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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세안, 공동체 버리고 FTA 택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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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세안, 공동체 버리고 FTA 택하려나

[아시아 생각] 아세안 헌장과 시민사회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ASEAN) 국가들이 아세안 헌장 비준 문제로 고민중이다. 1967년에 출범한 아세안은 작년 11월 20일 싱가포르에서 개최된 제13차 정상회의에서 ASEAN헌장(Charter)을 채택하였다. 헌장은 헌법과 같은 것으로, 일단 발효되면 아세안은 유럽연합(EU) 처럼 국제법적 지위를 가지게 된다. 헌장 채택은 아세안이 40년간의 '동거'생활을 마치고 '결혼'하기로 했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알리는 '약혼식'으로 비유할 수 있다. 그러나 이에 필요한 10개국의 비준이 결코 쉬워보이지 않는다.

ASEAN 헌장 제정은, 2005년 12월 제 11차 쿠알라룸푸르 정상회의에서 헌장 제정에 합의한 지 2년만에 '초고속'으로 진행되었다. 먼저 전직 대통령, 수상 또는 장관으로 구성된 저명인사그룹 (Eminent Persons Group·EPG)은 약 1년간을 광범위한 의견 수렴과 자체 토론을 통해 헌장의 목적과 원칙 그리고 다루어야 할 주요 내용 등 밑그림 작업을 한 후 2007년 1월 세부에서 열린 제 12차 아세안 정상회의에 권고안을 제출하였다.

아세안 정상은 이를 토대로 고위급초안작성위원회 (High-level Task Force·HLTF) 를 구성하여 헌장 초안 작성에 착수하기로 결정하였다. 아세안 각국 정부를 대표하는 직업 외교관으로 구성된 초안작성위원회는 불과 10개월 만에 초안을 만들어 싱가포르에서 열린 정상회의에 제출하였다. '상호 내정불간섭과 합의제' 원칙으로 인해 의사결정과정이 비효율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온 아세안으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이렇게 급조된 헌장은 현재 절차 뿐 만 아니라 내용에서도 정당성과 실효성에 많은 결함과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이전에 시민사회는 아세안을 '이빨 빠진 호랑이(toothless tiger)', 또는 현실과 유리된 '엘리트 클럽' 으로 간주하여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에 대응하여 시민사회단체는 신속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2007년 초 출범한 아시아시민사회연대회의(Solidarity for Asian People's Advocacy·SAPA) 산하 아세안 실무그룹(Working Group on ASEAN) 은 저명인사그룹의 간담회에 참석하여 인권, 경제, 발전, 환경, 노동 등에 관한 시민사회단체의 의견을 제출하였고 초안작성위원회가 주관한 간담회에도 참석하였다. 그러나 시민사회 뿐만 아니라 언론의 거듭되는 요청에도 불구하고 헌장 초안 작성은 비공개로 진행되었으며 정상들이 서명을 한 후에야 헌장의 내용이 비로소 공개되었다. 따라서 시민사회는 물론 각국의 의회 또한 헌장의 내용을 알 수 없었고 실질적인 기여를 할 기회가 없었다.

싱가포르 정상회의 2주 전에 열린 제3차 아세안시민사회회의 (ASEAN Civil Society Conference III)에 참가한 약 150명의 시민사회 대표자들은 아세안헌장의 채택을 연기할 것을 요구하기로 결의하였다. 주된 이유는 시민사회의 의견 수렴 미비와 작년 발생한 버마의 대규모 인권 침해와 민주화 운동 탄압에 대한 의미있는 대책 부재였다. 한편 참가자들은 시민사회의 비전과 열망을 담은 민중헌장 (ASEAN People's Charter)을 제정하기로 결의하였다.

정상회의 약 10일 전 태국 인터넷 언론사는 태국의 국회의원을 통해 자체적으로 입수한 아세안 헌장 초안을 공개하였다. 초안 원문을 접한 시민사회단체의 반응은 대체로 매우 비판적이었다. 인권, 민주주의에 대한 언급이 있었으나 형식적이었고 '국가주의와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의 언어과 관점이 지배적이다는 것이 중론이었는데 구체적으로 아세안 헌장은 '유럽연합과 미국 등과의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해 세계 자본주의경제에의 편입을 가속하기 위한 국제법적 기반을 만들기 위한 법적 수단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많은 공감을 받았다. 한마디로 헌장의 내용이 아세안의 비전인 "나눔과 돌봄의 공동체(Sharing and caring community)"와 부합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일단 싱가포르는 약혼식 주최국 답게 올해 1월 초 가장 먼저 비준동의서를 자카르타에 있는 아세안 사무국에 제출하였다. 아세안의 인구 대국인 인도네시아 의회는2월 초 처음으로 비준 문제에 대한 논의를 하였지만 찬반 양론으로 나누어져 결론을 맺지 못하였다. 필리핀은 아웅산 수치 여사가 가택연금에서 풀리기 전에는 비준할 수 없다는 입장을 이미 천명한 바 있다. 말레이시아 내각은 헌장을 비준하기로 결의하였다. 태국은 2006년 9월 군사 쿠데타에 의해 해산된 상원이 2월 말 현재 아직 상원이 구성되지 않아 비준 논의를 못하고 있다. 아세안을 창립했던, 비교적 정치적으로 민주화되었다는 5개국의 상황이 이렇다보니 마지못해 헌장에 서명했던 나머지 나라들도 다른 나라들의 눈치를 보면서 시간끌기 작전을 구사하고 있다. 이렇듯 김이 빠진 듯한 분위기하에서 싱가포르 정상회의에서 약속했듯이 올해 말 태국에서 열리는 제 14차 아세안 정상회의에서 아세안 헌장 비준안이 통과될 지 불확실하게 되었다.

이런 딜레마에 처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아세안이 작년 설립 40주년을 맞이하여 불혹의 나이를 넘기지 말아야 한다는 심리적 강박관념으로 너무 서둘렀기 때문이다. 아세안은 형식으로는 정부간 기구(inter-governmental)이지만 내용으로는 시민사회의 제도적 참여를 의미하는 공치(共治·governance)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엘리트적 성격과 관료적 관행을 지속해왔다. 참여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은 과정이 다소 더디고, 시끄럽지만 결과의 정당성과 실효성을 보장하는 필요조건이다. 국제적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아세안은 이제 불혹의 나이에 접어들었다. 앞으로 아세안이 구시대적 '관료독재'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면 아세안 헌장도 유럽연합의 헌법처럼 한동안 우여곡절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 [아시아 생각]은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에서 격주간으로 내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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