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일을 회상하던 내툰나잉 씨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는 성공회대 NGO 대학원에 아시아NGO 활동가들을 대상으로 개설한 '아시아 비정부기구학 과정'의 제1기 졸업생이었다. 지난 14일 열린 졸업식에서 11명의 동기 가운데 유일하게 총장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내툰나잉 씨의 기쁨은 단지 10여년 만에 시작한 공부를 무사히 마쳤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버마(미얀마) 민주화 운동가인 그는 지난 1994년 한국에 건너온 정치 난민이다. 1988년에 일어난 버마 민주화 항쟁에서 학생 지도자로 활동했던 그는 비밀경찰의 감시를 피해 대학을 졸업한 뒤인 1994년 망명을 선택했다.
그는 당시까지만 해도 민주화 인사들이 거의 가지 않았던 한국을 망명지로 택했다. 민주화를 이룬 한국에서 배울 게 많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런 그였기에 대학원에서 배우는 과목 하나하나가 버마의 상황과 연결돼 각별하게 다가왔다고 했다. 지난 14년간 한국에서, 그리고 지난 1년간의 공부를 통해 그는 무엇을 느꼈을까? 지난 18일 서울 성공회대 캠퍼스 근처 한 커피숍에서 그를 만났다.
"민주화 운동, 차라리 밖에 가서 하라고 하더라"
"민주항쟁 당시 우리 마을에서 학생 지도자로 활동했다.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고 감옥에 갇혔다가 다행히 2달 뒤에 풀려났다. 대학을 일제히 폐쇄했던 군사정부는 1992년에 대학 문을 다시 열었지만 비밀경찰을 대학에 배치했다. 민주화 운동 전력이 있는 제 뒤에는 1~2명의 경찰이 계속 따라다녔다.
졸업 전 부모님과 상의를 했다. 여기서 있다가 다시 감옥에 들어가면 10년 이상씩 살 수 있고, 죽을 수도 있다는 걸 모두 인정했고 떠나기로 했다. 당시 해외 매체를 통해 김대중 전 대통령, 5.18 민주항쟁 등 한국의 민주화에 대해 알고 있었다. 이를 공부하면 버마에 많은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여권을 신청했더니 비밀경찰들이 이미 내 계획을 다 알고 있더라. 버마 안에서 민주화 운동을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밖으로 나가라고, 잘 가라고 하더라."
그렇게 해서 1994년 한국에 오게 된 그는 이미 와 있는 다른 활동가들을 찾아 1998년 버마민족민주동맹(NLD) 한국 지부를 결성했다. NLD는 아웅 산 수치가 이끄는 버마의 대표적인 민주화 단체였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버마의 상황을 알고 있는 이는 거의 없었다. 더욱 큰 문제는 대부분의 활동가가 언제 쫓겨날 지 모르는 불법 체류자의 신분이었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민주화 운동을 하는 우리가 난민 신청을 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버마에서 민주화가 이뤄지면 빨리 돌아가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그러다 1999년에 2명의 NLD 회원이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했고 결국 장기적인 활동의 미래를 위해 난민 신청을 했다."
2000년 NLD 회원 20여 명이 난민 신청을 했지만 결과가 나온 건 2003년, 그것도 20명 중 회장, 부회장, 그리고 총무를 맡고 있는 네툰나잉 씨까지 3명만 지위를 인정해주겠다는 것이었다. 2005년에는 또 다른 회원 4명이 인정을 받아 총 7명이 난민 지위를 부여받을 수 있었다. 그는 "지금 <프레시안>에 글을 쓰고 있는 마웅저 씨 등 9명도 우리와 같이 신청을 했는데, 한국 정부가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거부당했다"고 말했다. 마웅저 씨 등은 현재 정부를 대상으로 한 소송에서 2심까지 승소를 했으며 현재 최종 대법원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민주화, 인권, 세계화…모두 버마 민주화 위해 알아야 하는 것들"
지난해 버마에서 대규모 민주화 시위가 일어났을 당시 국내에서도 많은 이들이 "남의 일 같지 않다"며 높은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14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에서는 버마의 군부독재나 NLD의 '존재' 자체를 잘 몰랐다고 했다. 이 같은 변화에는 NLD 한국 지부를 결성한 이들의 노력이 상당 부분 영향을 미쳤다. 내툰나잉 씨가 성공회대와 인연을 맺게된 계기 역시 이 같은 활동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많이 힘들었다. 한국 시민단체에 연락을 해도 쉽게 만날 수 없었다. 국회의원을 만나기 위해 태국에서 활동하는 NLD 대표들을 초청하는 사업도 벌였다. 2001년 대표들이 한국에 올 때 성공회대에서 큰 세미나를 열었다. 박은홍 교수를 비롯해 버마 민주화에 관심을 가지는 교수들이 성공회대에 많았고 자주 연락을 했다. 2006년 아시아 NGO 활동가들을 대상으로 한 석사 과정이 열린다는 것을 알게 됐고 다행히 입학할 수 있었다."
조희연 교수 등의 제안으로 만들어진 아시아 비정부기구학 과정(MAINS)은 아시아 각국의 시민사회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1년 4학기제로 1년 동안 집중적으로 석사과정을 마치는 형식으로 구성됐다. 기업과 공익재단의 후원을 받아 전액 장학금, 생활비를 지원한 이 과정은 지난 14일 내툰나잉 씨를 비롯해 11명의 1기 졸업생을 배출했다. 한국에 살고 있는 내툰나잉 씨를 제외한 학생들은 대부분 스리랑카, 인도, 방글라데시, 몽골, 태국,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 지역에서 활발하게 일을 하고 있는 시민단체 활동가들이었다.
내툰나잉 씨는 비록 1년 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자신에게 정말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그는 "버마의 '서울대'와 같은 랑군대를 나왔지만 민주화, 민주주의, 인권, 세계화 등에 대해서는 배울 수 없었다"며 "민주화를 배우기 위해 한국에 와서 13년을 기다린 끝에 다니게 된 대학원이라 많이 기뻤다"고 말했다.
"한국 시민사회의 변화, 시민사회와 인권, 민주주의와 민주화, 아시아와 세계화, 국제관계 등 과목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우리나라에 위해 모두 정말 알아야 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에서 온 활동가들이 같이 공부했는데 군사독재가 지속되는 나라는 버마밖에 없었다. 더 열심히 공부를 해야 했다."
그는 다른 버마인 활동가들도 대학원 공부를 하고 싶어했지만 그러지 못한 이들이 많다고 했다. 가장 큰 이유는 '난민' 지위를 인정받지 못한 탓이었다. 또 대학을 정상적으로 졸업하지 못해 대학원 공부를 할 수 없는 활동가들도 많았다.
"한국 시민사회 부럽다"
내툰나잉 씨는 한국이 '부럽다'고 했다. 군사정부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버마에서 온 그에게는 수많은 시민단체의 활동이 이뤄지는 한국 시민사회의 힘이 '부럽다'는 것이었다. 이주노동자 등 수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버마나 다른 아시아 지역 국가에 비하면 "많이 나은 편"이라고 표현했다.
"한국을 보면 국회, 정부, 법원이 상호 견제를 하면서 균형을 맞춘다. 이명박 당선자까지 도망가지 못하고 조사를 받지 않았나. 버마는 군사 정부 외에 아무것도 없다. 그들 입에서 나오는 말이 곧 법이 된다. 견제할 세력이 없는 것이다. 한국 헌법을 보면 군사쿠데타가 다시 일어날 수 없을 것 같다."
그가 쓴 논문의 주제는 '버마의 민주화'였다. 그는 "옥스포드, 하버드, 콜롬비아 대학 등 좋은 대학에서 공부하는 버마 민주화 운동가들이 정말 많다"며 "그러나 국제관계나 경제학은 많이 배워도 정작 사회학을 배우는 이들이 거의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버마를 민주화하는 투쟁도 중요하지만 민주화 이후에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에 대한 준비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즉 한국에서 느낀 것처럼 버마 시민사회의 힘을 키워야 한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지난해 대선 결과를 지켜봤던 그는 "민주화 세력이 집권을 한 뒤에도 많은 문제가 일어날 수 있다는 걸 알았다"며 버마의 민주화에도 좋은 참고가 될 것이라고 했다.
네툰나잉 씨는 이 같은 자신의 생각을 곧 버마어로 쓸 계획이라고 했다. 그는 "내가 공부한 내용을 다른 버마인들도 알 수 있도록 버마어로 된 책을 쓰려고 한다"며 "비록 지금은 버마로 반입되지 못하더라도 민주화 이후에 이런 내용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 시기는 언제쯤 올까?
"옛날보다 버마인들이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을 많이 갖고 있다. 또 경제적으로 상황이 많이 안 좋다. 먹고살기가 너무 힘들어서 죽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크다. 정치인, 학생이 아니라 이제 농민, 노동자들이 분개하고 있다. 어떤 문제가 일어나면 다들 폭발할 수 있는 상황이다.
또 2008년에는 1988년 민주항쟁의 20주년이 있는 해다. 우리 모두 20년 이상 (민주화를) 기다릴 수 없다고 보고 있다. 한국이나 외국에 사는 다른 버마인 노동자들도 지금처럼 관심이 높은 적이 없었다. 자기들 대신 민주화를 위해 많이 싸워달라며 응원을 보내주고 있다. 국제사회의 관심도 크다."
조만간 버마 사회에 변화가 올 거라는 게 내툰나잉 씨의 예상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변화가 곧바로 민주화로 직결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우리는 군사정부가 물러가라고 요구하는 게 아니다"라며 "우선 버마 민주 세력의 지도자로 인정할 수 있는 아웅 산 수치 여사와 100개 이상 있는 소수민족, 그리고 군사정부가 만나서 먼저 버마의 미래를 의미 있는 대화를 하라는 것이 가장 큰 요구"라고 말했다. 이 같은 대화를 위해서는 가택 연금 상태에 놓여있는 수치 여사와 감옥에 있는 수 천 명의 정치 수감자들을 석방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고 했다.
"우리 시대에 군사정부를 물러나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결국 우리 힘으로 해결해야 한다. 유엔 안보리에서도 수치 여사를 풀어주라고 요구했는데도 꿈쩍하지 않고 있지 않나.
우리가 한국에서 버마에서보다 편하게 살고 있다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결코 편하지 않다. 극단적인 방법까지 염두에 두고 민주화 활동을 어떻게 전개할 지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다. 내가 했던 일, 하고 있는 일, 하려는 일, 그리고 나의 노력을 버마 시민들이 어떻게 인정할 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런 판단은 그들의 몫이지 내가 신경써야 할 일은 아니니까."
내툰나잉 씨는 변화의 가능성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2008년에는 안 좋은 소식을 넘어 좋은 소식이 나올 수 있다고 믿는다"고 답했다. 곧 이어 그는 "내가 믿어요. 내가 믿어요"라며 '믿는다'라는 단어를 세 번 연속 힘주어 말했다. 그의 대답은 그가 14년의 한국 생활, 그리고 1년의 석사 과정을 마칠 수 있게한 힘의 원천이 무엇이었는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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