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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영어광풍' 부는 사막으로 만들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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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영어광풍' 부는 사막으로 만들텐가"

영문학자들, 한목소리로 '영어 교육 정책' 비판

지난 1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내놓은 '영어 공교육 완성 실천방안'이 새 정부 출범 이후 구체적인 방안도 발표되지 않은 채 표류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각 시도교육청을 중심으로 인수위 방안과 유사한 정책들을 속속 발표하며 경쟁적으로 이를 추진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일군의 영문학자들이 이명박 정부의 영어 정책에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고 나섰다. 지난 15일 영미문학연구회는 서울 이화여대에서 '영어공교육,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정기학술대회를 열었다.

지난 1995년 창립된 영미문학연구회는 박사과정 수료 이상의 학자들이 모여 활발한 활동을 벌여와 그 성과를 대내외적으로 인정받아온 학회다. 이날 학회는 기존 정기 학술대회의 일정을 앞당겨 긴급토론회 형식으로 일정을 변경했다고 밝혔다. 학자들이 현재 상황을 얼마나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는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었다. 토론회에서는 각종 사례와 논거를 제시하며 새 정부 정책을 우려하는 학자들의 발제가 줄줄이 이어졌다.

"영어 공교육 강조한 프랑스, 스페인…수준 오히려 낮아"
▲ ⓒ프레시안

이명박 정부가 영어교육 대책을 발표한 뒤 각종 언론과 토론회를 통해 활발하게 의견을 전개하고 있는 서울대 이병민 교수(영어교육학)는 이날 토론회에서도 새 정부 영어정책의 비효율성을 역설했다. 이병민 교수는 "우리는 흔히 북구의 핀란드, 스웨덴, 노르웨이를 비롯해 덴마크, 네덜란드와 같은 국가들이 영어를 잘 한다고 한다"며 "물론 그 이유를 항상 학교 영어교육에서 찾았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그러나 이들 국가들이 영어를 잘 하는 이유 중 학교 영어교육은 동전의 한 면이지 전체는 아니다"라며 "학교영어수업을 모두 100% 영어로 하지도 않으며 학교 영어교육만을 통해서 영어를 습득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밝혔다.

실제로 이날 이병민 교수가 제시한 자료에서는 유럽 내에서 영어 공교육을 가장 강조하고 있는 프랑스와 스페인 학생들의 영어 실력이 덴마크, 핀란드, 네덜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등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현저히 낮은 것을 알 수 있다.

2002년 발표된 한 보고서에 의하면 교사가 영어 수업을 영어로 가르치는 비율이 프랑스가 65.3%로 가장 높았다. 또 학생들이 영어에 노출되는 비중은 스페인(63.3%)이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더 높았다. 그러나 프랑스와 스페인은 영어 듣기, 읽기, 쓰기, 그리고 언어경쟁력 부문에서 골고루 최하위권을 차지했다.

"글로 적힌 지식의 보고, '회화교육'에 집중하다 놓칠 수도"

이병민 교수는 학교 영어교육이 '말하기 듣기' 중심의 회화교육에 집중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전세계 정보가 모여지는 최신 학술 정보는 지금이라도 학교 도서관을 이용하면 무한히 접근이 가능하다. 이저널(e-journal) 및 이데이터베이스(e-database)로 대표되는 정보 사이트는 새로운 지식의 보고가 되고 있다. 많은 정보들이 영어로 되어있으며 이들 대부분이 말이 아니라 글"이라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새로운 초중등 영어교육 과정은 이런 흐름과는 정반대로 가고 있다"고 지적하며 "현재보다 학생들의 회화능력이 향상될 지 모르지만, 고등학교 졸업생의 80%가 대학에 진학하는 상황에서 영어를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은 현재보다 더 떨어질 수 있다"고 밝혔다.

마지막으로 그는 "우리 영어교육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이러한 처방들에 대한 보다 심도깊은 논의와 대안 모색이 이뤄지지 못한다면 새로운 '영어광풍'을 몰고 올 수 있으며 학교 영어 공교육은 여전히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사교육의 들러리 역할을 할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외국인 교원으로 교육 개선? 혹세무민에 가까워"

이날 토론회에서는 입시 이후의 영어교육, 즉 대학 영어교육의 문제점에 대한 지적도 함께 지적됐다. 서울대 대학영어주임을 맡고 있는 김명환 교수(영문학)는 최근 각 대학에서 일어나고 있는 회화중심 강의, 영어로 진행되는 전공 강의 등 '영어광풍'을 지적하며 "외국인 교수가 대학 영어교육을 담당해야 한다고 고집하는 대학 당국에게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김명환 교수는 "대학의 영어교육을 훌륭하게 해낼 박사 인력을 배출하지 못하는 교수들이 외국인 인력을 데려다가 프로그램을 운영한들 과연 학부생들의 영어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겠는가? 또 영어교육을 잘 할 수 있는 박사를 스스로 길러낼 교육과정을 확립할 제도 개선과 재정 투자를 외면하는 대학당국이 외국인 교수를 아무리 많이 채용하고 그에 따른 투자를 한들 과연 성과가 있을 것인가"라며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이 질문은 자연스럽게 대학에서 교육받은 초중등학교 영어교사의 자질 문제로 이어진다"며 "한마디로 말해, 초중등학교 영어교사의 능력을 탓하기 전에 그들이 받은 대학교육의 질에 대해 반성해야 하며, 그것을 개선하기 위한 제도적 개혁과 획기적인 재정 투자를 고민해야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그것없이 외국인 교원을 확보하여 교육을 개선하겠다는 방침은 혹세무민의 언설에 가깝다"고 덧붙였다.

"영어교육은 영어와 한국어의 이종경기인데…"

김 교수는 또 영어교육만 강조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공교육에서 영어교육은 엄밀히 말해 영어라는 단일 종목 경기가 아니고, 영어와 한국어의 이종경기"라며 "한국어 구사능력을 바탕으로 영어능력이 향상될 수 있는 것이며, 거꾸로 영어라는 외국어 공부가 한국어 능력 향상에 대한 좋은 자극제가 되기도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그리고 국어교육과 영어교육의 선순환적 상승효과가 생기는 과정에는 '인간다움의 연마'라는 공교육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필수요소인 '지적 사고력의 함양'이라는 매개변수가 작용한다"고 덧붙였다.

김명환 교수가 제시한 자료에 따르면 1995년과 2001년을 비교할 때 우리나라 각급 학교 학생들의 국어 문헌독해능력은 현저히 저하됐다. 또 2003년~2005년 초등학생 대상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 연구'에 의하면 국어능력 우수학생이 가장 적고, 영어능력 우수학생이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고급문해능력은 OECD 국가 중 최하위권이라는 연구보고도 나와 있다.

김 교수는 "이는 실제 대학 강단에서 영어를 가르치면서 피부로 느끼는 문제이기도 하다"며 "학생들의 듣기/말하기 능력은 과거보다 향상됐지만 읽기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현상을 지적하는 일선 교수들은 어느 대학에서나 많으며, 학생들이 치른 토익이나 토플의 성적표 중 상대적으로 낮은 독해 영역의 점수에서도 자주 발견할 수 있다"고 밝혔다.

"자국을 '문화적 사막'이라 부르는 싱가포르가 안 보이나"

한편 인수위가 처음 제안했다가 언론의 역풍을 맞고 철회했던 '영어 몰입 교육'에 대한 문제제기도 이어졌다. 비록 인수위는 철회했지만 서울시교육청 등 각 시도 교육청을 비롯해 일선 학교에서는 자체적으로 이미 '영어 몰입 교육'을 서둘러 추진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도 국제도시조성사업 등 명분을 앞세워 몰입교육을 도입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대해 강지수 영어권문화언어연구소 소장은 "전면적 몰입교육은 단순히 외국어교육 강화를 위한 방법론적인 차원에서 적용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아니다"라며 "국가적 아젠다 수행과 맞물린 혁신적인 사회정책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강지수 소장은 "대한민국이 영어에 몰입한다는 것은 현재의 세계화 흐름에 어긋나는 행보"라며 "21세기의 세계화는 지역 간의 갈등을 해소하고, 지역 고유의 정체성과 다양성을 보존하면서도 전 지구적 차원의 소통과 하합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그 성격이 조정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영어몰입교육에 필요한 인프라를 갖출 능력이 우리 정부에게 있다면 오히려 2006년 부시 정부가 자국보안을 위해 결정적으로 필요한 8개 언어를 선정, 해당 언어 교육에 1억1400만 달러를 지원하기로 한 '국가 안보언어 사업'처럼 정부가 장기적인 안목에서 타당한 기준의 선별 능력을 발휘해 필요한 전략 언어들을 위한 교육을 지원해주는 양상으로 가는 것이 바람직한 언어교육정책이라고 본다"라고 강조했다.

강 소장은 '영어로 가르치는 영어교육(Teaching English in English)'의 실효성에 대해서도 "한국어를 억압해서 우리가 현실적으로 득이 될 것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입증되지도 않은 '한국어 장애론'을 계속 유포하는 것은 이념에 불과하다"며 "우리는 한국어로 된 문화를 수출하는 나라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우리가 그리도 주목하는 싱가포르의 지식인들이 자기 나라를 '문화적 사막'이라고 부르고, 1999년에 가서야 국가 정체성을 자국의 문화와 예술에서 찾으려고 뒤늦게 노력하는 모습을 '르네상스 도시 보고서'에서 느낄 수 있지 않나"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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