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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이름 김세진, 이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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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이름 김세진, 이재호

[뷰포인트] 김응수 감독, 두 민주투사 얘기 다큐로 제작

김세진과 이재호. 지금의 20대들에겐 영 낯설기만 한 이름일지 모르겠지만 80년대 중, 후반에 대학을 다니고 있던 이들, 그리고 이들을 선배로 두며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졌던 후배들에게는 깊은 상처로 각인된 이름이다. 광주항쟁이 일어난 지 6년 후인 1986년 4월 28일, 23살의 꽃다운 청년이었던 이들은 신림사거리에서 전방입소 반대 시위가 막 시작되었을 무렵 '반전반핵 양키고홈', '북미 평화협정 체결', '미 제국주의 축출' 등의 구호를 외치며 한 건물 옥상에서 자신의 몸에 신너를 뿌리고 분신했다. 이제 22년이 지난 현재, 이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증언을 담은 영화 <과거는 낯선 나라다>가 제작되어 개봉한다.
과거는 낯선 나라다
<천상고원>, <달려라 장미>,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 등 극영화만 찍어왔던 김응수 감독은 당시 이들과 같은 학교를 다니면서 함께 학생운동을 하고 있었던 만큼 그들의 분신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과거를 가진 감독이다. 김세진, 이재호 기념사업회에서 다큐멘터리 제작을 의뢰해 왔을 때 오랜 고민 끝에 제안을 받아들인 김응수 감독은 기존의 다큐멘터리들이 관습적으로 사용하는 방식, 즉 영정사진과 당시 자료화면 등을 비추며 비장한 음악소리 위에 내래이션을 읊는 방식과 정반대로 나아간다. 영화는 김세진, 이재호 열사와 함께 학생운동을 했고 그 시위에 연관되어 있었던 사람들의 인터뷰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카메라는 인터뷰 대상자들의 정면에서 고정돼 있고, 마치 취조라도 하는 듯 냉정하게 그 날 자신의 행적을 자세히 묻는 카메라 바깥의 목소리에 카메라를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한다. 그 날 입었던 옷, 날씨, 그 전 날 갔던 곳, 함께 있었던 사람, 했던 농담들, 그리고 도착한 시간, 타고 간 교통수단, 버스번호.... 대부분의 인터뷰이들은 어떤 것들은 마치 눈앞에 그 광경을 보고 있는 듯 세세하게 묘사해 내지만, 어떤 것들은 아예 기억 속에서 통째로 지워져 버린 양 아무 것도 기억해내지 못하거나 확신하지도 못한다. 그리고 두 열사의 분신 당시를 묻는 질문에는 어김없이 눈물을 터뜨리며 목소리가 잠기고 만다. 이재호 열사의 아버지는 결국 카메라에서 눈을 피한 채 아무 대답을 하지 못 한다. 이것을 지켜보는 사람들 역시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영화라는 것이 시각에 특히 많이 의존하는 매체인 만큼, 관객은 시종일관 인터뷰이의 얼굴과 그의 반응 하나하나를 보여주는 고정된 카메라가 답답할 뿐만 아니라 적당한 편집을 통해 카메라 뒤에서 질문을 하는 사람의 모습, 혹은 당시의 자료화면 같은 것들이 끼어들어와 주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그 날의 기억을 재구성하여 언어화하는 이들의 필사적이고 절박한 노력들, 그 노력이 그대로 반영되는 이들의 얼굴들이고, 우리는 이들이 증언을 마치기 전까지는 이들의 얼굴을 계속 똑바로 쳐다볼 수밖에 없다. 이 순간 우리가 대면하게 되는 것은 그저 남일 뿐인 어떤 사람들의 기억이나 상처가 아니라, 그간 내가 무관심하게 외면해왔던, 그러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몸의 일부에 축적되어 나의 기억과 감성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는 고통이다. 우리는 그들의 기억이 단지 그들만의 상처가 아님을, 그럼에도 그것이 여전히 손에 명확히 잡히지 않은 '낯선 나라' 저 편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며 당황한다. 이것이 좀더 본격화되는 것은 인터뷰어이자 영화의 감독으로 카메라 뒤에 서 있던 김응수 감독이 직접 카메라 앞으로 나와 또 한 명의 인터뷰이로 섰을 때이다.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김응수 감독
김응수 감독은 이러한 형식을 통해 단지 과거가 저 뒤에 묻혀있는 것이 아닌, 바로 '현재'에 언제든지 틈입해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이러한 시도는 과연 효과적이어서, 우리는 이제는 40대의 중장년층이 된 이들의 기억이 여전히 현재와 긴밀히 관계를 맺고 있고, 이들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목격한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지금도 고스란히 안고 살아가는 그들의 상처는 그들의 현재, 그리고 관객의 현재를 잠식한다. '시간은 오래 지속될' 뿐만 아니라, 과거는 현재와 혼재해 우리의 일상을 구성한다. 평범하게 일상을 살아가고 있던 이들이 카메라 앞에 불려나왔을 때, 그리고 기억 저 편의 상처를 기어코 수면 위로 끄집어낼 때, 그들의 소소한 손짓과 눈썹의 떨림, 그리고 입 주변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은, 역시 과거의 상처를 소재로 한 그 어떤 블록버스터 영화도 줄 수 없었던 스펙터클한 정서와 아픔을 그대로 전달한다. 이 영화가 정치적, 역사적인 이유뿐만이 아니라 영화적으로도 소중한 이유는 바로 그래서다. 극화되고 시각화된, 그리하여 신비화된 장면들, 혹은 감독이 일방적으로 제시하는 그 날의 상황 대신, 우리는 그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현재의 고통과 기억을 영화를 보는 순간 함께 '경험'하게 된다. 영화는 '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경험하는 것'이라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바로 이 영화가 생생하게 체험하게 해준다. 3월 6일 시네마상상마당, 3월 14일 인디스페이스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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