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서울 양천구청 앞에서 만난 인권단체 활동가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강조했다. 무엇이 다르다는 것일까? 이날 이들은 횡령 등의 혐의로 전·현 이사장 등이 기소된 사회복지법인 석암재단의 법인승인을 취소하라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언뜻 보기에는 여느 장애인 시설 비리 규탄 기자 회견과 다를 게 없어보였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휠체어에 붙어있는 스티커가 눈에 띄었다. '석암요양원(석암베데스다요양원)'이라는 글씨가 장애인의 이름과 함께 적혀 있었다. 이날 기자 회견에는 석암재단이 운영하는 시설 장애인 20여 명이 참여했다.
확실히 달랐다. 장애인 시설 비리가 밝혀지면 노동조합, 장애인 단체가 해당 시설의 변화를 요구했던 게 지금까지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시설 내 생활인이 직접 나선 적은 없었다. 장애인 시설 가운데 최초로 시설 내 생활인이 시설 개혁을 요구하고 나선 것.
보조금 횡령, 사회복지법 위반 위반 등…
지난 6일 석암재단을 설립했던 이부일 전 이사장은 보조금 횡령, 사회복지사업법 위반,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지난 10일에는 이 전 이사장과 인척 관계인 제복만 현 이사장을 비롯해 시설장 2명도 공모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석암재단은 경기도 김포시에 위치한 장애인 시설 석암베데스다요양원을 비롯해 3개의 장애인 복지 시설을 운영하고 있는 복지재단이다.
이미 이들 시설은 지난해 3월 서울시 감사 결과 회계서류를 허위로 작성해 횡령하는 등 모두 1억700만 원의 장애수당을 부적절하게 집행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매달 국가가 장애인 개인에게 지급하는 장애수당을 시설에서 임의로 사용한 것이다. 관할청인 양천구청은 이를 환수조치 했지만 법적인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석암재단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된 계기는 바로 시설 내 생활인을 통해서였다. 20년간 석암요양원에서 생활해온 한규선 씨는 지난해 10월 재단의 비리와 인권 침해를 두고볼 순 없다는 생각에 장애인 단체와 국가인권위원회 등에 이 같은 사실을 알려나갔다. 사실상의 외출 금지, 불공정한 피복 지급 등 비리 이외에도 한 씨는 석암재단의 인권 침해 실상을 알렸다. 그는 지난 1월 8일부터 양천구청 앞에서 1인 시위에 돌입했다.
이 같은 소식을 접한 장애인 단체들은 노동조합, 그리고 생활인과 함께 '석암재단 비리 척결과 인권 확보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결성해 이들에게 힘을 실어줬다. 또 이미 밝혀진 횡령 사실에 대해 검찰에 고발 조치를 취했다. 최근 검찰의 기소는 이들 활동의 결실이었다. (☞ 관련 기사 : "입춘? 장애인 복지 수준은 아직도 한겨울")
"상식적인 요구에 이해할 수 없는 반응"
이처럼 생활인과 장애인 단체가 적극적으로 나서자 석암재단 측도 이에 호응하는 모양새였다. 횡령 등으로 물러난 전 이사장을 대신해 부임한 제복만 이사장은 최근까지 '공동대책위원회'와 함께 공익이사제 도입 등을 논의했다. 그러나 지난 10일 제 이사장에 대한 불구속기소가 이뤄지면서 협상은 난항에 빠졌다.
공대위 측은 "제 이사장이 자신은 비리와 아무련 관련이 없다고 거듭 말해왔다"며 "그러던 제 이사장이 기소되니 우리도 황당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유죄로 확정될 경우 이사장 자신도 사퇴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하자 자리를 박차고 나가더라"며 "상식적인 요구에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을 보였다"고 말했다.
공대위 측은 재단 측에서 이전보다 노골적으로 장애인들을 통제하려 했다고 밝혔다. 이전부터 예고됐던 이날 기자 회견에 참석하려는 시설 내 생활인의 외출을 막았다는 것이다. 공대위 측은 "처음부터 공익이사 등 우리의 요구를 받아들일 의사가 없었던 것은 아닌가 싶다"며 "비리가 발생하는 복지재단 족벌운영의 고질적인 문제를 보여주고 있다"고 비판했다.
"구청이 빨리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비리 이사진 도와주는 꼴"
생활인과 장애인 단체들은 이제 석암재단의 관할구청인 양천구청이 책임있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사회복지시설 생활인 인권확보를 위한 연대회의'의 김정하 활동가는 "양천구청은 이미 비리가 밝혀진 석암재단이 운영하는 구조를 더 이상 내버려두어선 안된다"며 "즉시 설립허가를 취소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내 장애인 복지시설은 지방자치단체의 관할 아래 국가에서 100% 지원금을 받아 운영되고 있다. 인건비, 관리비 등이 모두 세금과 후원금으로 운영되는 것이다. 이 같은 돈을 횡령하고 생활인의 인권을 유린하는 이른바 '복지 마피아'들에게 정부가 엄중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은 이유다.
그러나 정작 관할청이나 사법부는 마땅한 법적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잘못이 밝혀진 시설에 대한 제재 조치에 소극적이다. 이런 가운데 에바다복지회, 성람재단 등 유사한 시설비리가 수십년 째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장애인 단체들은 "비리 주범은 구속되고 기소돼도 시설 운영에서 깨끗이 물러가기는커녕, 시간이 흘러 이 사건이 사회적 관심 밖으로 밀려날 때까지 시간을 끌며 어떤 식으로든 운영원을 쥐고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변화 역시 작지만 꾸준히 계속되고 있다. 공익이사제를 도입하고 비리 이사진을 퇴출한 에바다복지회, 그리고 피해를 받고 있던 시설 생활인들이 직접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석암재단 사태 등 장애인 시설의 변화는 '진행 중'이다. 실제로 이날 기자 회견에 참석한 20여 명의 생활인은 자신들의 힘으로 시설 비리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보였다.
한규선 씨는 제복만 이사장의 기소 소식에 "우롱당했다는 생각박에 들지 않는다"며 "시설 장애인은 (시설이) 민주화될 때까지 싸우겠다. 그래서 더 이상 이 땅에 시설비리가 발붙이지 못하게 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역시 석암요양원에서 생활하는 김모 씨는 "어이가 없으면서도 기분은 좋다"며 "구청이 빨리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비리이사진을 도와주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고 질타했다.
자신이 석암요양원에서 생활한 지 가장 오래됐다고 밝힌 한 생활인은 "25살 때 요양원에 들어온 뒤 20년 넘도록 있었다"며 "외출도 한번 못하고 너무 답답했다"고 토로했다. 그는 "원장님은 오늘도 외출하지 말라고, 행사 취소됐다고 우리한테 말했다"며 "너무 속상한 우리의 마음을 해결해달라"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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