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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강사 또 자살…"2년이 마치 20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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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강사 또 자살…"2년이 마치 20년 같았다"

"이런 비극 더 없었으면"…사회는 계속 '무관심'

"귀국 초에는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듯, 열심히 강의하고 논문 쓰면 학교에 자리를 잡을 수 있으리란 마음으로 하루를 쪼개어 고시원과 독서실을 전전하며 토요일이든 일요일이든 열심히 논문을 쓰며 보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선 이러한 연구 업적과 강의 경력과는 다른 무언가가 이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깨닫기 위해서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국내 대학에서 시간 강사 생활을 하던 한경선(44) 씨가 지난달 27일 미국 텍사스 주 오스틴에서 자살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한 씨의 딸은 이날 새벽 호텔 방에 쓰러져 있는 한 씨를 발견하고 병원으로 옮겼다. 그러나 그는 오전 11시경 끝내 숨졌다.

한 씨가 남긴 3장의 유서에는 시간강사에 대한 부당한 대우, 대학 교수 임용 과정 내 부조리 등 국내 대학의 병폐가 그대로 들어있어 많은 이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뜻 맞는 학교끼리 연합…한 사람의 삶을 파탄에 이르게 했다"

서울교대를 졸업하고 교사로 재직하던 한경선 씨는 1998년부터 2003년까지 텍사스주립대에서 테솔(TESOL) 분야 박사 과정을 마쳤다. 미국에서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과 연구 업적이 있었지만 교원 임용에 줄줄이 탈락했다. 2006년부터 충주의 한 대학에서 '실용영어'를 가르치며 비정규직 강의 전담 교수로 일했다.

한 씨는 유서에서 "뜻 맞는 몇몇 학교끼리 연합해서 압력을 가하기 위해 한 특정인의 학교 임용을 가로막아, 그의 학문적 업적이나 발전을 저해함으로써 결국엔 그의 삶을 파탄에 이르게 했다"며 대학 임용 과정에 만연된 부조리를 지적했다. 그는 "부양가족을 지니고 경제적 뒷받침이 없는 상태에서 다년간 시간강사로 버티기는 불가능하고, 강의교수로 지내면서 임용에 필요한 정도의 논문을 쓰기는 사실상 가능하지 않다"고 밝혔다.

한 씨는 비정규직 시간강사로 재직했던 시절에 대해서도 "이곳에서 지낸 만 2년이 마치 20년같이 느껴졌다"며 "신분상 약자인 점으로 인한 유형들이 나타났다"고 밝혔다. 그는 "(시간강사에게) 책임시수를 책임학점제로 변경하면서 초과강사료를 주지 않으려 했던 부서장이 외국인교수에게 출퇴근시 사고에 대한 보상을 직접 모색하던 모습에 참담한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며 고용자인 학교 측의 일방적인 계약 변경 과정에서 느낀 점을 밝혔다.

"부조리와 모순, 열정은 환멸로 바뀌었다"

한 씨는 "1년 단위로 3년까지 계약이 갱신될 수 있는 상황 하에서 주임교수의 재임용 추천 조항은 그의 부당한 처우에 무방비로 놓이게 될 소지를 야기할 조항이라 할 수 있다"며 "교재 변경 등의 이유로 부서장의 방에 한 사람씩 불러 부서장과 과목주관교수 합동의 심문식 면담이라든지, 외부 출강 금지 건과 관련한 동료 교수 파면, 2006년도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실시된 영어 수준 평가 도구인 모의 토익시험지의 공개 거부가 그 일련의 사례였다"고 밝혔다.

한 씨는 "현 체제에서 최고교육기관이라 할 수 있는 대학에서 행하는 모순과 불공정한 처사는 같이 일하던 동료교수의 파면을 통해 보다 분명하게 나타났다"며 "그의 파면을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운 학교측의 주장들은 진실과는 거리가 멀어보이고, 이의 행정적, 법적 절차를 위해 그들이 제시한 서류들과 주장들을 보고 전해 들으면서, 이 기관이 도대체 무엇을 하는 곳인가 하는 의문이 들게 했다"고 밝혔다.

한 씨는 "제가 삶을 마감하면서 이 글을 쓰는 것은, 더 이상은 이와 같은 비극이 일어나길 원하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그럴듯한 구호나 정책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진정한 반성과 성찰 없이는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사항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한 씨는 "그 동안 겪은 이러한 부조리와 모순은 열심히 연구와 강의를 하리란 초기의 순수한 열정에서 이 사회에 대한 환멸과 더불어 애초의 희망과 비전을 접게 만들었다"며 "마지막으로 더 이상 저와 같은 이가 있지 않았으면 하는 작은 기원을 위해 두서없이 이 글을 써서 전한다"며 유서를 끝맺었다.

절박한 시간강사 처지에 눈감는 사회
▲ 국회 앞에서 180일이 넘게 진행되고 있는 한국비정규직교수노동조합 농성. ⓒ프레시안

'시간강사'로 총칭되는 대학 내 강사들은 국내 대학 강의 중 40% 이상을 맡고 있지만 대부분 교원 자격이 없는 비정규직이다. 이들의 박봉과 열악한 교직 환경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한 씨뿐 아니라 2003년 서울대 러시아어과 시간강사 백 아무개 씨, 2006년 서울대 독문학과 시간강사 권 아무개 씨와 부산대 시간강사 김 아무개 씨, 지난 2월 서울대 불문과 강사의 자살까지 비관 자살도 잇따르고 있는 실정이다.

절박한 상황에 비해 이를 개선하려는 정부의 노력은 '전무'에 가깝다. 2004년 국가인권위원회는 시정권고를 내렸지만 정작 교육부는 아무런 개선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 그나마 지난 2007년 5월 이주호 한나라당 의원이 대표발의한 '시간강사의 교원 지위를 인정하는 고등교육법 개정안'이 국회에 제출됐지만 아직까지 교육위조차 통과하지 못했다. 한국비정규직교수노동조합은 지난해 9월부터 국회 앞에서 180일 넘게 농성을 벌이고 있지만 이들에 대한 사회적 무관심은 계속되고 있다.

교수노조의 김영곤 조합원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대학 시간강사는 1949년 제정된 고등교육법에서 교원의 지위였으나, 1977년 유신정권에서 지식인 탄압 등의 이유로 교원지위를 박탈당했다"며 "이후 1987년 전국강사노조가 결성됐으나, 지도부를 회유해 전임 자리를 주는 등의 방법으로 여태껏 교원지위 회복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울분을 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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