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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 신전은 '죽음의 도시'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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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 신전은 '죽음의 도시'를 낳았다"

[손문상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ㆍ<12>] 추키까마따 구리 광산

추키까마따 구리 광산은 사막 한 가운데 놓인 거대한 신전이다. 태평양 전쟁(1873년 아따까마(Atacama)지역 영유권을 두고 칠레와 볼리비아, 뻬루 연합군이 벌인 전쟁. 칠레가 승리함으로써 구리, 초석 등 자원의 보고인 사막지대를 차지했고, 볼리비아는 내륙국가로 남게 되었다)은 과연 누가 신을 모실 자격이 있는가에 관한 시험이었고, 결국 토착민들은 아무런 선택도 하지 못한 채 정복자와 새로운 정복자들에 밀려났다.

세계 최고 품질의 구리 광산

2870미터 상공에 위치한 이 거대한 신전은 도시를 만들었다. 안또파가스따 주의 모든 도시, 그리고 사람들은 이 신전을 중심으로 질서 정연하게 배열되어 있다. 이 신전에서는 1.75%의 구리 함유량을 가진, 세계에서 가장 좋은 품질의 구리 원석이 재배되어 제단에 바쳐진다.

칠레는 세계 구리 매장량의 38%가 묻혀 있는 땅 위에 서 있다. 구리를 다 파 내어 땅이 가라 앉거나, 구리라는 물질이 보석으로 취급받을 수 있기 전까지는 칠레의 건강한 경제를 이끌 것이다. 2006년엔 칠레 전체 수출의 57%, 약 333억 달러를 차지했을 정도니까.
▲ 황량하기 그지없는 추키까마따 구리 광산의 입구엔 구리 철사로 만든 철지난 크리스마스 조형물이 뼈대만 남아 있다. ⓒ손문상

사막에서의 주말을 보낸 우리는 서둘러 깔라마(Calama)시로 향했다. 깔라마에서 약 20분 거리에 있는 추키까마따(Chuquicamata) 구리광산을 들르기 위해서였다. 아따까마 사막에서의 짧지만 강렬한 경험 덕에 우리는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다음날 시청 인포매이션 센터를 찾았다.
▲ 광산 지중화 작업이 한창이고 휴가를 떠난 노동자들이 자리를 비운 광산이지만, 구리는 끊임없이 생산된다. 추키까마따 노천 구리 광구.
ⓒ손문상

하지만 현재 추키까마따 구리광산은 노천 광산을 지하광산으로 전환하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며, 따라서 기술, 운영 시스템 혁신과 관련한 공사를 대대적으로 실시하고 있어 견학이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았다.

설상가상으로 대부분의 직원이 휴가를 갔거나, 새로운 프로젝트에 매달리고 있어 향후 일 주일간은 견학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하지만 일 주일 후 우리는 띠띠까까(Titicaca) 호수 위를 넘실대고 있어야만 했다.

일단 산띠아고에 있는 한국 대사관에 연락을 했다. 알아본 뒤 우리 숙소로 연락을 주겠다는 약속을 받고서 우린 방금 전 통화했던 빠뜨리치오 우에르따(Patricio Huerta)씨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일단 찾아가겠노라고 말했다. "찾아오는 것은 언제나 환영이지만, 우린 당신에게 보여줄 것이 별로 없다"는 답변을 들었지만, 그냥 돌아갈 순 없는 일 아닌가? 깔라마 시에서 추키까마따 광산까지는 일정 노선을 운행하는 택시인 꼴렉띠보(Colectivo)를 타고 가야 했다. 우리와 꼴렉띠보 택시 운전사 로드리게스(Rodriguez)는 이렇게 만났다. 아바로아(Abaroa)거리에서 추키까마따까지 가는 노란색 택시 주위에서 로드리게즈는 호객행위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우리를 발견한 이 아저씨는 특유의 손짓 발짓으로 우리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박물관에서 막 꺼내온 듯한 닛산 자동차에 아주머니 둘, 그리고 우리 둘, 이렇게 네 명의 승객이 세계에서 가장 큰 노천 구리 광산으로 향했다. 아주머니 두 분 역시 구리광산을 관광하기 위해 이 아저씨에게 돈을 지불하고 몇 군데 사진 찍기 좋은 곳을 약속받은 모양이었다. 우리는 뚜르 추키(Tur Chuqui) 사무실에서 우에르따 씨를 만났다.

추키까마따 구리 광산은 현재 추키까마따 언더그라운드(Chuquicamata Underground) 프로젝트를 추진중에 있으며, 노천 광산과 지하 광산의 생산을 병행하는 광산 지중화를 꾀하고 있다. 갱도 운영에서 무인 시스템을 강화하고,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늘림과 동시에 전 세계 구리 광산의 모범이 될 운영 모델 역시 개발 중에 있다고 우에르따 씨는 매우 자랑스레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우리는 광산을 보게 해 달라고 간곡히 청했으나, 우에르따 씨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방금 설명한 그 이유 때문에, 어떤 예외도 없이 모든 이들에게 광산 접근을 불허할 수 밖에 없다고 우리를 다시 설득했다.

추키까마따는, 정확히는 꼬델꼬(CODELCO, 칠레 국영 구리 회사)가 가진 칠레 북부의 다섯 개 광산 중 하나로, 추키까마다 노르떼(Chuquicamata Norte)를 칭한다. 2002년에 추키까마따와 라도미로 또믹(Radomiro Tomic) 지구를 합병시키며 추키까마따 노르떼가 탄생한 것이다. 꼬델꼬는 추키까마따 노르떼 이외에도 안또파가스따(Antofagasta) 주 남쪽으로 살바도르(Salvador Division), 벤따나스(Salvador Division), 안디나(Salvador Division), 엘 떼니엔떼(Salvador Division) 광산 지구를 가지고 있다.

우에르따씨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컴퓨터 앞에서 광산에 대한 브리핑을 하기 시작했다. 추키까마따 노르떼의 추키까마따 지구는 미나 수르(Mina Sur, 남족 광산)와 추키까마따, 두 개의 노천 광산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 크기는 지름 20~30킬로미터에 달한다고 했다. 현재까지 12킬로미터를 파 내려갔다는 지중화 작업은 2018년에 완성되는데, 땅 속에 매장되어 있는 구리의 양은 며느리도 모른다며 눈썹을 치켜 올리고는 우쭐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 정떨어지게 생긴 푸른 구리 신전을 묘사한, 빙글빙글 돌아가는 3d 입체 영상은 빠뜨리치오 씨를 매우 만족시켜주는 것 같았다. 340톤에서 400톤 짜리 트럭이 퍼 내는 구리의 양에 관한 설명에서는 '산띠아고의 산따루치아 언덕 보셨죠? 하루에 그 언덕 하나 반을 파버린다고 생각하시면 되요.'라며 친절하게 예를 들어주었다. 우리는 결국 입을 쩍 벌리는 표정을 가장한 하품도 했다고 살짝 고백하련다.

추키까마따보다 더 남쪽에 자리한 가비(Gaby) 구리광산은 꼬델꼬가 중국 마인메탈(Minmetals) 사와 합작으로 추진하는 구리 광산인데(그는 이 광산이 중국 거라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빠뜨리치오 씨는 주로 이 광산과 추키까마따를 비교하는 방식으로 자신이 속한 회사가 얼마나 좋은 회산지 설명하는, '홍보 담당' 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시스템을 비교하는 대목에서는 노골적으로 못마땅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많은 부분에서 가비 광산은 꼬델꼬의 훌륭한 노동 조건과 비교할 수 없다는 말을 하며, 일례로 중국 자본이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무리하게 무인화를 추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나는 '당신들도 무인화 프로젝트에 중점을 두고 있지 않나요?'라고 물었는데, 빠뜨리치오 씨는 '우리가 추진하는 무인화는 최소 형태다. 왜냐하면 사람이 있어야 모든 안전이 담보되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 차이를 모르겠으나, 일단 이 사람의 말에 수긍하기로 했다. 이를 누군가는 '산업 구조의 선진화'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 묘진 근처에 광물 폐기장이 있다

구리 광산 견학은 좌절되었으나, 우리는 대사관에서의 연락을 한 가닥 희망으로 삼고 추키까마따 노동자 묘지를 찾기로 했다. 이 곳이 얼마나 황량한 곳인지는 사진이 설명해 줄 것이지만, 실제 느낌은 그 이상이었다.

백두산 꼭대기보다 높은 곳에 있는 탓에 산소가 부족해 숨이 금방 차기도 했지만, 주변 풍광의 보이지 않는 압박은 산소 이상의 결핍을 느끼게 해 주었다.

노동자 묘지는 묘하게도 구리를 추출한 후 버려지는 광물들이 모이는 거대한 '쓰레기장'이 잘 보이는 곳에 있었다. 물론 찌꺼기들의 일부는 재활용된다고 한다. 묘지의 절반은 이름 없는 십자가로 채워져 있었고, 간혹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무덤 숲을 뚫고 정확하게 자기 친족의 묘지를 찾아내어 안녕을 살피고 가는 모습도 보였다.
▲ 묘지는 사막 색깔이다. 시대를 알 수 없는 노동자의 묘지는, 심지어 바쳐진 꽃 마저도 사막 색깔로 시들어 광산과 동화된다. 추키까마따(Chuquicamata) 구리 광산의 노동자 묘지. ⓒ손문상

▲ 뜨겁다. 태양 아래 세워진 십자가, 그리고 뿌리 없는 꽃. 추키까마따 구리 광산의 노동자 묘지. ⓒ손문상

▲ 목이 마르다. 광산 노동자 묘지의 한 낮은. 추키까마따 구리 광산의 노동자 묘지. ⓒ손문상

에르네스또는 세계 최대 노천 구리광산의 명성에 걸맞지 않은 이 소박한 노동자 묘지에서 씁쓸한 감정을 느꼈다.

소모품처럼 다뤄지다가 결국 버려지는 노동자들의 삶이란, 인간의 그것으로 부르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지금은 의료보험부터 아이들 교육 복지까지 칠레 최고의 직원 복지정책을 자랑하는 꼬델꼬지만, 그 시스템을 쟁취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은 희생되어야 했을까? 구글 검색을 뒤져서 찾아냈던 과거 수많은 구리 광산 파업 기사들의 비정한 문자 틈바구니엔 얼마나 치열한 삶이 숨어 있는 것일까? 먹지도 못할 녹색의 광물 덩어리를 게걸스레 파헤치느라 삶이 소모되는 지도 모르고 당연스레(!) 죽어간 많은 사람들의 흔적을 표시해 놓은 무표정한 십자가 사이로 모래 바람이 일었다.

구리 광산이라는 신전을 위한 제단

넉살 좋고 오지랖 넓은 꼴렉띠보 운전 기사 로드리게스는 우리에게 일인당 1000뻬소(한국 돈, 약 2000원)면 추키까마따 구리광산 구석구석을 보여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리고는 영어 단어 몇 개와 손짓 발짓을 동원한 스페인어로 우리에게 대화를 시도하는 노력을 보였다. 우리가 한국에서 매우 유명한(!) 기자들이라고 장난스레 말하자, 추키까마따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을 소개시켜주겠다고 하고선, 이 곳에서 노동자들을 상대로 15년 이상 아이스크림을 팔아온 노점상 아저씨에게 데려다 주는 유머 감각도 보유했다. 우리는 그렇게 살풍경한 속에서 웃음 몇 점과 아쉬움 몇 점을 안고 깔라마의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대사관에서의 전화였다. 대사관에서는 다음 날 구리 광산 취재 일정을 확정지어 알리겠노라고 우리에게 장담했다. 지난 2 주일간 세 군데의 대사관에서 견학 요청을 받았으나 거절한 바 있다고 말했던 우에르따씨의 말이 생각나서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으나, 한국 대사관은 다음 날 아침에 우리를 위해, 지중화 작업이 이루어지는 광산 내부는 아니지만, 구리 제련 공정과 트럭 정비소 등 몇 군데를 보여줄 수 있다는 약속을 받아냈다고 알려왔다. 그리하여 두 번째 추키까마따 취재가 시작되었다.

거리에서 로드리게스를 발견하기란 무척 쉬운 일이었다. 추키까마따로 가는 관광객들을 부지런히 불러 모으고 있던 그는 우리를 보더니 크게 휘파람을 불어댔다. 전 날 나눈 작별인사가 무색하게 우리는 오랜 친구처럼 과장된 인사를 나누었다. 하지만 즐거운 만남이 있으면, 즐겁지 않은 만남도 있는 법. 우에르따씨는 우리의 안면을 다시 보게 된 것이 그리 반갑지 않은 모양이었다. 의기양양함을 숨기고 '대사관에서 연락 받으셨죠?'라고 조심스럽게 물었으나, 대답은 '노'였다. 아니 왜? 우리는 대사관에서 빠울라 알바라도(Paula Albarado) 씨를 소개 받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우에르따씨는 '알바라도는 내 부하 직원이다. 연락을 받았지만 허락을 할 수가 없다.'고 말해 우리를 깜짝 놀라게 했다. 하지만 잠시 생각하며 대사관에서 보낸 메일을 보던 그는 결국 좋다는 사인을 내렸다. 깍쟁이 같으니라고, 어차피 허락할 거면서.

추키까마따에서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는 우에르따 씨를 뒤로하고 그의 직속 부하 직원이자 홍보 업무를 맡고 있는 알바라도 씨를 만날 수 있었다. 거기에 우리 두 사람을 위해 45인승 고급 버스와 운전 기사가 준비되었다. 우리는 황송한 표정을 지어주는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었다.

자, 어디에서부터 이야기를 할까? "신이시여 정녕 당신이 만든 것이 구리란 말입니까?" 구리의 유용성을 처음 발견한 이는 이렇게 외쳤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땅 속에 숨어 있는 광물이 가치를 갖는가에 관한 철학적인 이야기들을 해 볼까? 물론 너무 유명한 이야기라 지루할 수도 있겠지만.

인간이 만들어낸 가치의 기준이라는 것이 얼마나 편협한 것인지 모른다. 예를 들어 신전에 바칠 구리를 재배하는 과정에서 사막지역의 모든 물이 모여드는 것은 획득될 가치에 대한 당연한 지불이라고 생각된다. 가치는 그렇게 발명된다. 물을 기반으로 할 수 밖에 없는 인간 공동체의 파괴는 '도시화' 내지는 '진보'라는 다른 이름으로 인간을 안심시킨다. 구리가 제공해주는 모든 편의를 동원해 '환경 파괴'의 증거를 인멸하는 알리바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고찰들은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된다. 자연 질서를 인간 중심으로 배열하는 과정은 물리적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예전에 작은 오아시스였음에 불과했을 깔라마 시와 칠레 제2의 도시라 하는 구리 수출의 전진 기지 안또파가스따는 오로지 이 신전을 위해 배치된 제단이다. 그리고 꼬델꼬는 칠레라는 왕을 위한 제사장이며, 경제 발전이라는 무형의 신념을 위해서 존재한다.

경제학자는 경제 활동이라는 이름으로 정의할 것이다. 광산에 고용된 노동자들은 물론이고, 구리를 추출하는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몰리브덴 같은 부산물들을 위해 광산에 들어와 있는 다양한 광물 생산 업체들이나, 깔라마 시내의 식당, 서비스업 등에 종사하는 모든 이들, 더하기 꼴렉띠보 운전사 로드리게스나 아이스크림 아저씨 역시 '구리'를 중심으로 삶을 이어가는 이들인 것이다. 이 모든 게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진다니, 섬뜩하지 않은가?

물론 이는 팔아먹을 자원의 혜택이라고는 눈꼽만치도 받아본 적이 없는 지구 반대편의 작은 나라에서 살고 있는 자 특유의 편집증적 분석일 수도 있다.

'구리 광산 국유화'를 둘러싼 역사

추키까마따는 우여곡절이 많은 곳이다. 원래 독일계 회사인 구겐하임(?)이 처음 광산을 대대적으로 개발한 이후, 1924년 아나콘다 사가 운영권을 매입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칠레는 구리 산업 지분 확보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이는 방대한 자원을 가진 다른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과 다른 점이기도 하다. 1955년에 상당 지분을 흡수했고, 1966년에는 구리 산업의 '칠레화(Chileanization)'을 정책적으로 추진했으며 '구리부(Copper Department)를 설립했다.

이는 칠레 구리 광산 지분의 51% 이상을 정부가 사들이는 것을 목표로 했는데, 아옌데 정권 들어서 국유화가 완성 단계에 이르게 된다.

당시 국회를 장악하고 있던 인민 연합(Unidad Popular)을 포함해 전원 만장일치로 사실상 전면 무상 몰수를 선언한 것이다. 물론 73년 9월 11일 쿠데타로 집권한 피노체트는 외국계 기업에 의해 5억 3천만 달러의 보상금을 지불했다. 외국계, 특히 미국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 와중에도 피노체트는 국유화의 물결을 거스르지 못했다. 이처럼 독특한 피노체트의 '구리 사랑(?)'에 힘입어 76년 국영 구리회사인 꼬델꼬가 설립되었고, 나아가 칠레 구리 매장량의 77%를 확보하게 되었다. 물론 전기, 전화, 철강, 항공 산업의 상당수는 피노체트에 의해 민영화 되었으며 결국 83년 외국계 기업과 국내 여론과의 타협점으로 구리산업의 외국인 직접투자를 보장해주기도 했다. 현재는 민간 부분, 특히 외국계 기업이 소유한 에스꼰디다(Escondida) 광산이 생산량에 있어서 코델코를 제치고 세계 최대 광산으로 꼽힌다.

칠레는 이제 지분 싸움보다는, 외국계 기업에 많은 세금을 부과함으로써 자국의 자원에 대한 합리적인 보상을 지켜내고 있다.

'죽음의 도시'가 된 광산 마을

우리는 구리 제련 공정의 일부분을 견학했다. 거대한 기계들이 윙윙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중무장한 노동자들이 녹은 구리를 조형틀에 넣어 주조해 내고 있는 장면들을 볼 수 있었다. 정비소에서는 무려 340톤 짜리 트럭을 실제로 볼 수 있었는데, 가장 큰 것이 400톤짜리라고 하니 그 압도적인 크기는 상상을 초월한다.
▲ ⓒ손문상

▲ 무려 340톤짜리 트럭. 노천 광산이기 때문에 구리 생산 과정에서 이런 대형 트럭이 필요하다. 일본과 미국에서 만들어진다고 한다. ⓒ손문상

▲ ⓒ손문상

▲ ⓒ손문상

▲ 거대한 트럭을 부리는 작은 정비공들. ⓒ손문상

▲ 괴력을 발휘하는 트럭인 만큼 매일 매일의 정비는 필수다. 하루 작업을 한 후 3일 정도의 정비를 받는다고 한다. ⓒ손문상

▲ 구리를 채취하기 위해 분쇄한 바위와 흙을 버리는 작업이다. 거대한 트럭이 괴력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손문상

추키까마따는 이제 더 이상 광산 도시가 아니다. 사람들은 모두 깔라마로 이주해갔다.

가장 큰 이유는 노천에 거대한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이 구리 신전에서 뿜어내는 각종 유해 광물과 유해 먼지들이 이 곳 노동자들의 폐를 들쑤시기 때문이었다. 사용의 편리함을 위해 구리 광산 주위에 마련된 마을은 죽음의 도시가 되었다.
▲ 깔라마(Calama)시는 추키까마따를 위한 도시다. 추키까마따 시에 있는 노동자들은 이제 모두 깔라마 시로 이주했다. 시내 중앙 광장에 있는 구리 광산 노동자 동상. ⓒ손문상

이곳 관계자의 설명에 따르면 이 곳은 모두 철거될 것이라 했다. 지하 광산이 개발되고 생산량이 늘어나면 당연히 제련 공장이 확장될 것이다. 신전은 이제 자신의 몸을 불리려 하고 있고 노동자들은 보다 안전한 곳에서 편안하게 묵을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와 관리자의 숙소를 분리했던 미국 회사…국유화 이후 경계 무너져
▲ ⓒ손문상

▲ 우리에겐 뜨겁고 위험한 곳이지만, 이들에겐 익숙한 삶의 터전이다. 구리 제련소의 노동자들. ⓒ손문상

▲ 우리를 도와준 홍보팀 관계자, 그리고 그 뒤로 노동자들의 모습.ⓒ손문상

미국인들은 철저하게 노동자 숙소와 관리자 숙소를 분리해 운영했다고 한다.

추키까마따는 중앙 광장을 중심으로 위쪽으로는 과거에 미국인 관리인들이 살던 마을과 아래쪽에 노동자들이 살던 마을로 분리되어 있다. 물론 이 경계가 허물어진 것은 광산의 국영화 이후부터다.
▲ 녹은 구리를 틀 안에 담아 아따까마 사막에서 끌어온 물로 식히는 과정. 추키까마따 구리 제련소. ⓒ손문상

▲ 에르네스또는 구리 생산 과정에 흥미를 가졌다. 추키까마따 구리 광산이 본격적으로 제련 작업을 시작한 시기는 에르네스또가 여행을 했던 1952년이다. 구리는 과거에도, 지금도 여전히 칠레 경제의 상징이다. 구리 제련소. ⓒ손문상

에르네스또가 본 것은 이러한 광경들이었을 것이다. 그가 여행했던 1952년 당시 아나콘다 사는 추키까마따에 거대한 제련 시설을 마련하기 시작한 때였다. 많은 노동자들이 이 구리 신전 주위로 모였을 것이고, 비인간적인 대우와 생활환경을 견뎌내며 이 황량한 사막의 노다지를 지키고 있었을 것이다.
▲ ⓒ손문상

▲ 녹은 구리의 모양을 만들어내는 조형 틀을 청소하는 작업이다. 구리 제련소의 노동자. ⓒ손문상

▲ 구리 제련소의 노동자. ⓒ손문상

진폐증 환자들이 죽어갔을 병원은 부숴져 폐허처럼 변했다. 나중에 로드리게스와 함께 이 곳을 돌아봤는데, 케네디 대통령의 얼굴이 크게 그려진 초등학교와, 거대한 슈퍼마켓, 그리고 폐철골로 만들어진 흉측한 놀이터와 아이들의 정서 함양을 위해 마련했을 섬뜩한 디자인의 피노키오 그림을 볼 수 있었다. 흡사 유령의 도시와 같았다. 간혹 소비에트 마크가 그려진 건물도 발견할 수 있었다.

이곳의 노조 운동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한 상징적인 그림일 것이다. 참고로 칠레는 1979년이 되어서야 노조 합법화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 ⓒ손문상

▲ 제철소는 국가의 것도, 자본의 것도, 국민의 것도 아닌, '노동자'의 것이다. 제련소 앞에 서 있는 구리 노동자 상. ⓒ손문상

▲ 퇴근하는 추키까마따의 노동자들, 정문 옆에는 20년간 이 곳에서 아이스크림을 팔았다는 유명한 아저씨가 있다. ⓒ손문상

▲ 고된 일과를 마치고 깔라마(Calama)시내로 퇴근하는 노동자들, 회사의 정책으로 추키까마따가 유령 도시로 변하면서 깔라마 시는 새로운 추키까마따 노동자 마을이 되었다. ⓒ손문상

"이제 뻬루로 간다"

이 곳을 돌아보는 동안 우리는 계속 몽롱한 상태에 있었다. 자꾸 분위기에 중독되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멍한 시선으로 각종 수치가 주는 관념적인 규모에 감정을 쏟아야 하는 고된 노동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고, 벌써 며칠 째 초록색을 보지 못해 생긴 감정적 결함 때문일 수도 있고, 지리적으로 높은 고도와 눈물이라도 말려버릴 듯한 강한 태양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 추키까마따의 '광산 박물관'. 에르네스또가 보았을 법한 낡은 광산 장비들이 사막 한 가운데 전시되어 있었다. ⓒ손문상

▲추키까마따의 '광산 박물관'. 에르네스또가 보았을 법한 낡은 광산 장비들이 사막 한 가운데 전시되어 있었다. ⓒ손문상

▲ 추키까마따의 '광산 박물관'. 뒤에 보이는 곳이 폐 광물질이 모이는 일명, '쓰레기장'이다. ⓒ손문상

그런 우리에게 로드리게스는 광산 박물관을 보여주는 등 여러모로 많은 노력을 해 주었다. 술 이야기와 여자 이야기를 무척 좋아하는 이 기사 양반, 그리고 추키까마따에서 있을 축제를 기획하는 일로 출장을 왔다는 산띠아고의 한 기획사 직원인 에두아르드(Eduard) 씨와 우리 둘은 해가 저물도록 광산 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가 깔라마 시내로 돌아왔다. 급속도로 친해진 우리 넷은 의기투합해서 맥주를 한잔 마시기로 했다. 로드리게스는 과감하게 폐업 선언을 하고 합류했고 맥주는 에두아르드 씨가 샀다. 즐거운 시간들이었다. 로드리게스는 급기야 자신의 부인과 딸을 데려와 합류시켰다. 이 날 저녁에 뻬루(Peru)로 넘어가는 관문인 아리까(Arica) 행 버스를 타야 하는 우리를 위해 직접 자신의 택시를 몰고(물론 공짜였다.) 터미널까지 배웅해 주기도 했다.

우리는 소박하지만 감동적인 작별 인사를 하고 버스에 올라탔다. 손을 흔드는 로드리게스와 에두아르드씨, 그리고 로드리게스의 가족의 얼굴이 멀찌감치 보였다. 이제 뻬루다. 칠레, 안녕.
▲ 칠레 국경 도시인 아리까로 떠나는 필자들을 배웅하기 위해 나온 로드리게스 가족. ⓒ손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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