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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바리맨 아저씨'와 '스트립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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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바리맨 아저씨'와 '스트립쇼'

[일과 희망] 차별 유전자 지우는 문화 혁명

1980년대 중학교를 다닐 때 수업을 마친 후 교복을 입고 종종걸음을 치며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여학생을 기다리고 있는 '무서운 아저씨'가 있었다. 그 아저씨가 여학생을 향해 거친 욕설을 퍼부은 것도 아니었다. 손에 총이나 칼을 들고 우리를 협박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단지 여학생을 향해 몸의 가장 은밀한 부위라고 할 수 있는 성기를 만지작거리며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 다였다. 그 모습을 본 대부분의 여학생은 못 볼 것을 봤다는 듯이 놀라서 소리를 지르고 도망가곤 했다. 여자들은 남자들이 공짜로 보여줘도 싫다.

그러나 어떤 남성들은 여자들이 성기를 노출하는 스트립쇼를 보기 위해 돈을 주고 그곳에 가기도 한다. 여자들은 무료로 보여줘도 그 남성이 섹시하게 느껴지기는커녕 무섭기만 한데 왜 일부 남성들은 돈까지 지불하며 여자의 벗은 몸을 보기 위하여 애쓰는 것일까?

그것은 일부 공무원, 교직 사회에서의 여성 약진 현상을 '여풍(女風)'이라 일컬으며 성 평등이 달성된 듯 야단법석을 치는 현 사회에서 집단적으로 여성과 남성이 어떻게 상징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뻐?" 묻는 남성과 "직업은?" 묻는 여성

"뭐하는 사람이야?"
"예뻐? 날씬해?"

아마도 이성애자 남성과 여성에게 누군가를 소개시켜 준다고 할 때 처음으로 나오는 질문이 이것일 것이다. 모두의 예상대로, 직업을 묻는 첫 번째 질문은 여성의 질문이다. 상대의 몸에 관한 두 번째 질문은 남성의 질문이다.

5000년의 역사가 넘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몸은 정체성의 중요한 부분이고 경제적 자원을 획득할 수 있는 자원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여성 개인의 역사는 복잡하게 각인된 자신의 몸의 역사다. 자본주의적 가부장제 사회는 다양한 생각과 느낌을 가진 인격체인 여성이 자신에게 숨겨진 개성이나 고결함을 발견하기도 전에, 일단 몸과 관련된 인상으로 여성을 물건처럼 분류해버리기도 한다.

지난해 모 라디오 프로그램의 한 남성 진행자(DJ)가 여자를 생선회에 비유하는 발언을 해 물의를 빚었던 적이 있었다. 그 DJ는 한국에서 이른바 최고 엘리트를 상징하는 학부를 나온 사람이었다. 그 프로그램은 필자가 저녁 준비를 하며 가끔 듣던 것이기도 했다.

그 남성 DJ는 "저는 일단 여자를 보면 간을 봅니다"라는 표현을 즐겨 썼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개별적인 여성의 노력과는 별개로 일부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을 어패류에 비교하는 시선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자본주의 사회가 되면서 (경제적) 독립은 독점적인 권위를 갖게 됐다. 동시에 '독립적인 남성'과 '의존적인 여성'이라는 이데올로기가 확산돼 갔다. 남성은 남성성의 핵심, 자신의 존재 의미를 직업에서 찾고 노동에 몰입되어 간다.

자신의 은밀한 몸을 노출하는 '바바리맨 아저씨'가 전혀 섹시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도 거기 있다. 이성의 발현인 '직업'을 상징하는 남성이 그것과 전혀 상방되는 이미지를 여성에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바바리맨 아저씨의 행위는, 자신의 노출된 성기를 보고 놀라서 도망가는 여성들을 통제하고 있다는 민중 남성의 가부장적 자위행위였으리라.

'양성'에 새겨진 문화적 유전자 지우는 것은 혁명에 버금가는 일
▲'직접적으로' 여성을 차별하는 제도는 없어지고 있지만, 성 중립을 가장하고 있지만 결과적으로 여성들에게 불리한 결과를 가져오는 간접차별은 여전히 횡행하고 있다. ⓒ프레시안

그동안 여성을 2등 시민으로 간주하고 부계혈통을 법제도적으로 강화시키는 호주제도가 폐지되고 올해부터 새로운 가족관계등록제도가 시행되고 있다. 그 제도에 여전히 큰 문제점이 많다는 점은 논외로 한다면, 이제 성차별을 '노골적으로' 강화하는 법률과 제도는 사라져가고 있다.

'직접적으로' 여성을 차별하는 제도는 없어지고 있지만, 성 중립을 가장하고 있지만 결과적으로 여성들에게 불리한 결과를 가져오는 간접 차별은 여전히 횡행하고 있다. 이러한 간접 차별은 여성을 향한 문화적 편견, 어쩌면 남성과 여성과 관련된 편견의 문화적 유전자가 대를 이어 세습되고 있기 때문에 지속되고 있다.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로 분류되는 줄리엣 미첼(Juliet Mitchell)은 자본주의를 사회주의로 대치해야할 뿐만 아니라 가부장제를 타도하기 위한 무의식의 혁명을 강조한다. 가부장제는 단지 여성이 남성처럼 경제활동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는 사라질 수 없고 사회주의혁명에 버금가는 자기성찰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는 것이다.

남성들이여, 자신만의 방에 갇혀 외로이 살아갈 것인가?

남성들의 문화적 유전자에 새겨져 있을지 모르는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 예쁘고 섹시한 여성으로부터 즐거움과 편안한 보살핌을 얻고자 하는 욕망에 대한 성찰. 일 중심적인 태도를 지양하고 관계를 보살피는 노동에 기꺼이 참여하는 것. 이러한 문화 혁명이 여성을 경제적 약자로 몰아가는 사회 시스템의 변화와 함께 한다면 남녀가 공생하는 평화롭고 평등한 사회가 가능하지 않을까?

사회는 변하고 있다. 여성들은 자기성취를 위해, 혹은 남성들에게 일방적으로 지워졌던 경제적 부담을 함께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그렇다면 남성은 그동안 고단하게 살았던 여성의 눈물을 닦아주는 '신남성(New Man)'으로 거듭날 것인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자기만의 방에 갇혀 사랑받지 못하는 외로운 남성으로 생존해 갈 것인가.

(정기 칼럼 <일과 희망>은 이번 회를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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