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박스오피스에서 선전중인 <원스 어폰 어 타임>은 상업영화, 혹은 철저한 오락영화로만 치부되고 있지만, 코믹액션이라는 겉껍질 속에 한 시대를 바라보는 일관되고 진지한 역사적, 정치적 시선을 숨기고 있다. 이 영화가 흥행면에서 비교적 장기 레이스를 밟고 있는 이유를 분석한다. |
<원스 어폰 어 타임>의 제목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멕시코>가 그랬듯 명백히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어메리카>에서 기인한다. 미국의 서부시대를 배경으로 삼았던 일련의 마카로니 웨스턴 장르가 추구한 것이 실제 서부시대의 역사라기보다는 일종의 '판타지 액션'이었던 것처럼, <원스 어폰 어 타임>이 판타지의 공간으로 삼은 것은 해방 직전의 경성, 그리고 만주이다. 웨스턴 장르는 무법자가 판칠 수 있는 공간, 즉 시스템이 불안정하고 사적 구제가 훨씬 더 광범위했던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원래 '난세는 영웅을 부르는 법'이고, 영웅은 역사보다는 전설과 신화의 영역과 더 친하다. 이 영화는 일제시대의 경성이나 만주는 충분히 서부에 필적할 만큼 웨스턴 장르의 변주를 위한 훌륭한 영화적 공간으로 사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에 마의태자 전설이나 석굴암 본존불상의 보석 전설을 가지고 영화를 시작하는 만큼("승자는 역사를 만들고 패자는 전설을 만든다"는 명대사와 함께), 민간전설들을 얽어 코믹액션와 인디아나 존스 아류의 어드벤쳐물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듯도 하다. 하지만 뜻밖에 영화가 품고있는 '식민지 조선을 바라보는 시선'은 그 어떤 (진지한) 다른 영화들보다 훨씬 정치적이고 세련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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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엔 변변히 등장하지도 않는 만주를 여기에서 언급하는 것은 우리의 주인공 오봉구(박용우)가 속해있던 독립운동 조직이 만주에서 주로 활약했던 상해 임시정부의 직속 부대, 그 중에서도 아나키스트 그룹과 가까운 것으로 추측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표면적인 주인공은 오봉구이지만, 실질적인 주인공은 각각 성동일과 조희봉이 열연한 미네르-빠의 주인과 요리사이다. 이들은 빠의 주인과 요리사, 혹은 독립군 행동대원 등으로만 언급될 뿐 변변한 이름조차 없다. (요리사의 이름은 '희봉'이지만 배우의 실제 이름과 같아 캐릭터 이름으로서는 별 존재감을 부여받지 못한다.) 배운 것 없고 무식해도 독립운동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하는 이들은 비록 맡은 임무마다 실수를 하는 데다 평상시의 행동도 어리숙하지만, 이들이야말로 '이름없는 민중'의 표상일 터이다. 이들은 거창한 대의와 명분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조선인으로 죽고싶다 / 살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을 갖고 독립운동에 투신했고, 결정적인 순간에 식민지 최고의 권력자 총감을 암살하는 데에 성공할 뿐 아니라, 이 영화에서 가장 웃기고 통쾌한 장면을 장식한다. 이들의 노선 운운 차이 역시 단순히 코미디를 위한 억지설정으로 보기 어렵다. 당시 독립운동 세력들이 노선 차이에 따라 무수한 다양한 세력들로 쪼개져 있었음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그리고 다소 윗선의 독립운동가인 오봉구와 임정37호가 속한 조직이 그 무수한 세력들 중 어디인지 감을 잡을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이들은 '의열단사(史)'를 공부했다), 두 사람의 노선 차이로 인한 갈등을 오히려 풍자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바람, 즉 '조선인으로 죽고싶다 / 살고싶다'는 소망은, 또다시 다른 캐릭터들이 무수히 많은 이름과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것과 대비된다. 미네르-빠의 주인과 요리사가 자신들의 이중 정체성을 별로 견디지 못하며 하나의 정체성으로 살고 싶어하는 이들에 이름조차 없는 이들이라면, 다른 인물들은 저마다 이중 혹은 삼중의 신분을 가지고 이를 별 갈등없이 유연하게 통제하거나(오봉구, 춘자, 임정37호 등), 자신들이 숨기고 있는 정체성에 엄청난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다(야마다 중좌, 경찰서장 황춘덕, 악명높은 형사 노덕술). 영화의 표면적인 주인공인 오봉구는 독립군 첩보대 대장 장백산13호이자 문화재 발굴 사업가 가네무라이며, 미네르-빠의 가수 춘자는 하루코이자 안중군의 손바닥 그림을 자신의 인장으로 사용하는 솜씨좋은 도둑 해당화이다. 전당포 주인은 실제로는 임정37호다. 이들은 필요에 따라 자유자재로 신분을 오가지만, 자신의 정체성에 큰 혼돈을 느끼고 있지는 않다. 반면 자신이 가진 여러한편 제국에 협력하고 있는 헌병대 야마다 중좌, 경찰서장, 악명높은 형사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자신들이 원래 조선인임을 숨기고 있고, 그 사실을 약점으로 여기며 일종의 정체성 혼돈을 겪고 있다. 이들은 자신의 원래의 정체성을 버리지 못한 채, 그럼에도 이를 버리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는 점에서 단순히 '위장'을 하고 있는 다른 이들과 큰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정체성의 분열은 말하자면 식민지 근대의 가장 근본적인 성격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일군의 '식민지 근대론'을 주장하는 역사학자들의 논의를 빌어오면, 소위 '내선일체'로 표현되는 동일화의 이데올로기와 함께, 제국의 본국이 아니라는 이유로 역시 존재했던 차별화가 함께 작동하던 식민지 조선은 근본적으로 분열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공간이다. 일본인보다 더 일본인이 되고 싶어하던 이들의 모습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지만, 미국인보다 더 미국인이 되고싶어 안달하며 영어 발음 하나에도 깐깐하게 구는 사람들이 소위 오늘날 '해방된 조국'의 권력의 윗층에 존재하는 게 현실이다. 당시 소위 대동아전쟁을 수행하며 '악마같은 서구 세력을 막아낼' 가장 근대화한 제국 일본을 욕망하며 일본인이 되고자 했던 것은 당대의 지식인들도 마찬가지였을 터이다. 단적으로, 동방의 빛 환송회 장면에서 열정적으로 친일시를 낭송하는 남녀 사회자의 모습에서 우리는 어렵지 않게 서정주와 모윤숙을 떠올릴 수 있다. (덧붙이자면, 하세가와 경부/노덕술의 이름은 일제 당시 잔혹한 친일 조선인 형사로 악명이 높았던 실제인물 노덕술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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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자의 경우는 좀더 흥미로운 케이스다. '일본인도 조선인도 아니'라 선언하는 그녀는 민족과 조국의 개념이 강하게 형성되던 당시에 국가의 권위를 부정했던, 그러나 식민지 당시 무장독립투쟁에서 그 누구보다 활약했음에도 반공을 국시로 내건 이후 대한민국에서 철저하게 역사가 지워져버린 아나키스트들을 떠올리게 한다. 등장인물 중 그 누구보다 정체성 혼돈을 겪을 만한 신분임에도, 그녀는 오히려 그 혼돈을 일찌감치 초월한 채 어느 나라의 국민이 아닌 '개인'으로서 살고자 하는 대단히 현대적인 인물이다. 영화의 마지막은 결국 춘자가 장식하게 된다. 춘자의 공연장면은 시종일관 밝고 유쾌한 영화의 분위기를 마무리짓기 위한 일종의 팬서비스 장면이지만, 이 영화가 끝까지 정치적 고려를 놓치고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객석의 반은 미군이 차지하고 있고, 재즈를 빙자해 '트로트'를 부르던 춘자는 이제 영어 가사의 팝송을 유창하게 부른다. 마지막 해피엔딩의 장면조차 미 군정체제를 거쳐 결국 한국전쟁으로 나아가고, 나아가 심지어 '어륀지'의 발음 하나에도 그토록 신경쓸 수 밖에 없는 바로 지금 한국의 현실을 제시해주는 이 영화는, 우리 역사의 아픈 상처를 끝까지 노련하게 우회한 훅으로 건드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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