. 영화와 살짝 다르긴 하지만 코맥 매카시의 원작 소설을 통해 그 장면의 대화 내용을 옮기면 이렇다. 노인 : 다른 볼일이라도 있습니까? 시거 : 모르겠소, 있겠소? 노인 : 뭐 잘못됐습니까? 시거 : 무슨 잘못? 노인 : 무엇이든. 시거 : 그게 지금 나한테 묻는 거요? 무엇이든 잘못된 건 없냐고? (중략) 노인 : 다른 볼 일이라도 있습니까? 시거 : 아까 했던 질문이오. 질문과 대답이 묘하게 엇나가는 두 사람의 대화에서 우리는 시거가 순박한 노인을 데리고 농담을 하고 있는건지 은근한 살의를 드러내고 있는건지 분간하기 어렵다. 그러나 노인이 언뜻 시거의 시선을 슬쩍 피하기 시작할 무렵, 우리는 노인이 느끼기 시작한 불안에 별 수 없이 동참하게 되는데, 시거가 난데 없이 동전 던지기 내기를 제안하면서 불안은 극도의 긴장감으로 고조된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시거 : 맞히시오. 노인 : 맞히라고요? 시거 : 그렇소. 노인 : 왜요? 시거 : 그냥. 노인 : 뭣 때문에 맞혀야 하는지 알아야겠소. 시거 : 그렇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소? (중략) 노인 : 내가 이기면 무엇을 얻는겁니까? 시거 : 전부를 얻소. 전부. 노인 : 말이 안되는 말을 하는구료, 젊은 양반. 시거 : 맞히시오. 노인 : 앞면. 앞서 우리는 시거가 사람을 얼마나 아무렇지 않게 직업적 평정심을 가지고 죽였는지를 목격했기에, 노인의 운명이 어쩌면, 아니 확실히 저 동전 던지기의 결과에 달렸을 거라는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다행히 노인은 내기에서 이김으로써 죽음을 면한다. 죽음을 직접적으로 예고하진 않았지만, 노인은 직감적으로 자신이 살인의 대상이 될 뻔 했으며 거기에서 극적으로 살아 났다는 안도감을 갖게 됐을까? 시거는 저승사자라도 된 듯, 짐짓 철학적인 화두 하나를 던지고 사라진다. "무엇이든 도구가 될 수 있소. 아주 작은 거라도. 심지어는 당신이 알아차릴 수 없는 것도 있소. 그것들은 손에서 손으로 떠돌아다니지만 사람들은 별 주의를 기울이지 않지. 그리고 어느날 결산이 이루어지는거요." 노인의 입장에선 이날 시거의 등장은 압도적인, 그러나 의미를 알 수 없는 선문답이 덧붙여진 확인되지 않은 힘이었고, 그러므로 낮에 꾸는 악몽과도 같았을 것이다. 시거가 사라진 뒤 노인은, 뭐랄까, 주체할 수 없는 무력감과 감히 대항할 수 없는 세계의 불안을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 시거의 말처럼 언제 어디서 무엇이 내 인생을 결산해버릴지도 모른다. 그것이 세상이다. 그리고 그 난데 없는 결산 앞에서 끽 소리 내지 못하고 식은 땀만 흘리다 이마에 총 구멍이 나 세상을 뜨게 될 지도. 생각해보라. 더티 해리가 아닌 이상, 저 상황에서 누가 감히 시거의 동전 던지기에 응하지 않겠다고 대항할 것인가. 확인되지 않은, 그러나 확인되는 순간 삶이 결산될 수 있는 위협의 실체를 탓할 것인가. 자신의 소심증을 탓할 것인가. 노인이 비교적 오랜 삶을 통해 체득했을 관조와 통찰은 순식간에 갈피를 잃는다. 외부로부터 불쑥 내침하는 불가해하고도 잠재적인 위협은 소심증을 부른다. 두려움의 생성 메커니즘을 장악한 위협의 힘은 실체가 모호하기 때문에 더욱 위력적이 된다. 세상이 대체로 그렇다. 우리가 비겁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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