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6년 6월 지방선거에서 필자는 민주노동당의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했다. 요즘 민주노동당은 말이 아닌 상태이지만 어쨌든 당시 민주노동당의 후보로 나서 3%의 득표를 하였다. 대중적으로 보면 정치신인에 불과한 사람이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했기에 선전까지 기대하기는 어려웠지만, 그래도 참패는 참패였기에 개인적으로 당에 미안한 마음이 매우 컸다.
15년이 지나도 여전한 철거민의 현실
그래서 선거 이후에 무엇을 할까 고민하며 두 달여를 보내다가 이왕이면 당에도 도움이 되고, 서민 생활에 좀 더 밀착한 활동을 해보고자 '전국빈민연합'이라는 단체에서 자원활동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전국빈민연합은 '전국노점상연합'과 '빈민해방철거민연합'이라는 두 단체가 모여서 만든 조직이다. 말 그대로 노점상과 철거민, 우리 사회에서 아주 어려운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단체다.
2006년 8월부터 다음해 3월까지 약 8개월 가까운 자원활동을 하면서 그분들이 사는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다. 노점상을 하게 된 사연과 구청의 단속에 쫓기면서 점점 커지는 분노의 목소리도 듣게 되었고, 철거민 마을에서는 직접 철거용역깡패들하고 몸싸움을 하기도 하였다. 15년도 더 전인 대학시절, 학생운동을 하면서 겪었던 일을 이제 사회에 나와서 30대 후반에도 눈으로 목도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마음 아팠다.
아니, 노점상이나 철거민뿐만이 아니다. 지금 누군가에게 물었을 때 이 사회가 인간다운 사회라고 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세월이 변해도 변함없는 이 불평등과 그로 인한 인간성 파괴, 시간이 지날수록 더 심해지는 이 현상에 대해 누군가는 해명을 해야 하지 않을까.
'먹고 사는 문제' 풀기 위해 경제학은 무엇을 했나
그런 점에서 사람들이 먹고 사는 문제를 해명하려 하는 학문인 경제학이, 그리고 경제학자들이 과연 제 소임을 다해 왔는지 자문해봐야 할 것이다.
최근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 교수 임용 문제로 논란을 낳고 있는 서울대학교 경제학부라고 해서 여기서 예외가 될 수 없다.
한 사회가 기본적으로 안정된 것이라 규정하고, 사람들의 관계는 자유시장체제로 그냥 내버려두면 늘 어떤 균형을 향해 달려간다는 그러한 인식이 이토록 오랫동안 현실에서 무력하다면 소위 주류경제학도 자신들의 인식이 일면적일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주류경제학과는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경제학의 존재는 진정으로 중요하다. 요즘같이 복잡한 사회에서는 하나의 이론이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는 못하는 반면, 복잡한 현상의 서로 다른 측면을 설명해주는 경우가 훨씬 많다. 이런 점에서 보면, 단 한 명뿐인 마르크스경제학 전공자인 김수행 교수의 정년퇴임 후에, 그 빈자리를 또 다시 주류경제학 전공자로 채운다면 그만큼 답답한 일도 없을 것이다.
-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 교수 임용 논란 관련 기사 ☞"아직 마르크스를 버릴 때가 아닙니다" ☞"경제학 교수들은 왜 택시기사 분신에 침묵하는가" ☞"미국도 주류 경제학 반성하는데…" ☞"'주류의 편견'이 낳은 실패, 반복하시렵니까?" |
젊은 시절에는 '소련식 사회주의의 한계' 몰랐다
필자가 대학에 입학한 것은 1990년이다. 당시는 군인 출신인 노태우 정권 시절로서 학생들은 광주 민중을 학살한 대통령을 인정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민주화 투쟁을 열심히 벌였다. 또한 자본주의 한국 사회의 여러 문제점을 눈으로 볼 수 있는 시기였기에 뜨거운 가슴으로 자본주의 이후의 세상을 고민했다. 학생들의 자발적 모임인 학회에서는 정치경제학이 주요한 연구주제였다. 그때 김수행 교수와 지금은 작고한 정운영 교수께서 맡으신 마르크스경제학 강의가 열린 대형 강의동 전체를 메운 학생들의 열기가 지금도 기억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필자를 비롯하여 학생운동에 참여한 학생들은 그 대안이 사회주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김수행 교수께서도 지적하신 바 있지만, 당시 거론된 사회주의, 엄밀하게 말하자면 소련식 사회주의가 이미 세계적 차원에서는 전혀 진보적인 것으로 인식되지 않고 있다는 현실은 잘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동유럽에 이어 1991년도에 소련마저 무너지면서 현실에 존재했던 사회주의, 요즘은 국가사회주의라고 부르는 체제에 대한 환상은 급속도로 무너졌다. 이 결과 많은 학생들과 지식인들이 소위 진보운동을 떠나기 시작했다. 당시 필자도, 필자의 선후배 동기들도 치열한 고민을 하였고 방황도 많이 하였다. 그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사회주의 몰락이 자본주의 사회의 행복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랜 기간의 고민 끝에 필자가 개인적으로 내린 결론은, 현실에 존재했던 사회주의가 사라졌다고 해서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사람들이 갑자기 행복해질 이유는 하등 없다는 것이었다. 아니 실제로 그러했다.
어찌 보면 참으로 단순한 결론이었으나 그동안 대안으로 믿어왔던 체제가 무너졌기에 이 단순한 진실을 다시 인식하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사회주의 국가들이 무너지고 나서 십여 년이 흐른 오늘을 냉정하게 바라보자.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불안정성과 국지적 분쟁 위기 고조, 그리고 한국의 사회적 불평등과 갈등은 나날이 심해지는 양상을 띠고 있다.
시장은 더 넓어졌고, 자본주의를 위협하는 경쟁 체제도 사라졌으며, 비정규직 노동자는 날로 늘어나 이른바 시장 질서를 위협하는 조직노동자들도 점점 줄어들고 있는데 왜 현실은 <경제학 원론>에 쓰인 것처럼 조화로운 상태로 흘러가지 않는가.
"공장에 열살 미만 아이가 없다"며 감동했던 19세기 자본주의 풍경
자본주의는 현실 사회주의에 승리했을지언정 여전히 자신이 먹여 살려야 할 무수한 민중에게는 더 많은 해명을 해야 할 처지에 놓여있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를 분석하기 시작한 그때에도 모순은 존재했고, 오늘날보다 비참했던 민중의 삶이 있었다. 지금은 작고한 미국의 경제학자 로버트 하일브로너의 저서로서 경상대 장상환 교수가 번역한 <세속의 철학자들>(원제 Worldly Philosophers)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19세기 자본주의의 비참한 현실 속에서 이상적인 공동체를 만들어 세상을 계몽하고자 했던 로버트 오웬이 뉴라나크에 산업공동체를 만들었을 때, 이 공동체를 방문한 사람들이 감탄하는 구절이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놀란 것은 하루 노동시간이 10시간 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공장에서 열 살 미만의 아이들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사랑스런 선생님과 즐겁게 수업을 받고 예의 바르게 자라나고 있었다."
"아동 착취의 자본주의에서 저절로 벗어난 게 아니다"
하루 10시간의 노동이 획기적인 것이 되고, 열 살 미만의 아이들이 공장에서 일하지 않아도 되는 현실이 더욱 더 놀라운 것이 되던 그 당시에 노동자들은 자신의 권리를 일방적으로 약탈당하는 신세에 있었기에 그들의 아이들도 아주 어렸을 적부터 공장노동에 익숙해져야 했다.
그러한 신세에 있던 노동자들이 어떻게 해서 그나마 오늘날 같은 보통교육과 참정권, 그리고 최소한이나마 이 정도의 공공서비스를 획득할 수 있었는가. 점점 넓어지는 시장이 효율적으로 자원을 배분했기 때문인가. 필자가 아는 한 그것은 역사의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노동자의 힘이 복지를 끌어냈다"
오늘날 노동자들이 이 정도의 삶을 영위하게 된 것은 사실 마르크스의 통찰대로 노동자들이 조직화되어 힘을 갖게 됐기 때문이다. 노동조합, 지역공동체, 사회주의 정당 등으로 조직되기 시작한 노동자들이 현실에서 힘을 갖게 되면서 그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자본가들의 양보가 나타나게 되었다. 물론, 그마저도 여의치 않은 상황이 되자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고 그 피해는 또한 고스란히 노동자, 농민과 같이 힘없는 사람들이 지게 된 것 아닌가.
비록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회주의자들이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을 만들고 이 실험이 70여년 후에 실패로 막을 내렸지만, 온건한 사회주의자들이 주축이 되어 마르크스주의를 현대적으로 해석하고 수정하여 현실에 적용한 유럽 다수의 나라에서는 강력한 복지국가가 만들어진 것도 사실이다.
오늘날 한국사회를 보자. 수량으로 따진 물질적 풍요가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오히려 그 풍요에서 행복을 느끼기보다는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나마 지키기 위해 경쟁의 노예가 되어 있으며, 최근에 와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안정적인 삶을 누리기 힘든 세대가 다수가 되어가고 있다. 요즘 인구에 회자되는 소위 '88만원 세대'가 그들 아닌가.
"'사상의 독과점'도 깨야 한다"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오늘날과 같이 국내외를 막론하고 양극화가 심해지고 불안정성이 확대되며 사람들의 안정적인 생활이 위협받고 있는 때일수록 마르크스의 통찰력을 다시금 고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150여 년 전의 마르크스주의를 현대에 맞추어 재해석하는 작업도 반드시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지난해 말 열린 김수행 교수의 정년기념식에서 축사를 위해 단상에 올랐던 분의 말씀이 생각난다. 안병직 선생이 축사를 하면서 '나는 우파로 전향한 사람이지만 사상 시장의 다양성을 위해 우파가 노력해야 한다고 본다'는 취지의 말씀을 하셨다. 그 자리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말에 공감하였다.
사상 시장의 독과점을 막기 위해서도 다양한 사상, 이론이 서로 경쟁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지금까지 많은 경제학 교수들께서 가르쳐온 것 아니던가. 더구나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 진리를 독점할 수 있다는 것은 오만이다. 필자가 아는 한 진리는 언제나 상대적 진리였다.
나날이 복잡해지고 있고, 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다수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이 어려워지는 사회일수록 현실에서 힘을 발휘했던 주류는 겸허해져야 하고, 또 그것을 드러내야 한다. 그 겸허함이 이번 김수행 교수 후임 인사에서 적극적인 실천으로 드러나기를 아무쪼록 기대해본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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