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내내 날리던 눈발 사이로 비친 전경들의 눈빛이 유독 삼엄하던 25일, 청와대의 주인이 바뀌었다. 경제 살리기를 내세워 당선된 기업인 출신 대통령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그리고 같은 날, 통인동 골목에서 작은 책방이 문을 열었다. 물론 이 두 사건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
드디어 '바깥사람'이 되다
다만 공통점이 있다면, 책방 주인 역시 청와대의 새 주인만큼이나 이날을 기다렸다는 점이다. 선한 눈빛을 가진 예순 아홉 살 책방 주인은 "올해부터 '바깥사람'이 돼 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그는 '안사람'이었다. 부인인 한명숙 전 총리의 대외활동을 가정에서 돕는다는 뜻에서 '안사람'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바깥사람'이라는 낱말과 함께 그의 입가에 번지던 미소를 온전히 설명하지 못한다.
40년 전인 1968년, 이십대의 끝자락에 서 있던 그는 통혁당 사건으로 투옥됐다. 대학 연합 동아리의 동료였던 한명숙 전 총리와 갓 결혼해 한창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을 때였다. 그리고 13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감옥 안에 갇혀 지냈다. 이런 뜻에서도 그는 오랫동안 '안사람'이었다.
'바깥'에 대한 동경이 그의 내면에 얼마나 깊숙이 자리하고 있을지 짐작하는 게 어렵지 않다.
언론 보도를 꾸준히 접했던 독자라면, 이쯤에서 책방 주인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다. 그는 박성준 성공회대 NGO대학원 교수다. 그의 존재는 정치인 한명숙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서로를 존중하는 평등한 부부의 표상으로, 오랜 수감생활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굳은 신뢰와 사랑의 표본으로 이들 부부는 종종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이처럼 따뜻한 눈길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40년 전, 이들 부부를 갈라놓았던 통혁당 사건은 보수 언론이 색깔 공세를 펴기 위해 종종 들먹인 소재였다.
길에서 툭툭 마주치는 사람들, 그들이 '시대의 주인'이다
그래서인지 개업 준비로 분주하던 22일, 책방에서 만난 그는 무척 조심스러웠다. 낱말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골라서 쓰는 티가 역력했다. 우선 책방 이름에 대해 물었다. "왜 '길담서원'이죠?"
"친한 후배 부부가 제안한 것입니다. 우리 아이 이름이 '길'입니다. 후배 부부 아이 이름이 '담'이고요. 이 두 글자를 합쳐서 책방 이름을 짓자는 제안이었죠. '길담서원'이라는 이름을 불러보니, 울림이 참 좋았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정했습니다."
한곳에 뿌리내지 않고 '길'만 따라 걷는 삶이 가볍고 얇다면, '담' 안에서만 머무른 삶은 좁고 무겁다. 통인동 골목을 걷다보면, 간혹 '담'이 '길'을 막고 있거나 '길'이 '담'을 뚫고 지나는 경우를 보게 되지만, '길'과 '담'이 꼭 서로 맞서기만 하는 것은 아닐 게다.
한명숙 전 총리를 '바깥사람'이라 부르는 그에겐 '안과 바깥'의 구분도 이와 비슷하다.
"사람에게 안과 바깥의 역할이 기계적으로 나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안과 바깥을 수시로 넘나들면서 서로 잘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죠. 올해가 제게는 60대의 마지막 해입니다. 동양 사람들은 열자리씩 끊어서 나이를 구분하는데 익숙하죠. 60대는 바깥에서 새로운 일을 도모할 수 있는 나이입니다. 이제 저도 세상에 대해 조금씩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게다가 올해는 민주 정부 10년 역사가 막을 내린 시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동안 쌓인 지혜는 이미 많이 소모돼 버렸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다가올 시대에 대해서는 누구도 쉽게 전망하지 못합니다.
새로운 시대에 성격을 부여하고, 방향성을 만들어 가는 게 누구일까요? 흔히 권력을 가진 이들이 시대를 만들어 간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국민이 권력자를 올려다보면서, 불가항력적으로 끌려가는 시대는 지나갔다고 봅니다.
평범한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시대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 하나하나가 스스로 주인이 돼서, 방향을 찾아가야 합니다. 어떤 훌륭한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기를 기다리거나, 어디선가 좋은 게 뚝 떨어지길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시민 스스로가 시대를 만들어 가야지요."
"정말 책 읽을 겨를이 없습니까?"
주로 담 안에 머물던 그가 이제 길에 나서겠다는 뜻으로 들렸다. 길에서 만나는 평범한 사람들, 그들에게 이야기를 건네겠다는 뜻으로도 들렸다.
하지만 바깥에서 나눈 대화는 종종 바람결에 흩어진다. 안과 바깥을 수시로 넘나들겠다고 한 이유도 그래서일 게다. 길을 걸으며, 보고 들은 것들은 담장 안에서의 사색을 통해서만 숙성된다. 그리고 이런 숙성의 결과는 다시 길을 따라 걷는 여행을 풍요롭게 한다. 물론 이런 숙성을 돕는 재료는 책이다.
"작은 책방 하나를 제대로 만들어가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고 봅니다. 작지만, 좋은 책방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사회가 갖고 있는 문화의 힘은 간단치 않습니다. 언제부터인가 평범한 시민이 좋은 책을 읽는 모습을 찾기 힘들어졌습니다. 아예 이런 가능성 자체를 잊어버린 듯합니다. 좋은 책을 읽는 것은 아주 특수한 부류만 하는 일처럼 돼 버렸습니다. 심지어 시민운동가들조차 책을 읽지 않습니다. 책 읽을 겨를이 없다고 하지요.
그런데 정말 겨를이 없을까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책 읽을 겨를이 있다는 생각을 못할 뿐입니다. 저부터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제 바뀌어야 합니다. 물론 혼자서는 못 바꾸지요. 그러나 함께하면 됩니다. 좋은 책을 함께 읽는 운동을 벌이고 싶습니다."
대학가에 책방을 내지 않은 이유
'길담서원'은 인문학 서점이다. 그리고 무턱대고 많은 책을 팔기 위한 곳이 아니라, '좋은 책'을 골라서 권하는 곳이 되려 한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사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학가 사회과학 서점이 대개 그랬다. 하지만 1980년대에 융성했던 대학가 사회과학 서점은 이제 거의 몰락했다. 몇 곳만 간신히 살아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대학가에 책방을 낼 생각을 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지금도 전혀 없어요. 책방에 드나드는 사람이 대학생으로 한정돼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평범한 시민들이 들르는 책방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대학가가 아니라 통인동에 자리 잡은 것도 그래서이지요.
왜 하필 통인동이냐고요? 처음부터 이곳을 고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동원할 수 있는 자본금의 한계를 벗어나는 후보지를 하나씩 지워가다보니, 결국 통인동만 남더군요. 이곳은 개발제한지역이라 임대료가 싸거든요.
결과적으로 보면, 아주 잘 한 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동네에는 시민단체도 많고, 정부 기관이나 연구소, 언론사도 있습니다. 그밖에도 아주 다양한 사람들이 지나다니지요. 게다가 경치도 좋고요. 생활인에게 다가가는 책방을 열겠다는 원래 생각에 잘 어울리는 곳이라고 봅니다.
물론 이런 곳에 책방을 세우면, 망하지 않겠느냐라고 걱정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하지만 저는 '혼자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함께하니까 책방이 잘 되는구나'라고 여길 수 있는 사례를 만들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런 것 해도 굶어죽지 않는구나'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게 하고 싶습니다. '인문학 책방 열어도, 굶지 않는다'라는 생각이 퍼져간다면, 굉장한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봅니다."
"지금, 왜 인문학인가?"
'인문학'이라는 낱말은 언제부터인가 '굶는다'라는 낱말과 짝을 이뤄 쓰이는 게 됐다. '실용'을 전면에 내세운 현 정권에서라면, 이런 경향이 더 심화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인문학이 홀대받는 것이 새삼스런 일은 아니다. 가난한 시절에는 당장의 밥벌이가 안 된다는 이유로, 먹고살만해졌을 때는 다른 재미있는 게 많다는 이유로, 체제가 불안정할 때는 인문학에 섞이기 마련인 '불온한 상상력'이 거슬린다는 이유로, 늘 외면당했다.
물론 여기에는 인문학자들의 책임이 더 크다. 물질적 생산 활동에 직접 기여하지 않는 인문학이 굳이 필요한 이유를 스스로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권력에 기생하는 이데올로그 역할을 하거나, 상아탑의 권위를 빌어 자신들의 작업을 신비화하는 방식으로 비판과 검증에서 도망치기 일쑤였다.
그래서 인문학은 여유 있는 이들을 위한 '악세사리' 역할에 그치곤 했다. 여유 시간이 넉넉한 대학생이 아니면 쳐다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삶을 근본적으로 되돌아보게 하는 인문학 고유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는 셈. 그래서 물었다. "지금, 왜 인문학인가?"
인문학은 배고픈 자들에게 더 절실하다
"우리 사회에서 인문학이 생활인과 동떨어져 있는 게 사실입니다. 사회과학의 경우, 1980년대에 우리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하지만 인문학은 최근까지도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인문학의 위기'라는 표현을 통해 오히려 관심을 끌게 됐죠. 인문학이라는 말 자체가 낯설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우리의 삶과는 동떨어진 것으로 여겨졌지요.
인문학은 말 그대로 인간을 다루는 학문입니다. 그리고 인문학은 우리의 삶이 던지는 물음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길을 찾도록 돕는 것이지요.
이처럼 인문학의 원래 의미대로라면, 인문학은 평범한 생활인과도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인문학적인 질문을 품게 되니까요. 다만 우리가 인문학의 존재와 역할에 대해 잊고 지냈을 따름이지요.
그런데 최근, 인문학에 대해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미국의 작가이자 교육자인 얼 쇼리스가 시도한 클레멘트 코스에 대해 알게 되면서이지요. 국내에는 <희망의 인문학>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소개된 내용입니다.
얼 쇼리스의 클레멘트 코스는 가난한 이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가벼운 교양강좌 수준이 아닙니다. 대학 정규 과정 수준의 인문학 고전 교육입니다.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빈민들에게 고급 인문학 교육을 한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흔히 하는 예상과 달리, 빈민들은 내용을 충분히 소화했습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이들이 인문학 교육을 통해 자아에 눈 뜨면서, 가난을 딛고 일어날 힘을 얻었다는 점입니다. 밥벌이와 전혀 무관한 인문학을 통해서 말입니다.
인문학 고전 독서를 통해 의식이 깨어난 그들은 가난에서 벗어났을 뿐 아니라 정치적 주체로 거듭나는데도 성공했습니다. 저는 이런 사례가 빈민들에게만 적용될 수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평범한 생활인들에게 두루 해당되는 이야기라고 봅니다.
'길담서원'은 책방인 동시에 공부방이 되고자 합니다. 좋은 책을 만날 수 있는 곳이면서, 좋은 책을 함께 읽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이곳에서 인문학 고전을 함께 읽는다면, 얼 쇼리스가 시도한 것과 마찬가지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봅니다. 이런 시도 속에서 위기에 처한 인문학 역시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겠지요.
흑인 노예들에게는 성서가 해방의 무기였다
<희망의 인문학>을 읽으며,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성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미국에서 노예 해방이 이뤄지기 전에, 미국 흑인들에게 단 한 권의 책만 주어졌다고 합니다. 킹 제임스 판 성서입니다. 이 책은 성서의 여러 판본 중에서 대체로 보수적인 언어로 쓰여졌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흑인 노예들이 정치적 각성을 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성서는 인문학 책이거든요. 아주 인문학적인 책입니다. 그 책 안에 문학, 수사학, 인식론 등 인문학의 거의 모든 게 담겨 있지요. 그런데 이런 인문학적인 독서를 통해 노예들이 스스로의 해방을 향한 정치적 각성을 하게 됐다는 것은 제겐 큰 놀라움 이었습니다.
제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거든요. 수감 생활을 하던 때입니다. 감옥 안으로 들여올 수 있는 책은 무척 제한돼 있습니다. 정치적 성격을 띤 책은 접하기 힘들지요. 그곳에서 읽은 성서는 강렬한 정치적 메시지를 전하는 책이었습니다. 아울러 깊은 인문학적 성찰을 하게 하는 책이기도 했습니다. 시편에 담긴 구절이, 열왕기에 적힌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가 어찌나 강렬하게 다가오던지요. 물론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이들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결과였겠지만요.
보수적 언어로 쓰인 성서가 노예 해방의 정치적 무기가 됐다는 것은 한국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우리 역사에서도 1919년 3·1운동 이전에는 성서와 기독교가 이런 역할을 했거든요. 성서를 읽으면서, 많은 이들이 '의식의 깨어남'을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이런 경험이 잘 이뤄지지 않았지요.
한국의 교회가 경직됐기 때문입니다. 성직자들은 특정한 방식으로만 성서를 읽도록 강요합니다. 이래서는 성서의 깊은 뜻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신자들은 성서를 달달 외우기만 할 뿐이죠. 오히려 그 과정에서 세뇌를 당하고 있습니다. 의식이 완전히 마비돼 버리는 것입니다.
흑인 노예들이 성서를 읽으며 깨어난 것과 정반대의 상황입니다. 저는 이런 상황이 다시 뒤집어 질 수 있다고 봅니다. 다시 성서가 의식을 깨어나게 하는 책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물론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하죠. 함께 책을 읽는 것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봅니다."
성서를 이데올로기적 수단으로 이용하는 교회
그가 성공회대에서 가르치는 것은 평화학이다. 이는 그가 퀘이커교도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퀘이커교도들은 교회를 짓지 않는다. 성직자를 따로 두지도 않는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믿음도 존중한다. 자신의 진실만 옳다고 주장하지 않으며, 모든 사람의 내면에는 빛이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들은 독선과 증오 대신 평화를 심으려 한다.
그는 오랜 수감 생활을 하며, 신학에 눈을 떴다. 철학, 역사 등 인문학의 여러 분야에 대한 치열한 독서의 결과였다. 출소한 뒤, 그는 일본에서 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어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퀘이커공동체에서 생활하며 평화에 대해 공부했다. 이런 그가 예수와 성서에 대해 할 말이 많은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는 말을 아꼈다.
성서와 기독교에 대한 질문을 거듭 던졌지만, 그는 "다음 기회에"라며 사양했다. 그래도 묻고 싶었다. 출세하려면, 특정 교회를 다녀야 한다는 말이 별 부끄러운 기색 없이 나오는 시대에, 교회가 자녀의 입시 성공과 가장의 승진을 기원하는 곳이 돼 버린 시대에, 성서가 갖는 의미에 대한 질문을 어떻게 빠뜨릴 수 있겠는가.
"성서는 특정한 시대적 상황에서는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다른 기능을 할 수 있습니다. 노예 해방 전에, 흑인 노예들이 성서를 통해 정치적으로 깨어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입니다. 같은 텍스트라도, 누가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정치적 성격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성서를 읽을 때는, 이런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 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교회에서는 성서를 교리에 맞춰서만 읽습니다. 이렇게 하면, 성서가 가진 풍부한 메시지가 다 죽어버립니다. 신자들에게 성서를 이런 식으로 읽도록 하는 것은 목회자가 갖고 있는 이데올로기를 주입하기 위해 성서에서 억지로 증거를 끌어내려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성서를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지요. 아주 잘못된 태도라고 봅니다."
"이곳을 찾는 이는 누구나 주인입니다"
대략 이쯤에서 그는 대답을 멈췄다. 조심스러운 태도로 이야기를 이어가던 그였지만, 특정한 방식으로만 책을 읽도록 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몹시 단호하게 거부했다. 이런 입장은 굳이 성서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었다. 누군가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이끌려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은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견고하게 지켜졌다.
"시민단체가 그동안 많이 발전했습니다만, 여전히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지도자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고, 그가 없으면 일이 제대로 되지 않도록 틀 지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지도자 역할을 하는 사람의 생각이 조직의 입장으로 관철됩니다. 이는 잘못입니다.
'길담서원'은 특정한 사람의 생각이 우위에 놓이는 곳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누구나 참여할 수 있고, 어떤 생각이든 존중받는 곳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질문에 대해서도 대답을 아꼈다. 단지 혼자만의 생각이므로, 계획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길담서원'에 모이는 이들과 함께 결정해야 계획이 될 수 있다는 것.
"'좋은 책 100권 읽기', '아주 좋은 책 100번 읽기'를 '길담서원'에서 하고 싶습니다. 물론 함께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는 계획이 아니라 제 바람일 뿐입니다. 이곳을 찾는 이들과 토론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계획을 세워가야겠지요. 무슨 일이든, 혼자 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아직 충분한 준비가 안 된 채로 책방을 열려 합니다. 빈자리는 여러 사람이 함께 채워가는 것이지요. 이곳을 찾는 이는 누구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조심스러운 대답이지만, 그가 앞으로 하고 싶어 하는 일에 대한 생각은 엿볼 수 있다. '아이디어' 수준이라고 못 박은 뒤, 그는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외로운 책읽기, 함께하면 달라요"
"책읽기는 사실 외로운 일입니다. 그리고 지루한 일이도 하죠. 이를 극복할 수 있게 해주는 게 '함께 읽기'입니다.
그런데 책을 함께 읽으려면, 좋은 책을 골라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므로, 단 한 권, 혹은 몇 권만 고르는 것은 무리입니다.
함께 읽으려면 100권 정도를 고르는 게 적당합니다. 하지만 좋은 책 100권을 고르는 일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함께 책을 읽으면서, 목록을 계속 수정해 가야겠지요. 추천도서 목록이라는 게 종종 떠돌지만, 무리의 독서 생활 속에서 검증된 목록은 흔치 않습니다. 여럿이 함께 읽은 결과, 좋은 책이라고 두루 합의된 책 100권을 고르는 일은 그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아주 좋은 책을 여러 번 읽는 일도 큰 의미가 있습니다. 옛말에, 책을 백 번 읽으면 뜻을 저절로 깨우치게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책을 대충 읽은 버릇에 이미 깊숙이 젖어 있습니다. 이렇게 '수박 겉 핧기' 식으로 읽어서는 책에 담긴 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옛사람들의 독서 습관 중에서도 배울 점이 많습니다. 아주 좋은 책을 신중하게 골라서, 여러 번 읽는 것도 그 중 하나라고 봅니다."
소리를 내고, 몸을 흔들며 책을 읽자
책방 점원 출신 작가인 알베르토 망구엘은 <독서의 역사>라는 책에서 독서 방식의 변화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소리 내서 책을 읽는 방식에서 소리 없이 읽는 방식, 이른바 묵독으로 바뀐 게 갖는 의미에 대해서다.
옛 사람들이 책을 읽는 방식에 대해 관심이 많은 그는 소리를 내며 책을 읽는 행위가 갖는 의미를 되살리고 싶어 했다.
"'길담서원' 한 귀퉁이에는 작은 서당이 마련될 것입니다. 그곳에서 함께 소리를 내며 책을 읽기도 하고, 또 누군가가 낭랑한 목소리로 낭독하는 것을 함께 듣기도 할 것입니다.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책 읽기는 매우 역동적인 행위입니다. 소리를 내고, 몸을 흔들며 책을 읽는 방식은 책에 담긴 뜻을 보다 깊이 이해하게 해줍니다."
이처럼 소리를 내서 책을 읽는 일에 대한 관심은 그가 생각하는 '좋은 책'의 기준과도 관계가 있다. 그가 생각하기에, 좋은 책은 단지 좋은 뜻을 담고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고전에는 음악이 담겨있습니다"
"좋은 책은 좋은 소리를 담고 있습니다. 좋은 책은 그 자체로 음악입니다. 좋은 문장에는 고유한 리듬이 있기 때문이지요. 책을 눈으로만 읽어서는 이런 리듬을 느낄 수 없습니다. 좋은 소리를 맛볼 수 없습니다.
최근에는 고전을 읽는 사람이 많이 줄었습니다. 책을 꽤 읽는 사람조차 고전을 직접 읽는 것은 부담스러워 하는 경우가 많지요. 대신 해설서나 요약본을 읽곤 합니다. 하지만 이래서는 고전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가 없습니다.
고전에 담긴 '좋은 소리'를 맛볼 수 없는 것이지요. 고전은 되도록 원전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소리를 내서 천천히 읽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문장에서 리듬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고전은 단지 옛날에 나온 책만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고전적 가치'가 있는 책을 뜻합니다. 최근에 나온 책 중에도 '고전적 가치'가 있는 책이 있습니다.
'고전적 가치'가 뭐냐고요?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어 인간의 보편적인 물음에 답하고자 하는 책이지요. 이런 책들은 대개 눈으로만 읽어서는 느끼기 힘든 고유한 음악을 담고 있기 마련입니다."
그는 거듭해서 '좋은 책'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래서 물었다. 간단치 않은 인생 역정을 거치며 만난 '좋은 책' 가운데 어떤 것을 소개하고 싶은지에 대해.
"쉽지 않은 질문입니다. 어느 것을 딱 짚어 이야기하는 것은 무리인 듯합니다. 우선 꼽자면 역시 성서를 꼽고 싶습니다. 성서를 단지 종교적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고전으로서의 가치를 듬뿍 담고 있는 책입니다. 저는 젊은 시절, 성서를 만난 것에 대해 아주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밖에는 역시 젊은 시절, 접했던 마르크스주의 계열의 사회과학 서적들을 꼽고 싶습니다. 이런 책들을 통해,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 고민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는 인간의 내면을 다룬 책들을 주로 읽었는데, 이런 책들도 꼽고 싶습니다."
'잘 팔리는 책'이 아니라 '좋은 책'을 권하는 책방
문득 그가 "최근에 서점에 간 적이 있느냐, 어떤 서점을 자주 이용하느냐"라는 질문을 던졌다. "직장에서 가까운 광화문이나 종로의 대형서점을 종종 들른다"라고 대답했다. "대형서점에 가면 어떻던 가요"라는 물음이 다시 돌아왔다.
"공기가 탁하고, 지나다니는 사람들로 혼잡스러워서 책을 읽거나 구경하기에 썩 좋은 환경은 아닌 듯하다"라고 답했다. 이어 "잘 팔리는 책이 주로 눈에 띄도록 진열해 놓은 것도 좋은 책을 고르고 싶은 입장에선 약간 못마땅하다"라고 덧붙였다. 그의 생각은 비슷하면서, 조금 더 강했다.
"잘 팔리는 책, 이른바 베스트셀러는 좋은 책과 거리가 아주 멉니다. 책방 개업을 준비하면서,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출판 도매상으로부터 베스트셀러 목록을 건네받아 살펴봤지만, 대부분 상업적으로 기획한 결과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을 아끼고 많이 읽는 이들에게서 검증된 좋은 책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실제로 '길담서원'이 닮고 싶은 좋은 책방인 부산의 인디고 서원이나, 서울 대학로의 이음 아트도서에서 추천한 책이 이른바 베스트셀러 목록에 포함된 경우를 거의 찾기 힘들었습니다.
좋은 책방은 백화점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저 많은 책을 쌓아둔다고 좋은 책방이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정화점'이 돼야 합니다. 정선된 상품이 전시되는 가게가 돼야 한다는 뜻입니다. 책방을 드나드는 이들이 고르고, 고른 책, 정말 좋다고 인정받은 책이 눈에 잘 띄도록 배치돼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책방을 찾는 이가 책방을 드나드는 이들의 안목과 생각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책방의 진열대를 보며, '아, 이 책방은 이런 책을 추천 하는구나', '이 책방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갖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좋은 책방에는 좋은 사람이 모인다"
좋은 책방은 '잘 팔리는 책'이 아니라 '좋은 책'을 만나게 해주는 곳입니다. '그 책방에 들르면, 좋은 책을 만날 수 있다'라는 기대를 품게 해 주는 곳입니다.
그리고 이런 기대를 품고 있는 이들이 드나드는 책방은 자연스레 '좋은 사람들을 만나는 곳'이 됩니다. 이런 만남이 쌓이면, '좋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되겠지요.
1980년대 말까지만해도, 책을 함께 읽기 위한 모임들이 대학뿐 아니라 사회 곳곳에 꽤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런 모임들이 확 줄었습니다. 좋은 책과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좋은 책방이 줄어든 것도 한 원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좋은 책을 함께 읽기 위한 모임이 곳곳에 생겨난다면, 이는 작가들에게도 훌륭한 자극이 되리라고 봅니다. 소리 내서 읽을 만한 음악성이 담긴, 좋은 글을 쓰는 작가들이 많이 생겨나는 계기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좋은 책을 읽는 모임이 세상을 바꾼다
그는 좋은 책이 있는 곳에 좋은 사람들이 모인다고 말했다. 그리고 '길담서원'이 좋은 책을 함께 읽기 위한 모임이 활성화되는 촉매가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좋은 책을 함께 읽는 것은 좋은 노래를 함께 부르는 것과 같다. 길 위에서 함께 노래하고, 담장 안에서 함께 책을 읽는 좋은 사람들의 모임들이 철옹성 같던 군사정권에 균열을 냈던 역사가 우리에게는 있다.
힘이 세거나 돈이 많은 사람들이 내는 소리에 질린 이들이라면, 좋은 소리가 있는 책을 만날 수 있는 책방으로 향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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